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땅의 歷史

남사당패의 땅 안성과 여자 어름사니 서주향

浮萍草 2016. 3. 9. 12:19
    봄이 오면 바우덕이는 줄을 탑니다
    
    ㆍ어린 광대 서주향
    불당골 사당에 있는 바우덕이 동상.
    주향(24)의 가족은 1996년 경기도 성남에서 안성으로 이사했다. 서주향이 네 살 때였다. 숫기도 없고 끼도 없는 평범한 계집아이였는데, 안성으로 오면서 대략 인생 경로가 정해지게 되었다. 바로 이웃집에 살던 최순칠이라는 사람이 원인이었다. 최순칠은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 보존회 열성 회원이었고 몸집 작고 가냘픈 계집아이 운명을 단번에 알아 보았다. 날이면 날마다 최순칠은 주향네 집에 찾아가서"주향이 풍물 한번 시켜보자"고 졸랐고 화물차를 몰던 아버지 서영석은 "절대 불가"를 외치며 물리치곤 했다. 주향이 초등학교 입학을 한 달 앞둔 1997년 봄 최순칠은"그러면 구경이라도 시켜주겠다"며 주향을 데리고 보존회 사무실로 갔다. 갔더니 길가 공터에 컨테이너 사무실이 있고 거기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 주향은 "서울 한옥마을 놀이마당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주향을 보고 보존회 누군가가 말했다. "얘, 무동 태우자." 주향은 얼른 공연복으로 갈아입고서 또래 친구 한 명과 언니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공연을 했다. 무사히 공연이 끝나고 할아버지들이 주향에게 1만원을 쥐여주며 말했다. "수고했다, 주향아 다음에 또 하자." 19년 전 일이니 공연 장면은 기억나지 않고 집에 오다가 만원짜리 지폐를 잃어버려 엄마한테 혼날까 봐 공포에 떨었던 기억밖에 없다. 서주향은 가끔 일흔 살을 훌쩍 넘긴 최순칠 할아버지를 만나면 부둥켜안고 운다. " 내 모든 것을 만들어준 할아버지가 이렇게 늙어버려서 이젠 내가 돌봐야 할 때가 되었으니…" 서주향은 경기도 안성 남사당패의 어름사니다. 높이 2m가 넘는 외줄에서 재주를 넘고 만담을 펼치는 광대다. ㆍ경복궁 중건과 요절한 바우덕이
    안성 남사당패에서 줄을 타는 서주향
    1865년 4월 26일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불탄 이래 폐허로 남아 있던 경복궁의 중건을 시작했다. 경비를 보충하려고 원납전을 찍어내 벼슬을 팔고 세금을 올리고 조선 팔도 목재란 목재는 죄다 가져와 궁궐을 지었다. 서낭당을 지키는 큰돌과 재목도 공출하고 양반집 가족묘에서도 거목들을 베어다 썼다. 공사 이듬해에 기름을 칠해놓은 목재더미에 큰불이 나 목재와 전각이 불탔다. 대원군은 "산과 묘 주인 허락 여부는 상관하지 말고 벌목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관리들은 "차라리 벌을 내리라"며 거부했다. 지금 서 있는 찬란한 경복궁은 그런 우격다짐 위에 완성됐다. 대원군은 자진해서 부역을 하는 백성들에게 위로금을 주고 짬짬이 농악 공연을 베풀어 피로를 풀게 했다. 팔도에서 동원된 사람들인지라, 고향에서 올라온 공연단이 인기였다. 공연단은 동향인 노동자들 앞에서 고향에서 불렀던 노동요를 부르며 작업을 독려하곤 했다. 안성에서 온 사당패인 개다리패는 우두머리가 열일곱 먹은 여자였다. 미모가 출중한 명창이었다. 이름은 김바우덕이였다. 한자로 김암덕(金岩德)이라고 썼다. 천민(賤民)이었지만 용모는 경국지색에 노래와 춤은 천하제일이었다. 바우덕이가 이끌던 개다리패는 팔도 제일가는 사당패였다. 본거지는 안성 서운산 아래 불당골에 있었다. ㆍ나이 열다섯에 사당패 우두머리 된 바우덕이 살던 곳 지금은 스물넷 젊은 여자 서주향이 줄을 타고
    … 1865년 중수식 때 벌어진 경연대회에서 개다리패가 우승을 했다. "바우덕이가 하도 춤을 잘 추어 대원군이 손을 잡아 주었고 바우덕이는 그 손을 명주에 싸고 다녔다"는 말도 있다. 얼마나 노래를 잘했으면 44년이 지난 1909년 황성신문은'비취(翡翠)'라는 명창을 소개하면서"안성 바우덕이가 와도 쥐구멍을 찾겠더라"라고 비유했을 정도였다. 세상이 바뀌었다. 20세기 바다 건너 유성기가 들어오고 일본에서 곡마단이 들어왔다. 춤과 노래가 위주이던 사당패 공연은 경쟁이 되지 않는 희한한 유흥거리가 팔도를 휩쓸었다.
    여자 단원이 절반이었던 사당패는 도태됐다. 대신 화려한 기예로 무장한 남성 사당패거리가 등장했다. 이들이 바로 '남사당패'다. 바우덕이는 1870년 남사당패의 시대가 오기 전 폐병으로 죽었다. 스물두 살이었다. 개다리패 동료들은 젊은 우두머리를 개울가에 묻었다. ㆍ남사당패와 서운면 불당골
    안성장은 조선 3대 시장이었다. 한양과 거리도 적당히 멀고,교통도 편했고 물자도 많았다. 돈을 따라 떠도는 사당패에게 안성은 낙원이었다. 안성 개다리패는 전국 최고였다. 사당패들이 부르는 민요 가사들에는 '안성 청룡에 가자'는 내용이 나온다. 개다리패, 그리고 개다리패를 이어받은 남사당패는 안성 서운면 불당골에 뿌리를 두고 전국을 유랑했다. 불당골 청룡사는 남사당패의 후원자였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규모를 보면 옛 영화가 예사롭지 않다. 광대들은 이 절에서 만든 부적을 팔아 수입 일부를 절에 기부했고 절은 이들에게 신분을 보장하는 사찰 신표를 내줬다. 공생하는 사이였다. "청룡사가 주동이 되어 어린 무동을 양성해 각처로 보냈다"는 일제강점기 신문기사도 있다. 바우덕이는 청룡사에서 산 하나 너머 개울가에 묻혀 있다. 개울에 휩쓸려갔는지, 지금 무덤은 가묘다. 묘비에는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치마만 올려도 돈 나온다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는 이 지역 민요가 적혀 있다.
    여자 어름사니 서주향이 외줄 위에서 재주를 피운다. 서주향은 다섯 살 때 풍물단에 들어가 스물네 살인 지금까지 줄을 탄다.오는 3월 28일 2016년 첫 상설
    공연이 열린다. /박종인 기자
    ㆍ서운산 불당골은 八道 주름잡은 남사당패 근거지 미리내 골짜기는 박해 피해 숨어든 천주교 성지
    사당패도 사라졌고 후예인 남사당패도 사라졌다. 세상이 서양에서 건너온 화려한 볼거리를 즐기고 있을 때,그 후손의 후손의 후손인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 보존회가 1989년 경남 마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대원군으로부터 상을 받은 지 100년 하고도 24년 만에 바우덕이가 부활한 것이다. 이후 안성에는 시립남사당풍물단이 생기고 바우덕이는 안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부활했으며 상설공연장 객석은 늘상 만원사례다. 바우덕이가 살았던 불당골에는 광대로 천대 받다 요절한 이 여자를 위해 아담한 사당이 서 있다. ㆍ미리내 성지
    불당골에서 광대들이 천대 속에 사는 동안 자동차로 30분 거리 북쪽 양성면 미산리에서 천주교도들은 이상향을 건설했다. 1801년 신유박해와 1839년 기해박해 때 경기도와 충청도에 살던 천주교도들이 숨어들었다. 그때 골짜기에 밤이면 반짝이는 인가 호롱불 불빛이 은하수 같다고 해서 교도들은 미리내라고 불렀다.
    안성 양성면에 있는 미리내 천주교 성지.

    1846년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부 김대건이 한양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김대건은 나무에 상투를 묶인 채 목에 칼을 열두 번 맞고서 목이 잘렸다. 미리내 교도들이 한 달 보름 만에 시신을 수습해 미리내로 가져왔다. 1928년 미리내에 김대건 신부를 기리는 성당이 섰다. 이후 미리내는 성지가 되었다. 성지라고 인간사가 모두 성스럽지는 않았다. 미산리에는 약수터가 있었다. 약숫물을 먹으면 장님도 눈을 뜬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약산골이었다. 약산골에는 침 잘 놓는 고씨가 살았다. "앉은뱅이를 고쳐주고서 돈을 조금 주자 '아직 덜 고쳤다'며 다시 침을 놔서 도로 앉혀버린"욕심 많은 침쟁이였다. 약산골 사람들은 고씨를 '천냥천냥 고천냥, 만냥만냥 고만냥'이라고 불렀다. 100년 전 이야기다. 인간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거닐어도 미리내 성지는 예사롭지 않다. 말 그대로 성지다. 성지임을 알고서 찾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공간이 되었기에 공기에도 신성한 향내가 흐른다. ㆍ바우덕이와 서주향
    청룡사 대웅전을 떠받치는 나무 기둥.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 나무를 썼다.
    멋도 모르고 할아버지 손잡고 공연까지 한 다섯 살짜리 계집아이는 지금 스물네 살이다. 대학교도 졸업하고 지금 남사당 풍물단 정식 단원이다. 그녀가 말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줄타기를 배웠다. 민속촌에 가서 선생님한테서 배웠다. 재미나 사명감 따위는 없었다. 그저 '하니까 되네?'하는 신기함에 빠져서 했다." 신기함에 매료된 어린 여자아이는 학교도 공식적으로 빼먹고 연습을 했다. 집-학교-남사당을 오갔다. 학생단원이니 공연할 때마다 1만원씩 용돈을 받았다. 중학교를 마칠 무렵 "이제 다른 일 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전국을 돌아다녔다. 수학여행도 엠티도 간 적 없다. 과외도 학원도 모른다. 그저 줄만 탔다. 그게 내 인생 전부다. 지금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학생단원에서 객원단원을 거쳐 서주향은 2년 전에야 정식단원이 되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공연 한 번에 수고비 1만원을 받았다.. 가냘픈 몸매에 온몸 다 까져가며 배운 줄타기가 인생이 되었다. 그래도 떨어질까 무섭다. 공연을 하다보면 관객들이 수군거린다. "여자다, 여자."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서주향을 보며 바우덕이를 떠올린다. 서주향이 말했다. "바우덕이가 누군지는 알지만 꼭 그리 되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저 내 일이다 하고 할 뿐이다. 어름산이가 되지 않았으면 우리집 형편에 그 많은 해외공연은 어떻게 다녔을까. 최순칠 할아버지한테 고맙고 나를 인정해주는 아버지 어머니가 고맙다. 박수쳐주는 관객들이 고맙다." ** 안성에는 2003년 하늘로 간 시인 조병화 문학관이 있다. 조병화의 고향 양성면 난실리에 있다.
    조병화는 어릴 적 떠났던 고향으로 만년에 돌아와 시와 그림을 만들며 살았다. 고향에 있는 문학관에는 그의 일생이 기록돼 있다. 거기 전시관에 그가 쓴 시가 적혀 있다. '살은 죽으면 썩는다 / 어머님 말씀.'('산다는 거' 전문) 우리네 인생은 우리가 전적으로 결정하지 못한다. 150년 전 바우덕이가 그러했듯 줄 타는 여자 어름산이 서주향의 인생도 운명적이다. '철모른다'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 다섯 살에 두 여자는 사당패에 들어가 인생을 그리 살았고 그리 살고 있다. 그래,시인 말대로 살은 죽으면 썩는 법. 하지만 지금 안성으로 가보라, 그 뒤 무엇이 남아서 우리들 가슴을 울리는지 느껴보라.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 전문기자 seno@chosun.com / 편집=최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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