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땅의 歷史

인천 을왕리~고양 식사동 '王의 길'과 한옥마을 짓는 이양규

浮萍草 2015. 12. 23. 10:23
    어린 왕이 살던 을왕리가 落照에 물든다
    고려 창왕 유배된 용유도 해변에는 낭만 찾는 나들이객들이 북적인다 거잠포 선착장에는 '해가 서해에서 뜨는' 신기한 풍경이 보인다 고속도로 타고 뭍으로 가면 고려 마지막 공양왕이 묻힌 고양 식사동… 제주도 출신 네 가족은 왕릉 옆에 거대한 한옥 마을 짓는 중 을 퍼진 해무(海霧) 속, 연인들이 부둥켜안고 선 을왕리에는 왕이 살았다. 왕이 낳은 아들이 그 땅에 묻혔다고 했다. 그래서 이름이 을왕리(乙旺里)라고 했다. 지금 이름은 인천광역시 중구 을왕동이고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에 있다. 숱한 전설과 유래가 을왕리 지명 하나에 얽혀 있지만 왕자가 묻힌 해변 이야기를 들으면 서글프다. 행복하게 왕 노릇하다 죽지 않고 졸개들에게 타살된 왕이었으니까. 왕 이름은 고려 희종이라고도 했고 창왕이라고도 했다. 을왕리에 겨울이 오고 바야흐로 그 바다 위로 한 해가 스쳐 간다. 낭만을 찾아 바다를 건넌 연인들에게 왕 이름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겨울밤 을왕리에서 낭만을 만나고, 왕이 던진 서글픔을 만난 다음 뭍으로 건너간다. 거기에 또 다른 왕이 묻혀 있다. 이름은 공양왕이다. 을왕리에 살았던 왕이 창왕이라면, 공양왕은 창왕을 이은 고려 마지막 왕이다. 공양왕이 묻힌 견달산 옆에, 올해 쉰아홉 살 먹은 사내 이양규는 집을 짓는다. 자그마치 한옥 일흔두 채다. ㆍ왕이 살았느니라… 을왕리
    인천국제공항이 생기면서 을왕리가 있는 용유도는 영종도에 연륙했다. 이름만 섬이다. 배 타고 건넜던 용유도 해변들은 이제 대표적인 수도권 주말 여행지로 바뀌었다. 공항고속도로로 한 시간이면 서울에서 닿는 바닷가다. 공항철도를 타면 길도 막히지 않는다. 서울에서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섬. 주말 나들이 목적지가 가져야 할 이 필수 요소들이 역사 속에서는 패배자들 유형지로 필수 요소이기도 했다. 섬이라 빠져나오기도 힘든 데다가, 권력자는 요시찰인물을 가까이 두고 감시하다가 여차하면 죽여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용유도 북쪽 강화도는 그래서 권력을 차지한 자들에게 인기였다. 고려 때는 강종,희종,우왕,창왕,조선 때는 수양대군한테 반기를 든 안평대군,패륜 군주 연산군,광해군 시절 임해군과 영창대군과 능창대군,그리고 인조반정 때 쫓겨난 광해군 본인 기타 등등 모두 강화도와 교동도를 거쳤고 몇몇은 용유도 을왕리에 등을 기댔다가 죽었다. 가끔은 땅도 변한다. 을왕리에는 을왕산('한때' 118m)과 왕산('한때' 81m)과 오성산('한때' 171m)이 있다. 이 산들은 인천국제공항이 생기면서 모두 깎였다. 착륙하는 비행기를 방해하지 않는 높이로 절토해야 하는 게 첫째요, 그 절토한 흙을 공사용으로 사용하려는 게 둘째 목적이었다. 산 형체도 사라졌다. '오성산 맑은 정기 이어받은'용유중학교와'오성산 줄기 끝 푸른 숲 속'에 있는 용유초등학교는 한때 교가 개사(改詞) 움직임까지 벌일 정도로 큰 혼란을 겪었다. 사라진 을왕산과 왕산에는 왕이 숨어 있다. 왕산리에 있는 왕산 통개계곡 상류에는 무덤 터가 있다. 여섯 평 정도 되는 땅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봉분을 만들 석재가 흩어져 있다. 사람들은 왕자 묘라 부른다. 고려 21대 왕 희종은 무신정권 권력자 최충헌 제거 계획을 세웠다. 거사(擧事)는 실패했다. 최충헌은 희종을 강화도로 유배했다. 희종은 강화에서 용유도, 교동도로 떠돌다 개경으로 돌아갔지만 다시 교동도로 유배돼 교동도에서 사약 먹고 죽었다. 용유도 전설에 따르면 개경에서 쫓겨난 왕은 교동도가 아니라 용유도에서 죽었고,무덤은 교동도에 있다. 용유도에서 남긴 아들의 무덤이 이곳 통개계곡에 있는 왕자 묘라는 것이다.
    을왕리 해변에 낙조가 깔렸다.연인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을 서로 껴안고 서 있었다.을왕리에는 고려 왕조 역대 왕들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며칠 남지
    않은 2015년이 바다 위로 스친다. /박종인 기자
    또 다른 전설은 왕자 묘가 다름 아닌 고려 마지막에서 둘째 왕인 창왕 묘라는 것이다. 고려 말, 새 왕조를 설계하던 이성계 집단은 1388년 우왕을 폐위시키고 아들 창(昌)을 왕으로 내세웠다. 창은 여덟 살이었다. 왕좌에 앉고서 1년 만에 창왕은 유배되고 유배지에서 살해된다. "왕씨가 아니라 괴승 신돈의 아들이니 고려 사직을 더럽힌 죄"를 씌웠다. 창왕의 아버지 우왕도 같은 명분으로 죽었다. 이성계 집단은 가짜 왕씨라는 이유로 시호도 주지 않고 이름 그대로 우왕, 창왕이라 불렀다. 전설 속에서, 아홉 살짜리 창왕이 끌려와 죽은 곳이 이 을왕리 왕산이다. 어린 창왕은 틀림없이 바다를 보았을 터이다. 을왕리 해변에 지는 붉은 일몰은 명품이다. 어린 왕에게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흉조였을 터이고 세월이 흘러 사람들은 주말이면 을왕리에 가서 낭만을 즐긴다. 연인은 연인대로 가족은 가족대로 친구는 친구대로 물 빠진 해변에서 낙조(落照)를 기다리며 겨울을 즐긴다. 을왕리 옆에는 수평선에 해가 뜨는 해변이 있다. 거잠포 해변이다. 해가 솟으면 동쪽 시화호와 송도가 햇빛에 가려 수평선에 해가 솟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서해에서 해가 뜰 일을 겪어보려면 반드시 가볼 곳이다. ㆍ집이 섰느니라… 정와 한옥마을
    사리현동 야산에 한옥마을을 짓는 사내
    이양규.“창피하니 사진은 찍지 마시라”고 했다.
    왕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을왕리를 떠난다. 낙조가 어둠으로 바뀔 무렵, 유배된 왕들이 소름 끼치도록 그리워했던 뭍으로 간다. 야경이 아름다운 영종대교를 건너면 서쪽으로 대도시 서울과 고양시 야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고양시 사리현동 공장 지대 한가운데에 또 야경이 훌륭한 이색 공간이 있다. 이름은 정와 한옥마을이고 마을을 만들고 있는 사람 이름은 이양규다. 제주도에는 은퇴한 해녀 현금란이 산다. 올해 여든세 살이다. 현명하고 착하고 성실한 해녀 현금란은 물질로 번 돈을 차곡차곡 모았다. 마흔셋에 남편이 하늘로 떠났지만 여섯 남매 시집·장가 보내면서 큰돈을 모았다. 사위는 한씨, 이씨, 현씨를 맞았고 본가집 송씨네 사위 셋은 의좋게 돈을 벌었다. 큰돈을 벌었다. 땅도 사고 집도 사고 저축도 했다. 그러다 IMF를 맞았는데 "길거리에 떠도는 '사오정'들이 그렇게 딱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둘째 사위 이양규가 말했다. "허탈하더라. 어떻게 살아온 인생들인데 남긴 것도 없고…." 이양규는 서울 신촌에 모슬포라는 횟집 겸 찜질방을 열었다. 역시 큰돈을 벌었다. 가족회의에서 결론이 나왔다. "재물 복 많으면 무엇하누. 우리, 번 돈으로 흔적을 남기자." 흔적 남기기는 한옥마을 건설로 정했다. 이양규가 말했다. "전국에 한옥마을 많지만 서울 사람 가기 좀 어려운가. 여기 공장 지대 빈 땅에 제대로 된 한옥마을 짓자고 했다." 1999년이었다. 이름은 정와 한옥마을로 정했다. 회사를 설립하고 강원도 삼척에서 사온 춘양목을 사리현동 산기슭에 쌓아 놓고 작업을 시작했다. 60년부터 300년까지 산 나무들이 해를 두고 건조됐다. 산기슭에 제재소를 짓고 건조한 나무들 깎아 집을 지었다. 전국을 돌며 답사한 고택(古宅) 가운데 맘에 드는 집들을 골라 설계도를 그렸다.
    집 설계 한번 본 적 없는 네 가족인지라 애를 먹었지만 전문가로 진화해갔다. 하도 애를 먹어서, "남들 애먹지 않도록 완성된 설계도는 나중에 인터넷에 다 공개하겠다"고 했다. 수입 목재 쓰고 공장 기와 쓰면 빨리 진척될 일을 굳이 춘양목 쓰고 수공 기와 쓴다고 고집부리다가 세월이 갔다. 언덕배기에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한 채,두 채 솟아올랐다. 사람 손이 더 필요해지면서 대학교 다니는 조카들도 모조리 휴학하고 마을로 들어왔다.
    제주도 출신 가족들이 만들고 있는 정와 한옥마을 등불축제.

    마을 넓이는 4만5000평이요 예정 공사액은 1000억원이다. 네 가족이 만들기에는 비현실적인 숫자들이다. 어린 조카들까지 끌어들여 이 일을 벌이는 가족들을 사람들은 정신병자라고 했다. 이양규가 말했다. "재물 복이 있어서 큰돈을 벌었다. 제대로 써야지 돈이지 우리 좋다고 막 쓰면 그게 돈인가. 맞다, 정신병자." 완공은 1년이 아직 남았는데 한옥마을은 올해 개장을 했다. 또 이양규가 말했다. "완성된 한옥만 한옥이 아니다. 한옥 만드는 과정까지 봐야 체험이다." 제재소 앞에도 미완의 건물들 앞에도 안내판이 붙어 있다. 미완이기에, 한옥마을은 밤에 가야 한다. 을왕리 낙조의 여운을 안고 가야 한다. 해거름이면 골목길과 돌담길과 집집 곳곳에 등불이 켜지고 정원에 조명이 켜진다. 큰 부잣집에 초대를 받아 산책하는 느낌이 든다. 어둠을 뚫고서 그리 아름답지 않은 공장 지대 좁은 길을 헤매고 들어간 보람도 켜진다. ' 정신병자 가족 대표' 이양규는 "내년에 정식 개장하면 찍으라"며 사진 촬영을 거부했다. ㆍ왕이 묻혔느니라, 식사동 공양왕릉
    한옥마을이 있는 사리현동 옆 동네 이름은 식사동(食寺洞)이다. 밥 먹는 절이라니. 고려 최후의 왕 공양왕릉이 여기 있다. "괴승의 자식 우와 창에게 빼앗겼던 고려 왕실을 잇는다"며 이성계 집단에 의해 강제로 왕위에 오른 공양왕은 죽을 때까지 불안에 떨었다.
    식사동 공양왕릉을 지키는 돌강아지

    "신묘일에 왕이 왕위를 양보하고 원주(原州)로 갔다. 그 후 3년째인 갑술년(1394)에 삼척부에서 훙(薨)하였다. 뒤에 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되었다." (동국통감 고려 공양왕 4년) '훙(薨)'은 죽었다는 뜻이다. 이리저리 유배당하던 공양왕은 이성계가 보낸 사람 손에 삼척에서 죽었다. 왕위를 양보했다(恭讓)고 시호도 공양왕이다. 전설에는 이성계에 쫓겨 고양까지 온 공양왕 가족에게 이곳에 있던 절 스님이 밥을 줬다고 했다. 그래서 식사동이다. 얼마 뒤 삽살개 하나가 짖기에 보니 언덕 아래 연못에 왕 부부가 빠져 죽어 있더라고 했다. 삽살개도 뛰어들어 죽었다고 했다. 그 위에 묘를 쓰고 부부를 모셨는데 그게 공양왕릉이라고 했다. 옛 묘 앞에 흔한 돌호랑이 대신에 왕릉 앞에는 삽살개를 닮은 석구(石狗)가 고개를 떨구고 있다. 여기까지다. 을왕리 겨울 바다에서 가져온 왕에 대한 추억은. ㆍ王의 길' 여행수첩
    (王의 길 코스〉1.을왕리 해변 : 대략 오후 5시쯤 해거름이 시작된다. 6시면 하늘에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상가 지구에 횟집, 노래방, 카페가 부지기수다. 2.거잠포 선착장 : 일몰은 물론, 이른 아침 일출 때 가면 해가 서쪽에서 뜨는 구경을 할 수 있다. 3.공양왕릉 : 고양시 식사동 야산에 있다. 내비게이션에 의지하지 않으면 길 찾기가 쉽지 않다. 왕릉 앞에 주차 공간 있다. 봉분 앞에 앉아 있는 작은 돌 강아지를 눈여겨볼 것. 왕릉 뒤편으로 공양왕 외가 자손의 가족묘가 있다. 4.정와 한옥마을 : 2016년 2월 19일까지 야간 등불 축제가 열린다. 조금 어수선한 낮보다는 야간 추천. 야간 개장은 오후 4~10시. 주간은 오전 10시 개장. 주간 6000원, 야간 7000원(주말 9000원). 고양 시민 6000원, 장애인 4000원. 고양시 일산동구 사리현동 395-9, www.jeongwa.co.kr, (031)969-1407 〈맛집〉 1.거잠포 어부네 : 1인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양의 해물칼국수 적극 추천.1만원. 가리비 회가 덤으로 나온다. 바지락칼국수는 7000원. (032)751-1192 2.정와 한옥마을 식당 : 돼지 바비큐(3만7000원), 파전 등. 바비큐는 제주도산 돼지고기. <신년 거잠포 해맞이 열차> 2016년 1월 1일 공항철도를 타면 서해 일출을 보는 거잠포까지 셔틀버스로 갈 수 있다. 인천공항역에서 셔틀버스가 거잠포 입구 용유 임시역까지 오간다. 1월 1일 오전 5시 20분과 40분 서울역 출발.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 전문기자 sen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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