♣ = F S = ♣ /진영에 깃든 선사의 삶과 사상

48 영해인홍(暎海仁洪)

浮萍草 2016. 3. 5. 12:09
    단청으로도 표현할 수 없음이여
    色相空兮 色相不空 색과 모양이 공인가 색과 모양이 공이 아닌가?“ 近看似洪上人 遠看似暎海師 가까이 보면 인홍스님 같고 멀리서 보면 영해스님이다. “ 畵虎難畵然 描水不當五色染 호랑이 그림을 그릴 적엔 포효하는 모습을 그리기 어렵고 물을 묘사할 적에는 오색으로 그리기가 마땅하지 않다. “ 毫利入莫丹靑 其師心虎 조금도 표현 할 수 없는 단청이나 스님의 마음과 포효하는 호랑이를 “ 水色竊取譬焉 空空 물의 색을 가져다가 비유한 것이다. 공은 공이다.” 1891년에 류석초(劉錫初, 19세기 후반 활동)가 남해 용문사에 모셔진 영해인홍(暎海仁洪, 1855~1884년 활동)스님 진영에 남긴 영찬이다. 류석초가 어떤 분인지 알 수 없으나 찬문만이 아니라 영해스님의 행장을 지어 진영 뒤편에 남긴 것으로 보아 스님과 막역한 사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류석초는 호랑이의 포효하는 모습과 물빛의 오색을 그려내기 힘들 듯 진영에 스님의 색상(色相)을 담는 것이야 말로 공(空)하디 공(空)한 일이라는 찬문을 지었다. 그리고 진영과 영찬으로도 미처 표현하지 못한 스님을 기리기 위해 짤막한 행장을 더하였다. 영해스님의 속성은 박 씨로 13세에 불문(佛門)에 들어 17세에 출가했다. 20세에는 영남과 호남 명산의 법사를 좇아 수백 권의 경전을 읽고 담론을 통해 배움을 터득했다. 스님은 교학자로 이름을 크게 떨치지는 못했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데 성심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장에 전하지 못한 또 다른 스님의 자취는 남해 화방사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영해스님의 5세조사(五世祖師)인 석순(碩淳)과 4세조사인 성연(性演)스님은 서산의 법손(法孫) 계원(戒元), 영철(靈哲)스님이 임진왜란 피해를 입은 화방사를 중창할 때 이를 도왔다고 한다. 이 인연은 이후 영해스님에게도 이어져 19세기 후반 화방사의 크고 작은 불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스님은 1855년에 명부전을 수리하고 명부전 불화 제작을 주도했으며,이어 1860년 나한전 수리 및 개채,1876년 채진루(彩眞樓) 및 첨성각 수리, 1879년 응향각 및 선당을 중수하는데 도감과 화주를 담당했다. 수십 년에 걸친 화방사 불사에 진력한 영해스님의 공덕은 하전(荷田) 정규석(鄭圭錫)의 시로 승화되었으며 이 시는 채진루에 걸려 사찰을 들른 이는 누구나 스님을 기억할 수 있게 했다.
    Vol 3182      
    해제ㆍ설명= 정안스님 불교문화재연구소장 / 이용윤 불교문화재연구소 불교미술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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