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진영에 깃든 선사의 삶과 사상

44 금파묘화(錦波竗華)

浮萍草 2016. 1. 30. 16:43
    태화산 빛! 마곡사 대공덕주
            覺一切種智 具三十二相 “일체종지를 깨달아 삼십이상을 갖추었고 濟寶筏 開塵障 보배의 뗏목으로 진장을 열어 건너니 咽琉舌瑚 髮金眉璜 목은 유리 같고 혀는 산호 같으며 금빛 머리에 눈썹은 신비롭다. 惟明鏡臺非盡 오직 명경대가 다하지 않았고 可彰遺法在空 뚜렷하게 남긴 법은 비어 있어 只見泰華長住光 다만 태화산에 오래도록 빛남을 보네.”
    곡사에 모셔진 금파묘화(錦波妙華, 1785~1794 활동) 선사 진영에 실린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의 영찬이다. 조윤형은 정조대에 호조참의,공조참판,지돈녕부사를 역임하였고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백하 윤순(1680~1741)의 사위이자 원교 이광사(1705~1777)에게 글씨를 배워 명필가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불교와도 인연이 깊어 ‘황악산 직지사(黃岳山 直指寺) 편액’(1770년),유점사 ‘풍악당대사비(楓嶽堂大師碑)’(1774년), 신흥사 ‘대원당대선사비(大圓堂大禪師碑) ’(1792년)의 글씨를 썼으며 마곡사 ‘심검당(尋劒堂)’편액 역시 조윤형의 글씨이다. 다만 금파스님의 진영에 적힌 영찬은 조윤형의 글일 뿐 친필은 아니다. 아마도 1861년에 마곡사에서 스님의 진영을 조성할 때 옮겨 적은 것으로 생각된다. 금파스님은 서산휴정의 9세손으로, 청암학종(靑巖學宗, ?~1780)에서 제봉체주(霽峰體珠, 1780~1788 활동)로 이어지는 법맥을 계승했다. 청암스님은 18세기 후반 이층전각인 대웅보전이 기울자 찬명(纘茗),체주(體珠) 등에게 전각을 중수토록 하여 1780년에 마무리했다. 청암스님에 이어 마곡사 불사에 앞장선 분은 제봉스님이다. 1782년에 대화재로 마곡사의 수 십여 칸의 전각이 소실되자 제봉스님은 도화사(都化士)로 나서 1785년에 대광명전을 중창하고 1797년에 심검당을 건립했다. 이처럼 18세기 후반 청암문중은 사찰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마곡사의 주요문중으로 의무를 다하였고 후손들 역시 그 역할을 이어갔다. 제봉스님 다음으로 문중을 이끈 분이 진영의 주인공인 금파스님이다. 현재 금파스님이 마곡사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후손들은 “대공덕주(大功德主)”로 기억하며 스님의 진영을 제작하여 존숭의 예를 다했다. 비록 기록이 전하지 않으나 금파스님 진영에 남겨진 영찬은 스승이 주관하는 불사를 돕기 위해 조윤형에게 심검당 편액 글씨를 부탁했을 스님의 모습과 출가자의 수행 본분에 매진해 그 명망(名望)이 사대부에게도 알려졌을 스님의 평소 삶을 떠오르게 한다.
    Vol 3173      
    해제ㆍ설명= 정안스님 불교문화재연구소장 / 이용윤 불교문화재연구소 불교미술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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