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땅의 歷史

황산벌 연산과 3대 대장장이 류성배

浮萍草 2015. 11. 25. 10:06
    아주 오래된 마을 연산에는 젊은 대장장이가 살더라
    1924년 황해도에서 내려온 할아버지가 문 연 대장간 아버지 이어 삼형제가 3대째 쇠 두드리는 곳 명재 고택에는 초야에 묻혀 제자 길러낸 선비 기개 관촉사에는 천년 세월 견뎌낸 거대한 미륵불이
    3대 대장장이 류성배. 아버지 류오랑이 쓰던 작은
    의자에 앉았다.
    해 마흔다섯 살 먹은 류성배는 대장장이다.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시장이 일터다. 이름은 연산대장간이다. 류성배는 이 대장간 3대 대장장이다. 두 형 성일과 성필도 함께 일한다. 2대 장인인 아버지 류오랑은 작년 7월 하늘로 갔다. 일흔세 살이었다. 아홉 살 때 처음 망치를 쥔 류오랑은 인근 신도안에서 망치를 두드리던 아버지 류영찬에게서 대장간을 물려받았다. 지금은 성일(49), 성필(47), 성배(45) 세 아들이 대장간을 이어받아 벌건 쇠를 두드린다. 그사이 대장간은 신도안에서 연산시장으로 옮겼다. 대장간 이름은 문화철공소에서 연산대장간으로 바꿨다. 세 아들 엄마 이현숙은 말한다. "자식새끼들은 이런 일 안 시키려 했는데 어찌 된 것이…." 백 년 넘은 대장장이 집안이 사는 오래된 도시, 연산 이야기다. ㆍ1355년 전 황산벌, 연산
    서기 660년 7월 9일 아침 백제 장군 계백은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고 집에 불을 붙였다. "적국의 노비로 욕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고 했다. 계백은 군사를 이끌고 대전 동쪽 탄현을 넘어온 신라군과 맞붙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5만 대군이요, 계백 부대는 5천이었다. 네 번 맞붙어 네 번 이겼다. 신라 장군 김품일의 열다섯 먹은 아들,화랑 관창이 단신으로 공격해오자 계백은 "어리지만 용맹하니 가상하다"며 생포한 그를 돌려보냈다. 이에 관창이 우물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돌진해오니,계백은 관창 목을 베어 안장에 묶어 보냈다. 그 순간 백제 망국(亡國)은 결정됐다. 비분강개한 5만 신라군은 결사 항전하는 5천 백제군을 전멸시켰다. 나라는 사라졌고 세월은 갔다. 황산벌 일대는 논산 연산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연산면을 관통하는 큰길 이름은 황산벌로다. 대한민국 시대가 도래한 지금 전투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부적면에는 계백 묘로 추정되는 조촐한 무덤이 있다. 연산은 그리 오래된 도시였다.
    백제의 추억에 관한 한, 논산은 옛 왕도인 부여와 공주에 가려 있다. 남자들에게는 그저 논산훈련소 정도나 기억하는 혹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연산에는 참 많은 오래된 이야기가 숨어 있다. ㆍ문화 류씨 대장간 3대
    1대 대장장이 류영찬은 황해도 구월산 사람이었다. 1889년생이다. 구월산 아래에서 대장간을 하던 상제교(上帝敎) 신도였다. 상제교는 천도교를 창시한 해월 최시형의 제자 김연국이 만든 종교다. 서른다섯 살 되던 1924년 상제교 본부가 충청도 계룡산 아래 신도안으로 옮기자 류영찬은 어머니를 모시고 신도안으로 내려왔다. 신도안에서도 대장간을 했다. 해방이 되고 전쟁이 터지자 피란민들이 대거 신도안으로 몰려왔다.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반공 포로도 신도안으로 쏟아졌다. 류영찬은 이들을 거둬 일감을 주고 밥을 먹이고 재웠다. 1968년 12월 류영찬이 하늘로 갔다. 다섯째 아들 오랑이 대장간을 물려받았다.
    충남 논산 연산시장 대장간에서 젊은 대장장이 류성배가 쇠를 두드린다. 오른쪽에 있는 작은 의자는 하늘로 간 아버지 류오랑이 쓰던 의자다.
    황해도 구월산에서 시작한 가업이 100년을 넘겼다. /박종인 기자

    충청도 전역에 서는 오일장을 돌아다니며 농기구를 팔았다. 제일 장터가 컸던 연산장터에 대장간도 하나 더 냈다. 경기도 안양에서 신도안으로 피란 왔던 다섯 살 아래 처녀 이현숙과 결혼도 했다. 비루한 대장장이라 처가에서 반대했지만,"못 벌어서 상놈이지 고려 개국공신 류차달(柳車達)의 후손 문화 류씨 양반집"이라고 설득했다. 이현숙은 두고두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대장간은 자식새끼들은 절대 못 시킬 짓"이라고. 그런데 그 말을 귀에 박히도록 들으며 자란 아이들이 저마다 대처(大處)로 나가서 사업을 하다가 나이 마흔 넘으며 대장간으로 돌아오는 게 아닌가. 그것도 적적하기 짝이 없는 옛 도시 연산으로. 1983년 신도안에 계룡시가 생기면서 신도안 대장간은 문을 닫았다. 막내아들 성배가 말했다. "어머니가 늘 대장간은 안 된다고 해서 진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재미있고 보람이 있다." 아버지 류오랑은 아이들에게 일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시간이 걸려도 똑바로 만들라." 그게 전부였다. 류오랑은 추석날 하루, 설날 하루 이렇게 딱 이틀 놀았다. 2011년 문득 장남 성일이 사업을 접고 연산으로 들어왔다. 둘째에 이어 막내 성배도 지난해 들어왔다. "일하는 만큼 보상이 있고, 재미가 있고, 무엇보다 아버지 떠나시고 집안 일이 끝난다는 아쉬움이 컸다"고 했다. 보상도 재미도 가업 계승도 좋지만 몸은 고단하다. 류성배는 "왜 아버지가 저녁 여덟 시만 되면 곯아떨어지셨는지 알게 되었다"고 했다.
    대를 이어온 가업인지라, 만드는 건 쉬웠다. 파는 게 어려웠다. 3.5t 트럭 스프링강을 불에 달구고 메질하길 열다섯 번 반복하면 호미 하나가 나온다. 가격은 8000원이다. 중국산 호미는 2000원이다. 돌밭 한번 매면 중국산 호미는 이가 나가고 구부러진다. 순박한 농부들은 싼 호미 많이 샀다고 좋아하지 비싸고 좋은 호미 샀다고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산도 진열해 팔고 있지만 써본 사람들은 굳이 대장간 물건을 다시 찾았다. 소문이 나고 3대 가업 이야기가 섞이면서 연산대장간 형제들은 연산 역사(歷史)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 했다. 대장간 안에는 쇠로 만든 세상이 펼쳐져 있다. 굳은 땅 파내는 벽채호미,무른 흙 파내는 호미,긴낫,풀낫,조선낫,육철조선낫,약초괭이,삼각괭이,두발괭이, 쇠스랑,화덕,식도,가마솥에 정글칼까지.팔도마다 다른 토양과 석질(石質)에 따라 괭이,호미,낫 형태도 다르니 만물상은 더욱 세밀해진다. 바닥에는 쇳덩이들이 널려 있고 그 뒤로 쇠 달구는 가마가 있고 담금질하는 물통과 기름통이 있으며 기초 메질을 하는 프레스가 있고 쇠를 두드리는 모루가 있다. 쇳덩이가 저 둔탁한 도구들과 대장장이들 손을 거치면 이름 외우기도 힘든 물건들로 둔갑한다. 쇳덩이 어지러운 바닥에는 스펀지를 여러 겹 감은 유치원용 의자 하나가 앉아 있다.
    아버지 류오랑이 쓰던 의자다. 류오랑은 그 의자에 앉아 쇳덩이를 옮기고 다듬고 깎았다. 이제 아들들은 벽에 걸린 아버지 연장들을 꺼내 그 의자에 앉아 작업을 한다. 연산시장 청과상 옆 골목에 있는 대장간은 명물이다. 대장간 물건 손잡이와 쇠뭉치 부위에는 하나같이 '연산대장간' 혹은 '류류'라 새겨져 있다. 류씨 집안이 대를 이어 만들었으니 '류류'요,이름을 내걸고 만들기로 작정했으니'연산대장간' 다섯 자를 불로 지져 손잡이에 새겨 놓았다. 후계자 없어서 문 닫은 대장간이 널렸는데,연산대장간에는 젊은 40대 후계자가 셋이나 있으니 이 또한 호기심 많은 관광객 발길을 끌어들인다. 오래된 도시 연산, 그 오래된 장터에서 쇠를 달구는 젊은 대장장이 류성배가 말했다. "20대, 30대였으면 꿈도 안 꿨을 텐데 나이가 들고 보니 사명감이 생기더라"고. ㆍ연산, 그 오래된 흔적들
    백 년 대장간에서 5분 거리에 호남선 연산역이 있다. 역사 바깥쪽 오른편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급수탑이 있다. 증기기관차 시절 증기기관에 물을 공급하던 탑인데 1911년 건축 됐다. 전국에 남아 있는 급수탑 가운데 가장 나이를 많이 먹었으니 연산이 가진 또 다른 오랜 흔적이다. 연산역에는 아이들 문화 체험 공간이 꾸며져 있다.
    관촉사 은진미륵과 석등·석탑

    대장간에서 1번 국도로 계룡시 쪽으로 가다 보면 화악리가 나온다. 화악리에는 6대째 천연기념물 265호 오계(烏鷄)를 키우는 지산농원이 있다. 오계는 깃털, 벼슬, 뼈까지 청동빛 감도는 검은색인 닭이다. 흔히 알고 있는 깃털 하얀 오골계와는 전혀 다른 닭이다. 조선 후기 임금들이 연산에서 진상한 오계를 먹고 쾌차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철종에게 오계를 진상한 이는 이형흠이고 지금 농원 주인은 이형흠의 후손 이승숙이다. 조류인플루엔자가 이 땅을 휩쓴 2006년 2008년과 2011년 2012년, 지산농원은 경기도 동두천과 경북 봉화와 상주, 인천 무의도로 오계를 집단 피신시킨 적도 있었다. 달걀이 어른이 되는 데 3년 걸린다. 농원은 이 가운데 도태된 닭들을 탕으로 만드는 식당도 차렸다. 농원 견학도 가능하다. 숨 콱콱 막히는 여느 양계장과 달리 너른 방사장을 날아다니는 닭들을 보면 기분이 좋다. 북쪽 노성면으로 가면 명재 고택이 있고 서쪽 관촉동으로 가면 은진미륵이 있는 관촉사가 나온다. 명재 윤증(1629~ 1714)은 조정에서 18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온갖 핑계로 고사하고 제자를 길렀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사는 스승을 보다 못해 제자들이 집을 마련해줬다. 그 집이 명재 고택이다. 서기 1006년 세운 관촉사 미륵불은 키가 18m로 이 땅에서 제일 큰 석불이다. 교과서는 '비례미가 맞지 않는 석불'이라 묘사하지만, 직접 대면하면 그 웅장함과 고졸함에 입을 다문다. 이리하여 우리는 1300년 전 전쟁터 연산 황산벌에서 3대 100년 대장장이를 만났고 150년을 견뎌온 검은 닭 무리를 목격했고 300년 고택에 틈입했으며 1000년이 넘은 미륵 부처를 만났다. 대장장이네 메질이 이어지듯, 이 땅에 새겨진 흔적도 질기고 오래되었다. ㆍ[연산 여행수첩]
    〈볼거리〉 1.연산대장간 작업 중에는 전화 불통. 전화로도 물건을 주문할 수 있다. 방문하면 대장 작업과 물건을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모바일 홈페이지 okqr.kr/8741, (041)733-5231. 황산벌로 1541-2 2.지산농원 미리 연락하면 농원을 견학할 수 있다. www.ogolgye.com, (041)735-0707, 연산면 화악길 70. 홈페이지에서 초란, 오계약닭세트 구입 가능 . 3.명재고택 안채와 사랑채, 별채, 초가 고택 체험 가능(8만~40만원). 전통 혼례식 대관도 한다. 문화해설사도 있다. www.myeongjae.com, (041) 735-1215 4.관촉사와 연산역: 내비게이션으로 검색 가능. 관촉사는 주차장에서 한참 걸어올라가야 한다. 〈맛집〉 1.계모의 행복한 밥상 지산농원에서 운영하는 약닭식당. 천연기념물 외형 기준에서 미달돼 도태된 오계〈사진〉로 약선요리를 낸다. 2년산 4만5000원. 2인분 이상. 요리에 1시간 30분 걸리니 예약 필요. 약을 먹는 느낌. 개량종 1년산 황기보탕은 1인분 2만원. 1인분 가능. (041) 735-0707. 농원에 붙어 있다. 2.연산시장 묵집과 순대집 논산시 관광정보 tour.nonsan.go.kr, 대표전화 (041)746-5114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 전문기자 sen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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