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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한옥마을 北村과 미스터리 애국자 정세권 [2]

浮萍草 2016. 2. 24. 09:59
    北村 골목길엔 그의 흔적이 숨어 있다
    경술국치 후 '조선 귀족'들 차지한 가회동 북쪽 땅 1930년대 정세권이 사들여 근대 한옥 단지 건설 지금도 북촌 도로 일부는 정세권 가족 명의로 남아 있어
    집 판 돈 통째 임정 군자금… 평생 민족운동 지원 일제 탄압에 가산 빼앗기고 낙향해 말년 보내
    ㆍ새로 쓰는 북촌 역사 1930년대 근대 한옥 마을인 서울 북촌(北村)에 가면 떠올려야 할 사람이 있다. 이름은 정세권(鄭世權)이다. 집 팔아 번 돈으로 물산장려운동과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그리고 조선어학회를 지원한 애국자다. 〈본지 2월 17일자 A19면 참조〉 ㆍ1935년 7월 12일 화동 129번지
    정세권(鄭世權·1888~1965)
    /사진 제공=정희영
    "경성부 낙원동 300번지에 있는 장산사 사장 정세권씨가 화동 129번지에 있는 시가 4000여 원 되는 이층 양옥 한 채를 조선어학회에 기증하였다."(조선일보 1935년 7월 13일자) 회관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윤보선 가옥 근처 길모퉁이에 있었는데,지금은'조선어학회 터'라는 표석만 남아 있다. 정세권은'집 장수'였다. 건양사라는 주택 건설 회사를 운영하며 일제강점기 중반인 1930년대 청계천 북쪽 지역 땅을 사들여 중소 규모 근대 한옥 단지를 건설한 업자였다. 정세권의 셋째 아들 정용식은 이렇게 회고했다. " 그때 어학회 회장이던 이극로 선생이 아침이면 세수하러 나오는 것도 봤다. 집에 놀러도 오곤 했다." 1989년 홍익대 건축학과 박사과정에 있던 김란기(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대표)와 가진 인터뷰에서다. 훗날 가업을 물려받은 아들 정용식은 광복 후 경북 문경 광산촌 사택 단지를 시공했으나 6·25전쟁이 터지며 파산 했다. 손자 정희영은 "친척들 빚도 갚지 못해 이리저리 작은 집으로 이사하며 살았다"고 했다. ㆍ궁궐보다 높은 마을 북촌
    조선어학회 회관이 있던 안국동을 비롯해 재동과 원서동,가회동,삼청동 일대를'북촌(北村)'이라 통칭한다. 가회동은 지리적으로 그 중심이다. 특히 1930년대 정세권의 건양사가 개발한 가회동 31번지 일대는 1930년대 근대 한옥이 집단으로 보존돼 있어 관광객으로 늘 붐빈다. 골목길 양쪽으로 담장을 나누며 들어선 기와지붕과 나무 대문,돌담….한국인보다 중국·일본인 관광객이 압도 적으로 더 많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 31번지 골목은 늘 관광객으로 붐빈다. 북촌은 1930년대 정세권을 비롯한 주택건설업자들이 만든 근대한옥 마을이다. 정세권은 여기서
    번 돈으로 민족운동을 지원했다. /박종인 기자

    가회동 31번지와 붙어 있는 삼청동 35-62번지에는 북촌 전망대가 있다. 1980년 대구에서 올라온 장옥희(88) 가족이 운영하는 사설 전망대다. 장옥희가 말했다. "집과 집 사이가 하도 좁아서 부엌에서 부엌으로 음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여섯 채마다 동서로 큰 도로가 하나, 두 채마다 남북으로 도로가 나 있는 네모 반듯한 마을이니." 그녀가 한마디 더 했다. "전망대를 찾아온 풍수가들이 그랬다. '옛날에는 궁궐을 내려다보는 곳에는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고"질서정연하게 집들이 붙어 있으니 양반집일 리가 없고 풍수가 말을 들으니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ㆍ1910년 경술국치와 조선 귀족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날 일본은 고위급 조선인 76명에게 작위를 하사했다.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따위를 받은 귀족들은 은사 공채와 토지도 받았다. 일제강점기 초기 가회동 31번지 소유자는 이재완이었다. 가회동 33번지는 민영휘, 11번지 소유자는 한창수, 95번지는 한상룡이다. 1번지 소유자는 박영효다. 이들의 이력은 각각 이렇다.
    정세권이 1935년 지었던 서울 안국동 조선
    어학회 터. 지금은 표석만 남아 있다.
    이재완(1855~1922): 후작. 은사 공채 33만6000엔. 민영휘(1852~1935): 자작. 은사 공채 5만엔. 한창수(1862~1933): 남작.덕혜옹주를 일본으로 유학 보냄. 은사 공채 2만5000엔. 한상룡(1880~1947): 동양척식주식회사 이사. 일본 제국의회 칙선 귀족원 종신 의원. 한상룡이 지은 집은 훗날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가 사들여 지금 민속자료로 지정돼 개방돼 있다. 연전에 서울시장 관저로 쓰려다 무산된 그 집이다. 한창수가 지은 집도 남아 있지만 개방은 하지 않는다. 가회동 1번지 땅은 민영휘와 은사 공채 28만엔을 받은 후작 박영효 공동 소유였다. 경성 인구가 폭발하던 1920년대 이들 자제인 이달용,민대식,한상억 등이 이 땅을 팔아치웠다. 그 땅에 가회동 북쪽 한옥 마을이 건설됐다. 2000년대 초 모 재벌이 빌라촌과 저택을 지은 1번지를 제외하면 나머지 11·31·33·95번지가 현재 관광객으로 붐비는 북촌 한옥 마을 핵심이다. 거기에 정세권이 등장한다. ㆍ정세권, 북촌을 건설하다
    정세권은 1888년 경남 고성 하이면 덕명리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에 면장이 되었다가 경술국치를 맞았다. 1919년 정세권은 경성으로 올라왔다. 막내딸 남식(88)이 말했다. "고향 초가집을 다 기와집으로 바꾸려고 했는데 나라가 망하면서 면장직을 사임했다. 더럽고 가난한 경성을 보고 아버지께서 저걸 다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정세권은 건축업에 뛰어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명동 일본인 빵집에서 배달한 빵과 우유로 식사하고 현장으로 나가 작업을 감독했다. 딸 남식은 그 빵이 먹고 싶어서 새벽마다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한상룡이 지은 가회동 백인제 가옥. 한식과 양식을 절충한 집이다.

    정세권의 회사 건양사는 이후 1940년대 초반까지 거침없이 사업을 확장해갔다. 익선동을 시작으로 가회동과 삼청동,봉익동,명륜동과 혜화동,성북동,왕십리까지 영역을 넓히며 근대 한옥 지구를 건설해갔다. 이 지역 조선인들은 주로 초가집 또는 토막(土幕)이라는 움막집에 살고 있었다. 딸 남식이 말했다. "삼청동에 소나무숲이 있었는데,아침마다 가난을 비관해 목매달고 죽는 사람이 있었다." 정세권은 다른 주택업자와 달랐다. 정세권이 지은 집은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고 작지만 마당이 있는 '살 만한 집'이었다. 그리고 한옥이었다. 딸 남식이 말했다. "조선 집이어야 조선 사람이 살기 편하다고 늘 말씀하셨다. 당신도 늘 한복을 입고 새벽에는 시조를 읊곤 하셨다." 1989년 북촌과 정세권을 연구한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대표 김란기 박사는"정세권은 서민층을 위해 월부, 연부라는 제도를 도입했고 집 규모 또한 서민에게 부담이 작은 소규모로 설계했다"고 했다. 춘원 이광수의 세검정 집도 그가 시공했고 배재학당 대강당도 그가 지었다. 정세권은 큰돈을 벌었다. 춘원 이광수는 소설 '무정'에서 그를 '건축왕'이라고 불렀다. ㆍ야밤에 찾아온 임정 요원
    막내딸 남식은 소학교 1학년 어느 날 아침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1933년이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다. 어젯밤에 상해에서 김구(金九)씨 심부름꾼이라는 사람이 와서 군자금을 내놓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 집 몇 채 판 돈이 있어 통째로 내줬다고 하셨다."
    정세권의 막내딸 정남식(88).“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 임정 요원은 굳이 밤에 찾아올 필요가 없었다. 정세권은 이미 1927년 설립된 좌우 합작 민족 단체 신간회 경성 지부 재무부원으로 활동 중이었다. 1930년 대홍수가 나자 정세권 가족과 건양사 직원들은 조선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 수재민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1931년에는 물산장려회 재무이사로 낙원동에 조선물산장려회 회관을 짓고 사비로 장려회를 이끌고 있었다. 만주동포구제회를 만들어 김좌진 장군 유족을 비롯해 만주에서 순국한 조선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민족 지사들이 양사원이라는 인재 양성 학교를 만들자 여기에도 참가해 큰돈을 출연했다. 1939년에는 고향 덕명리에 덕명간이학교를 세웠다. 초등학교로 바뀐 학교는 1993년 폐교됐다. 그리고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이 터졌다. 학자 33명과 정세권을 포함한 증인 48명이 함흥경찰서로 연행됐다. 일본 경찰은 정세권이 양사원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끄집어내 자양동 고아원 부지 3만평을 빼앗고 정세권을 석방했다. 이듬해 총독부는 건양사 건축 면허를 취소해버렸다. 집 장수 정세권은 광복 때까지 집을 짓지 못했다. 땅과 기업을 빼앗긴 정세권은 몰락했다. 가난한 조선인을 위해 근대 한옥을 짓고, 번 돈으로 민족운동을 지원한 대가였다. ㆍ2016년 가회동과 정세권
    정세권은 지금 고향 하이면 덕명리에 잠들어 있다. 1965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서울에 마련된 빈소를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한글학자 최현배였다. 덕성여대 명예교수인 손녀 정희선이 말했다. "존경하는 집안 어르신이요 세상에 자랑스러운 큰 어른이다."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 있는 정세권 묘. /사진 제공=고성문화원

    가회동 31번지 골목 옆에 한적한 길이 하나 있다. 길 주소는 가회동 33-39번지다. 지금도 등기부에는 이 길이 정세권 명의로 되어 있다. 정세권과 그 후손 명의로 남아 있는 도로가 가회동과 삼청동에 열 군데가 넘는다. 그가 만든 조선어학회 회관 터 표석에도 정세권 이름 석 자는 없다. 안내판 하나 없지만, 북촌에는 이렇듯 정세권의 흔적이 깊다. 세상에 보기 드문 인물 정세권과 그가 만든 마을 북촌 이야기였다. ㆍ새로 쓰는 북촌 역사
    일반 대중에게는 생소하지만, 정세권이라는 인물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1989년 당시 홍익대 건축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던 김란기(현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대표)가 쓴 '한국 근대화 과정의 건축제도와 장인 활동에 관한 연구'논문에 정세권이 등장한다. 김란기는 "건축학계는 집장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아 논문 통과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2005년 북촌이 한창 개발 중일 때 서양 건축가로 이름을 날리던 황두진(사진)이 북촌 한옥 다섯 채를 중건했다. 황두진은 "한옥이 생소할뿐더러 나 또한 업자들이 만든 주택단지를 그다지 높이 생각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정세권 같은 인물이 1930년대 한옥을 짓지 않았다면 근대 한옥은 맥이 끊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 익선동 한옥 지역을 조사하던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김경민은 찾는 자료마다 정세권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와 아예 연구 방향을 정세권으로 틀어버렸다. 가장 늦었지만 김경민은 실질적으로 정세권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 김경민은 "국회도서관까지 뒤져 자료를 모아보니 정세권은 단순한 집장수가 아니라 잊힌 애국 기업가였다"고 했다. 김경민은 '경성의 건축왕 정세권(가제)'을 집필 중이다. 역사는 사람이 만든다. 역사는 땅에 각인된다. 북촌 역사가 다시 쓰이는 중이다.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 전문기자 sen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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