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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농암 이현보 (4)

浮萍草 2016. 1. 13. 11:58
    큰 벼슬을 마다하고 욕심 없는 삶을 살다
    농암 바위. /정지천
    을 자리에서 가까스로 풀려난 농암은 고향에 돌아와 세상 일에 귀먹은 체하고 지냈습니다. 농암(聾巖)은 고향 부내의 낙동강 가에 솟아있는 바위 이름인데, 동네 사람들이 ‘귀먹바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농자가 귀먹을 농이죠. 고향 마을의 바위 이름을 자호로 삼은 뜻은 뜬구름 같은 영화로부터 복잡한 중앙정계의 권력다툼으로부터 무관심하게 지내며 마치 귀먹은 듯이 살겠다는 다짐으로 보입니다. 유명한 분들의 호에는 바위 암(巖)자나 돌 석(石)자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위나 돌만 해도 꿈쩍하지 않고 있는데 귀먹은 바위라면 아예 세상과 등지고 살겠다는 것 같습니다. 농암이 스스로 호를 ‘농암’이라 지었던 것도 장수비결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욕심 없는 삶을 추구한 농암을 표현한 그림. /정지천
    ㆍ농암의 장수비결, 다섯째
    ‘욕심 없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농암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지만 결코 높은 벼슬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능력이나 주변의 인기를 감안하면 판서나 정승도 충분히 될 수 있었지만 관직 생활의 대부분을 지방관으로 전전했던 것이죠. 벼슬은 그저 어버이의 봉양 수단 정도로 삼았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벼슬살이를 대충 했던 것은 아니고,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청백리로 표창을 받았고, 그가 다른 고을로 임지로 옮길 때 백성들이 붙잡고 눈물을 흘리거나, 더 오래 있게 해 달라고 관찰사나 임금에게 직접 탄원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농암의 욕심 없는 삶의 면모는 76세에 관직에서 스스로 은퇴할 때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ㆍ농암의 은퇴 장면
    그 당시에 76세까지 근무했던 것도 대단한 일이고, 더 높은 벼슬을 할 수 있음에도 스스로 은퇴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낙향해서 강호에 묻혀 유유자적한 만년을 보낸 것도 농암의 욕심 없는 천성을 보여주는 사례죠. 농암은 70세가 넘어 부친이 돌아가시자 기회가 주어지면 관직을 사퇴하고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습니다. 마침내 76세가 되어서야 '귀거래(歸去來)'를 외치며 왕과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연히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에게 한양에서의 벼슬살이는 의미가 없었고 고향 분강촌에서 자연을 벗 삼는 즐거움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었죠. 그의 대표작인 <어부가>도 은퇴한 이후 고향에 은거하면서 지은 것입니다.
    한강변 제천정에서 벌어진 송별연에 조정의 고관대작들이 모조리 참석해서 송별시를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한강에서 배를 타고 고향으로 떠났는데 그 때 배 안에는 화분 몇 개와 바둑판 하나뿐이었다고 합니다. 낙향한 그에게 임금이 여러 차례 벼슬과 선물을 내리며 다시 올라올 것을 종용하였으나 벼슬을 매번 사양하였고 하사받은 책과 선물은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농암은 벼슬 욕심은 물론이고 재물에 대한 욕심도 없었던 겁니다.
    물레방아 /정지천
    ㆍ농암의 장수비결, 여섯째
    ‘시와 노래와 더불어 사는 삶’입니다. 농암이 어부가를 지은 시조작가였다는 것은 다들 아시죠. 강호에서 시와 더불어 사는 삶이 얼마나 여유롭고 평화로운지도 짐작이 갈 겁니다. 선비들이 시를 짓는 것은 자주 하는 것이지만 농암은 노래도 자주 불렀습니다. 어부가는 시이면서 노래 가사입니다. 사실 예전의 우리나라 대중가요 가사를 보면 그게 바로 시입니다. 그러니 작사가는 시인이죠. ‘물레방아 도는데’를 비롯한 3,500곡을 작사한 정두수 선생도 노래시집을 출간했지요. 농암은 고려 때부터 전래되던 ‘어부가’를 때때로 들으면서 회포를 풀곤 했는데 그것을 다듬어 장가(長歌)와 단가(短歌)로 개작하여 새로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어부가는 그 중에서 단가인 시조 형식으로 만든 5수의 작품을 일컫는 것입니다.
              정지천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 kyjjc193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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