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땅의 歷史

천안 아우내장터와 無名氏 先人들

浮萍草 2016. 1. 27. 09:53
    先人들 흔적 품은 천안 들판에 해가 솟았다
    들판 곳곳에 자기 희생한 옛사람들 자취가… 흑성산 아래엔 1987년 독립기념관이 서고 '유관순 만세 운동' 아우내는 순대 거리로 변신 천안 여행은 선인들 발자국 따라 '고마움의 순례길'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에 장이 섰다. 음력 3월 1일이었다. 이날 오후 장터에 맞붙어 있는 헌병 주재소에 40여 명이 몰려갔다. 맨 앞에 있던 유중무가 두루마기 허리끈을 풀어 일본인 헌병 목을 졸랐다. 제지하는 조선인 헌병 보조원 맹성호와 정수영에게 그가 일갈했다. "너희는 어찌 왜놈들과 함께 일을 하는가. 함께 만세를 부르라." 몇 시간 전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던 3000여 명 가운데 많은 이가 일본 헌병대 총에 숨진 상황이었다. 유중무의 형 중권은 총검으로 옆구리와 머리를 찔려 죽었다. 형수 이소제도 함께 죽었다. 열일곱 먹은 조카딸이 주재소로 달려와 주재소장 고야마(小山) 멱살을 흔들었다.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찌하여 내 민족을 죽이는가." 군중이 1000명으로 불어나자 헌병대는 이번에도 사격으로 응대했고 군중은 흩어지거나 죽거나 끌려갔다. 그날 장터에서 일본 헌병 총검에 죽은 사람은 19명이었고 옥사(獄死)하거나 고문으로 훗날 순국한 사람은 29명이었다. 무명씨(無名氏)는 셀 수 없다. 아우내 만세를 주도하고 주재소장 멱살을 잡았던 소녀도 감옥에서 죽었다. 이름은 유관순이다. 1987년 8월 15일 아우내장터 서쪽 흑성산 아래에 대한국인 30만명이 모였다. 시간은 68년이 흘렀고 공간은 장터에서 7㎞ 서쪽으로 이동한 그날 그 자리,사람들 앞에서 독립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ㆍ두 강이 흐르는 병천과 유관순
    잣밭내(栢田川)와 치랏내(칡밝내·葛田川)가 모인다고 해서 아우내라고 했다. 두 강이 만나는 곳을 이르는 충청도 말이다. 강원도에서는 아우라지라고 한다. 강이 모이니 교통이 좋아 아우라지와 아우내에는 대개 장이 열렸다. 지금은 한자로 병천(竝川)이라고 부른다. 길이 사통팔달인 천안은 '천안 삼거리'가 유명할 정도로 교통 요지였다. 큰 전투나 전쟁을 치렀다는 기록도 별로 없다. 그래서 천안, 하늘(天)처럼 평안한(安) 땅이었다. 1919년 그날까지는.
    흑성산 꼭대기에서 동쪽을 바라본다.이른 아침 햇살이 독립기념관부터 산 너머 아우내까지 황금빛으로 물들인다.자기 몸을 팽개친 옛사람들 덕에 이 벌판에
    고속도로도 아파트도 공장도 존재할 수 있었다. /박종인 기자

    1902년 12월 16일 아우내에서 동쪽으로 5리 떨어진 용두리에서 유관순이 태어났다.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는 선각자였다. 아버지는 조병옥 박사의 아버지인 조인원과 함께 교회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용두리 교회는 1905년 을사늑약 의병 때 한 번, 1907년 국채보상운동 때 한 번 이렇게 두 번 일본에 의해 불탔다. 관순이 열세 살 되던 1915년 유중권은 딸을 서울 이화학당으로 유학 보냈다. 열일곱 살에 용두리로 시집 왔던 김원숙은 다섯 살짜리 관순을 이렇게 기억했다. "귀밑머리, 황새머리,조랑머리로 머리를 세 갈래로 땋고 사내처럼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먼 조카 유제한은 이렇게 기억한다. "장난을 하면 반드시 우두머리가 되었다.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면 한사코 듣지 않고 제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어른들도 능히 그 뜻을 굽히지 못하였다." 영민한 이 소녀는 '무쇠 돌격 청년 남아야' 같은 창가를 즐겨 불렀다. ㆍ천안, 천안 사람들
    천안에는 인재도 많았다. 진주성 전투를 이끈 장군 김시민 청산리 전투를 지휘한 철기 이범석,상해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이 천안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 어사 박문수도 이곳 사람이다. 조병옥 박사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지식인들이 허황한 형이상학에 빠져 있을 때 과학과 경제를 실학자들에게 설파한 북학파 실학자 홍대용도 천안에서 나고 죽었다. 천만다행으로, 이 선인(先人)들이 태어난 곳이 정확하게 파악돼 있다. 홍대용 선생은 무덤은 물론 생가 주춧돌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느낌이 더 깊다. 이 선인들 생가 위치를 알리는 이정표들은 파란색 교통 안내판만큼이나 많이 볼 수 있으니, 이 냉혹한 겨울날 천안 여행길은 감사의 순례길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험로(險路)였다. 초인적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길이었다. 이동녕은 누구인가. 나이 서른에 북간도에 학교를 세우고 조선에서 신민회를 만들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이후 나이 쉰에 상해 임시정부를 조직해 풍찬노숙하며 임시정부를 지켜낸 인물이다. 1940년 중경(重慶)에서 숨진 뒤 광복 후 서울 효창공원에 묻혔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남을 헐뜯기도 하고 핀잔도 주고 질투도 하며 '시시하게' 소시민적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닌가. ㆍ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순국자 추모각에 모신 아우내장터 만세 운동
    순국자들 위패.
    유관순과 무명씨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 전 서울에서 기미만세운동을 경험한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은 친구들과 함께 고향으로 흩어졌다. 아버지와 동네 어르신들에게 상황을 고한 유관순은 장이 열리는 음력 3월 1일 장터 만세 운동을 계획했다. 태극기를 만들고 교회를 돌아다니며 정당성을 역설했다. 양력 3월 31일 매봉산 봉화로 연락을 주고받은 주동자들은 이튿날 오후 1시 장터에서 연설을 통해 만세 운동을 시작했다. 일본 주재소는 무차별 사격으로 응대했다. 시신을 둘러업고 주재소로 몰려간 조선인들에게 헌병대는 또 총을 쐈다.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김구응은 총에 맞아 두개골이 박살 났다. 아들에게 달려와 통곡하는 어머니 최씨도 칼에 찔려 죽었다. 유관순 부모도 총과 칼에 맞아 죽고 오빠도 끌려갔다. 공주교도소에서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만세 운동을 하다가 고문 끝에 이듬해 9월 28일 숨졌다. 그렇게 순국한 사람이 모두 48명이다. 병천면에 있는 순국자 추모각에는"신원 미상인 순국자가 다수 있음"이라고 기록돼 있다. 병천면 매봉산 기슭에는 아우내장터 순국자 추모각이 서 있다. 1969년 유관순 추모각이 세워졌고 2009년 다른 순국자들 추모각이 세워졌다. 이태원 공동묘지에 있다가 일제가 군용지로 개발한다며 갈아엎어 사라져버린 유관순 묘는 이곳에 초혼묘로 되살아났다. 이들이 있었기에 아우내장터는 이제 전국 최고라는 병천순대거리로 변신해 미식가들이 침을 흘리며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일제에 의해 전소됐던 용두리 교회는 훗날 유관순 기념 교회로 바뀌었다. 이름은 매봉교회다. 그 옆에 유관순 생가가 있다. 생가는 일제가 불태워 사라졌고 지금 있는 초가집은 복원한 집이다. 교회 외벽에는 봉화를 올리는 소녀 청동 조각이 걸려 있다. 역사적 의미는 물론 건축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교회다. 그 뒷산에 유관순이 봉화를 올렸던 봉화 터가 있다. ㆍ68년 뒤 1987년, 독립기념관
    1987년 8월 15일 아우내장터에서 직선거리 7㎞ 서쪽 목천에 독립기념관이 개관했다. 전국에서 찾아오기 쉬운 입지에 위에 언급한 숱한 선인들 흔적이 있는 땅이었다. 1982년 식민 정책에 관한 일본 역사 교과서 파동으로 독립기념관 설립 운동이 벌어진 지 5년 기공식 4년 만이었다. 건립 결정은 1982년 8월 28일, 경술국치 72년 하루 전날에 발표됐다. 즉각 토지가 수용되고 이주민 131가구도 기꺼운 마음으로 고향을 떠났다.
    병천면 용두리에 있는 유관순 생가와 매봉 교회

    '기공식 후 4년'.성급한 세월이었다. 500억원에 달하는 국민 성금으로 건축된 독립기념관은 공기를 2년이나 단축하며 지어지다가,1986년 8월 4일 저녁 9시 20분 380볼트짜리 전력선을 110볼트짜리 전구에 연결하는 바보 천치 같은 실수로 천장이 불타버렸다. 국보 1호 남대문 화재보다 더 충격이 컸다. '빨리빨리' 증후군을 중증으로 앓고 나서야 독립기념관은 이듬해 8월 15일 개관했다. 그래도 나았다, 없는 것보다는 말만 나오다 사라지곤 했던 독립기념관이 광복 42주년에야 생긴 것이다. 2016년 소시민으로 살고 있는 우리를 있게 한 선인들 자취가 거기 모여 있으니 이 엄동설한에도 독립기념관에는 아이들 손잡고 눈밭을 걷는 가족이 많다. ㆍ2016년 겨울 천안벌
    독립기념관 서쪽에 흑성산이 있다. 해발 519m인 이 산 정상에는 산성이 있다. 삼국시대에 만든 성이다. 산성은 지금 KBS 중계소로 쓰인다. 성곽을 따라 남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해발 454m 조망점이 나온다. 동쪽과 서쪽이 속이 후련하도록 다 보인다. 부디 이른 아침 해 뜰 무렵 가보시기 바란다. 동쪽 산 너머 해가 솟을 때면 아래쪽 독립기념관부터 병천 아우내장터 뒤쪽까지 황금빛으로 출렁인다. 운무가 끼어 있으면 황홀할 정도다. 그 풍경을 잘 읽어야 한다. 고속도로에 트럭이 분주히 달리고 공장 굴뚝에 연기가 솟고 벌판 여기저기에 풍경을 해치는 아파트 단지가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를 읽어야 한다. 무명 선인들의 미소를 볼 수 있는 곳, 천안 여행이다. ㆍ천안 여행수첩
    볼거리 1.독립기념관 입장료 없음. 경부고속도로 목천IC에서 나와 직진. 입구에 셔틀버스가 있다. 철거된 중앙청 폐기물로 만든 공원도 가 본다. '일본을 홀대하는 방식으로 지하 5m를 파고' 만들었다는 공원 설계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볼 것. www.i815.or.kr 2.흑성산 독립기념관 입구 오른쪽 길로 가서 'KBS 중계소' 이정표를 따라갈 것. 길이 좋으면 정상까지 차가 가지만 눈밭인 요즘은 걸어갈 것.1시간. 3.유관순/순국자 추모각과 생가 내비게이션 키워드 동일.생가 옆에 있는 유관순 기념교회인 매봉교회도 꼭 가 본다. 지하 기념관에는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4.이동녕선생기념관과 생가 독립기념관 부근. 마당에 앉아 있는 선생 조각상이 쓸쓸하다. 5.홍대용선생 묘와 생가 수신면 장산리 462-22. 6.광덕사 호두 시배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400살 먹은 호두나무가 대웅전 앞에 있다. 광덕면 광덕리 641-7 〈맛집〉 1.아름다운 정원 화수목 이탈리아 요리. 스파게티 1만2000원부터. 정원이 근사하다. 목천읍 교천리 211-1, (041) 585-4201 2.병천순대거리 당면을 쓰지 않고 만든 순대. 돼지 소창을 써서 부드럽다. 국밥 7000원, 순대 한 접시 1만2000원 선. 초입 신은수병천순대집 추천. 병천면 병천리 289-13, (041)561-0151 숙박 및 여행 정보천안시청 관광 사이트 www.cheonan.go.kr/tour.do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 전문기자 sen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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