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명인들 건강장수비결

91 농암 이현보 (3)

浮萍草 2015. 12. 16. 19:30
    한직이었던 지방근무가 오히려 장수의 요인
    암은 연산군 시절인 38세 때 갑자사화(甲子士禍)를 당하여 서연관(書筵官)의 비행을 상계(上啓)했다가 의금부(義禁府)에 갇혀 국문을 당하였고 안동의 안기역
    (安奇驛)에 유배되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 다시 의금부로 이송되어 장형(杖刑)을 당하고 70여 일을 옥에 갇혀 지내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 살벌했던 연산군 때의 사화에서 국문을 당하고 장형을 맞았지만 워낙 건강한 몸이었기에 회복되었고, 2년 뒤에 중종반정으로 관직에 복귀했던 것이죠.
    
    ㆍ고문과 장형의 후유증이 크지 않았나?
    국문을 당하면 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모진 고문에다 곤장을 맞게 됩니다. 곤장을 심하게 맞으면 상처에 독이 생기는데, 장독(杖毒)이라고 합니다. 매 맞아 생긴 ‘골병’이죠. 많이 맞았으니 엉덩이 주변엔 불이 나고, 열독도 오르고,살점도 뜯겨나가 헐고 곪게 됩니다. 곤장을 맞던 중 현장에서 사망하는 경우도 더러 있는데 대부분 쇼크사에 가깝습니다. 물론 50대 이상 맞으면 그것만으로 죽을 수도 있는데, 맞은 부위에 피가 집중적으로 몰리면서 정작 심장에는 혈액이 부족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곤장을 맞은 후 옥이나 유배 중,또는 집으로 돌아간 후 사망한 경우가 많은데,'장독‘이 올라 죽었다'고 합니다. 곤장을 맞은 후 터진 상처부위의 2차 감염 때문인데, 괄약근에 힘이 풀려 대소변이 새어나와 상처로 들어가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항생제가 없었으니 세균의 감염이 빠르게 이루어졌던 것이죠. 을사사화 때 귀양 가는 도중에 사망한 퇴계 선생의 형을 비롯하여 곤장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장형집행 전경 그림. /정지천
    ㆍ 농암의 장수비결, 넷째
    농암은 32세부터 76세까지 무려 44년이나 벼슬살이를 했는데,주로 외직 근무를 했습니다. 외직이란 군수,목사,관찰사 등의 지방관직을 일컫는 것으로 중앙관직인 내직에 상대되는 의미이죠. 중앙관료가 아닌 지방관으로 근무한 것도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었던 네 번째 비결이 되었습니다. 한양 근무가 아닌 지방 근무가 건강 장수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농암이 관직생활을 했던 시기는 연산군에서 중종 때인데, 3차례의 사화(士禍)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이처럼 중앙 정계를 오래 떠나 있었다는 것은 권력 투쟁의 암투와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훈구파와 외척들이 권력을 잡고 유지하기 위해 각종 음모를 꾸며 사림파 관리들을 모함하고 탄압하던 혼란기였기에 지방 근무는 정쟁에 휩쓸리지 않게 되지요. 특히 농암의 성품으로 보면 그 시기에 중앙정계에 있었을 경우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정지천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 kyjjc193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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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을 위기에서 연산군의 실수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다
    
    ㆍ농암은 스스로 지방근무를 원했던 것인가?
    나 지금이나 관리라면 누구나 지방을 옮겨 다니며 근무하는 것보다 중앙 근무를 선호할 것인데 농암은 스스로 외직 근무를 선호해서 30년을 지방으로 
    떠돌아다녔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부모가 연로해서 가까이 모시고자 함이었습니다. 
    농암은 4남 1녀 중 장남이었고 효심이 지극했었죠. 또 하나는 갑자사화 때 국문을 당하고 곤장을 맞고 유배를 당하는 고초를 겪었기에 조광조 등의 급진 사림파가 
    등장한 이후에는 외직근무를 선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천군수,밀양부사,충주목사,안동부사,성주부사 등을 거쳤고,늙어서도 대구부사,평해군수,영천군수,경주부윤,경상도 관찰사 등 주로 고향과 가까운 외직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농암의 관직 생활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농암 종택. /조선일보 DB
    ㆍ죽을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농암
    농암은 갑자사화 때 서연관의 비행을 논박하다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되었었는데,또 무고를 당하여 다시 의금부로 이송되어 70여 일을 옥에 갇혀 죽음을 당할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연산군이 석방자를 가려내는 과정에서 농암의 바로 위에 적힌 자를 지목한다는 것이 잘못되어 기적적으로 방명(放命)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연산군은 농암의 이름은 잊어버리고 ‘얼굴 검붉고 수염 긴 놈’으로밖에 기억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명을 내리는 붓에서 떨어진 먹물이 실수로 농암의 이름 위에 떨어졌던 것이죠. 형벌을 행하는 관리는 농암의 이름 위에 떨어진 낙묵(落墨)을 보고 그를 풀어주었던 겁니다. 죽을 고비에서 운 좋게 살아난 경우 오래 산다는 말처럼 농암은 장수했는데, 농암이란 호도 이 사건으로 인해 지었다고 합니다.
           정지천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 kyjjc193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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