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땅의 歷史

1930년대 한옥마을 北村과 미스터리 애국자 정세권 [1]

浮萍草 2016. 2. 17. 09:35
    北村에 가시거든 애국자 정세권을 찾아보십시오
    1930년대 북촌에 대규모 한옥주택단지 건설 물산장려운동 예산 절반 이상 대며 자립운동 주도 좌우 합작 신간회 참여해 독립운동 돕기도 조선어학회에 건물 희사… 훗날 고문받고 재산 빼앗겨 2016년 북촌 어디에도 '정세권' 이름 석 자 찾을 수 없어 진 한 장이 있다. 1949년 6월 12일 '십일회' 기념사진이다. '십일회'는 1942년 10월 1일 벌어진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자 모임이다. 맨 앞줄 왼쪽에서 둘째 자리에 두루마기를 입은 백발노인이 앉아 있다. 외국 관광객으로 붐비는 서울 종로 북촌(北村)에 가면 반드시 떠올려야 할 사람이다. 세간에서는 '전형적인 조선 양반 마을'로 알고 있지만,21세기 눈앞에 보이는 북촌은 조선 시대와 관계가 없는 1930년대 개량 한옥 마을이다. 그 한옥 마을 전부를 한 사람이 만들었다. 이름은 정세권(鄭世權)이다. ㆍ미스터리의 애국자 정세권
    지난 15일은 일제 강점기 최대 좌우 합작 민족운동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 창립 89주년이었다. 1927년 2월 15일 창립된 신간회 회장은 당시 조선일보 사장인 월남 이상재였다. 그때 정세권은 신간회 경성지부 재무부원이었다. 4년 뒤인 1931년 4월 20일 오후 4시 30분 경성 종로 낙원동 300번지에서 조선물산장려회 회관 기공식이 열렸다. 1923년 '조선인은 조선 물산을 만들고 쓰자'는 취지로 지식인과 상공인들이 만든 운동 단체였지만, 재정 불안으로 사무실조차 없던 차였다. 4층 양옥 건물 1층은 사무실, 2층은 물산 진열관, 3층은 식당, 4층 옥상은 가정집이었다. 정세권은 옥상 집에 살았다. 회관 부지와 건설비는 모두 정세권이 댔다.
    1946년 6월 12일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자 모임인‘십일회’기념사진. 맨 아랫줄 왼쪽에서 둘째가 정세권이다. /한글학회 제공

    1929년 정세권은 물산장려회 재무이사로 선출됐다. 1929~1930년 물산장려회 총예산은 1866원53전이었고 이 가운데 그가 지출한 사비(私費)는 65.4%인 1220원이었다. 당시 한옥 한 채가 500원이었다. 훗날 만해 한용운이 쓴 글 제목은 이렇다. '백난중분투(百難中奮鬪)하는 정세권씨께 감사하라.' 1935년 3월 15일 경성 종로 명월관에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이 창립됐다. 민족운동가들이 '길사(吉事), 흉사(凶事)에 함부로 돈을 써버리지 말고 그것을 영구히 기념되게 유익한 도서 출판을 하게 하자'며 만든 출판사 겸 도서관이다. 사무실은 종로 화동 129번지 2000평 땅에 있던 2층 건물이었다. 역시 땅과 대지는 정세권이 기증했다. 세월이 흘러 1942년 8월'국어를 사용하다가 벌을 받았다'고 적힌 함경남도 항흥영생고보 여학생 박영옥 일기장이 조선인 형사 안정묵,일본명 야스다(安田)에게 발각됐다. 그해 10월 1일 경성 화동에 있는 조선어학회 회관에서 한글학자 33명이 경찰서로 끌려갔다. 증인 48명도 끌려갔다. 사람들은 몽둥이로 맞는 육전(陸戰),물을 코와 입에 퍼붓는 해전(海戰),공중에 매달아 패는 공전(空戰) 고문을 당했다. 정세권 또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화동(花洞)에 있던 조선어학회 회관은 땅도 건물도 그가 기증한 재산이었다. 춘원 이광수는 이렇게 기억한다. "토목 두루마기를 입고 의복도 모두 조선산으로 지어 입고 다니며 좀 검고 뚱뚱한 영남 사투리를 쓰고 말이 적은 사람인 것만 보았었다. 하지만 그의 인격을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인격의 힘이 이처럼 영향이 큰가를 느꼈다." 기이하지 않은가. 경제 자립과 민족 독립운동 그리고 민족 문화운동에도 그가 나온다. 북촌을 포함해 익선동·봉익동·성북동·창신동 등 청계천 북쪽 땅과 서대문·왕십리·행당동에 조선인 마을을 건설하고 그 돈을 민족 운동에 아낌없이 퍼부은 미스터리의 인물이다. ㆍ2016년 서울 북촌(北村)
    경복궁과 창덕궁·종묘 사이에 있는 동네를 북촌이라고 한다. 삼청동과 가회동, 재동과 계동이 북촌에 포함돼 있다. 한옥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북촌은 큰 길가는 물론 골목길에도 크고 작은 공방과 기념품 가게가 숨어 있어 관광객들 눈과 발을 바쁘게 만든다. 기와 처마 선이 중첩돼 있는 가회동 31번지 언덕길은 과장하면 '길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관광객이 붐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정서가 남아 있는 골목길이다. 나무 대문마다'주민이 살고 있으니 조용히'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주민들은 골치지만 한국인에게는 추억을 주고 외국인에게는'가장 한국적인 그 무엇'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다.
    서울 가회동 31번지 전망대에서 본 북촌 풍경.일제 강점기 정세권이 대규모 필지를 잘게 쪼개 만든 서민용 개량 한옥단지다.정세권은 개발에서 나온 돈으로
    물산장려회와 신간회, 조선어학회를 지원했다. /박종인 기자

    서울 종로구가 펴낸'북촌'유인물에는'예로부터 권문세가들의 주거지였던 곳으로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에서 북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고 돼 있다. 서울시 자료'북촌 산책'에는'조선 시대 양반들이 터를 잡으면서 시작된 이곳은 당시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길과 물길들의 흔적,그리고 한옥들을 만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사람들은 북촌 초입 관광 안내소에서 나눠주는 이 두 자료와 지도를 따라 골목길을 걷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살던 집들"이라고. '전혀' 사실과 무관하다. ㆍ1930년 경성 북촌 재개발
    조선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경성은 일본인과 지방에서 몰려드는 조선인으로 만원을 이루었다. 일본인은 청계천 남쪽 남촌에 자리를 잡고 일식 가옥을 지었다. 조선인은 북쪽 북촌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북촌은 원래 고관대작들이 살던 언덕이었다. 나라가 사라지면서 조선 시대 사대부 집들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성삼문·박규수·홍영식과 김옥균 집이 그랬다. 가회동 31번지는 대부분 명성황후 친족인 민대식 가문 땅이었다. 민대식이 두 아들에게 지어준 인사동 쌍둥이 집은 한 채는 뜯겨나가 주차장으로 한 채는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다. 상상해보라,저 넓은 언덕배기에 드문드문 서 있는 대저택들을.세종대왕 스승이었던 맹사성은 그 가회동 꼭대기에 살았다. 경복궁으로 출퇴근하면서 언덕을 넘었는데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면서 다녔다. 그 언덕을 맹현(孟峴)이라고 했다. 지금 가회동 31번지에 있다.
    가회동 31번지 북촌 골목 풍경. 정세권이 만든 한옥 처마 선이 아름답다.

    1920년대 인구가 폭발하면서 총독부는 이 땅들을 거둬 주택 건설업자에게 불하했다. 남촌이 밀집되면서 북촌으로 진출하려는 일본 업자들에 맞서 조선 건설업체들은 경쟁하듯 북촌 땅을 매입해 거대한 필지를 수십 개로 나눠 대청 유리문과 처마 함석챙이 있는'똑같은' 표준형 한옥들을 줄 맞춰지었다. 상하수도도, 전기도 없이 초가집에 살던 조선 서민들에게 편의 시설이 있는'마이홈'이 생긴 것이다. 여러 업체 가운데 정세권이 운영하던 건양사는 2등 없는 1등이었다. 정세권과 북촌을 연구 중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김경민은 이렇게 평가했다. "조선인들을 위한 주택 개발을 조선인이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마주한 삼청동의 모습은 대량의 적산 주택 단지이지 한옥 집단 지구가 아닐 수 있다." 정세권과 함께 당시 물산장려운동을 벌였던 법조인 최태영(작고)은 "서울 전체에 집을 물산 장려한 사람"이라고 했다. 김경민이 찾아낸 정세권의 건축 철학은 명쾌하다. '건축비, 유지비와 생활비 등의 절약에 유의함이 본사의 사명인가 합니다. 재래식의 행랑방,장독대,창고의 위치 등을 특별히 개량했고 중류 이하의 주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연부,월부의 판매 제도까지 강구하여 주택난에 대해서는 다소의 공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정세권 '건축계로 본 경성' 1925) 정세권의 딸 정정식(작고)은 김경민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고." 옛 양반 대저택이 남아 있다면 경관은 좋았겠으나 1930년대 북촌 개발은 필연이었다. 우리 눈앞에 있는 북촌 한옥은 90%가 그때 정세권이 지었다. 한창수 집터가 있던 큰길 건너 가회동 11번지 한옥촌도 그가 건설했다. ㆍ후배 건축가 황두진과 정세권
    건축가 황두진은 북촌 한옥 마을 중건사업이 시작되던 2000년대 중반 정세권이 만든 가회동 31번지와 11번지 한옥 여덟 채를 중건했다. 서울 토박이인 황두진은 서울대 건축과를 나오고 예일대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전형적인 서양식 건축가인 그에게 건축주가 한옥을 맡겼을 때 장난인 줄 알았다. 대학에서는 한옥사는 배웠지 한옥은 배운 바가 없었다. 공부를 하면서 한옥을 고치면서 정세권을 알게 됐다. 그가 말했다. "1930년대는 대호황기였다. 소규모 개량 주택을 짓지 않으면 폭발하는 인구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정세권이 북촌을 이렇게 개발하지 않았다면 한옥의 맥도 끊겼을 수 있다. 1930년대 한옥은 그 자체가 근대 건축물로 큰 의미가 있다. 북촌에서 제일 오래된 한옥은 윤보선 집인데, 1870년 건물이다." 많은 건축가가 그를'무명 집장사'로 깎아내리고 그가 남긴 작품들을 평가하지 않는다. 한옥 마을로 사람들을 북촌으로 끌어들이는 서울과 종로구는 아예 정세권이라는 건양사라는 이름을 그 어디에도 언급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지금도 '조선 시대'라는 환상 속 향기를 맡으며 북촌을 걷고 있다. 정세권은 청계천 북쪽 개발로 큰돈을 벌었다. 그 돈을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에 경제 독립을 주장하는 물산장려회에, 문자 독립을 희구하는 조선어학회에 쏟아부었다. 고문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총독부에 땅도 다 빼앗겨버렸다. 교수 김경민이 말했다. "조선 서민들의 생활 개선을 실천한 사람이다. 물산장려운동도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계몽 사업이었다." 암울한 식민 시대에 자기 이름을 걸고 애국 운동을 한 인물,정세권이 북촌을 만들었다. 아니 정세권이 바로 북촌이다. 그 북촌을 오늘 걸어가 보시라.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 전문기자 sen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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