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땅의 歷史

겨울 가평과 흑자(黑磁) 장인 김시영 부녀

浮萍草 2016. 1. 6. 10:15
    강변에는 파리한 裸木이… 도공 작업실엔 뜨거운 가마불이…
    름을 하다가 잃은 사람에게 "옜다, 
    먹고 떨어져라" 하고 던져주는 돈을 '개평'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개평이 경기도 가평에서 온 말이라고 우스개를 던진다. 
    가평이 하도 먹을 게 없어서 떡 하나를 만들어도 맛이 없었으니 떡 사러 온 사람이 맛없다 하기도 전에 장사치가 미리 알아서 몇 개 더 얹어주던 관행이 있었다는 것
    이다. 
    그래서 가평, 가평 하다가 개평으로 변했다는 이야기. 
    뒤집으면, 가평은 가난은 해도 모질지는 못해서 이방인에게 인심을 베푸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말이다. 
    1000년 전 망해가던 나라 고려 공민왕은 그 가평 땅에 잠시 몸을 의지했다. 
    명필 한석봉이 가평군수로 재직할 때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또 가평 땅을 찾아와 학문과 예술을 꽃피웠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예술이 있고 학문과 철학이 있고 여행이 있다. 
    검은 도자기를 만드는 21세기 도공(陶工) 김시영과 두 딸 자인, 경인은 가평 사람이다.
    가평으로 가는 북한강변 풍경. 채 녹지 않은 강 위로 잔설이 깔렸고 옷벗은 나무들에는 상고대가 하얗게 피었다. 1000년전 공민왕이 피란을 떠났던 고장이요,
    지금은 많은 예술가들이 이 강변에 둥지를 틀고 있다. /박종인 기자

     공민왕이 홍건적 피해  피란 가다 머문 땅 가평  지금은 잣나무 숲과  강변 찾아 사람들 오는 곳
    ㆍ공민왕과 홍건적과 가평
    우왕, 창왕과 공양왕에 앞서 고려 왕위에 올랐던 공민왕(1330-1374)은 예술가였다. 예술을 추구했다는 뜻이 아니라 정치에 뜻이 없었다는 말이다. 망해가는 원나라에 대항해 요동 정벌도 하고 초기에는 내치(內治)에도 충실했지만 원나라에서 장가들었던 노국공주가 1365년 아이를 낳다가 죽은 다음에는 반 폐인으로 살았다. 개혁 국사(國事)는 승려 신돈에게 맡기고 자신은 자기가 그린 공주 영정을 안치할 궁궐 신축공사에 몰두했다. 공사장 주변에 "쓰러져 죽은 소가 길가에 널려 있을" 정도로 인력과 비용을 써댔다.
    노국공주가 죽기 4년 전 홍건적이 개경까지 쳐들어오자 젊은 시절 패기는 다 잃고 남쪽 안동까지 달아나고 말았다. 개경을 떠나 남하하던 왕은 미원(迷源) 땅에 이르러 궁궐을 지었다. 궁궐 근처 산에 올라 개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곤 했다. 궁궐이 있는 곳은 왕터산이고 그 아래 고개는 도성재이며 왕이 올랐던 산은 국망봉이다. 궁궐을 지었다는 미원이 지금 경기도 가평이다. 국망봉은 수도권 산꾼들 단골 산행지로 변했다. 어가 행렬이 지나갔던 북한강변은 식당과 카페가 즐비하다. 1000년 전 피란길 강변은 청평댐으로 호수가 됐고 떠나가는 길이 아니라 찾아가는 관광지로 변했다. 세월은 무상하다. ㆍ검은 도자기를 만드는 김시영
    흑유(黑釉) 또는 흑자(黑磁)는 한·중·일 3국에서 널리 만들던 검은 도자기다. 청자가 우아하고 백자가 질박하다면 흑유는 우아함과 질박함이 공존하는 화려한 그릇이다. 철분이 든 유약을 발라 굽는 방식에 따라 광채가 나기도 하고 빨아들일 듯 칠흑 같은 어두운 검은색이 나오기도 한다. 가마 속에서 불길이 닿는 시간에 따라 기기묘묘한 무늬가 나오기도 한다. 이를 요변(窯變)이라고 한다. 김시영(58)은 그 흑유를 만든다. 가평읍내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서울로 유학 간 김시영은 하숙집에서 예술을 접했다. 하숙집 주인 두남 이원영은 서예가였다. 재일교포였던 두남은 아이에게 한국이 잊고 있던 흑유를 알려주며"크면 꼭 흑유를 만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당부했다. 일본 다녀올 때면 아이에게 줄 장비와 재료를 한 보따리씩 사왔다.
    작업실에 앉은 가평요 도공 가족. 아내 최병랑, 1대 도공 김시영, 2대 도공 김경인과 김자인(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예술에 눈뜬 공학도 김시영,  고향에서 도자기 굽고  두 딸은 아버지 따라  대 이어 도공의 길 걷는다
    용산공고 금속과와 연세대 금속공학과에서 불과 철을 배웠다. 77학번이다. 집안이 워낙 힘이 장사여서,잠시 모스크바 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를 꿈꾸기도 했지만 도자기에 대한 갈망이 더 컸다. 대학교 3학년 때 산악회에 들어가면서 산꾼으로 인생 행로를 또 한 차례 틀 뻔했다. 진짜 산꾼이 돼버려? 그러다 훗날 아내가 된 산악회 선배 홍옥주와 화전민터에 갔더니 발에 채는 게 까만 사금파리가 아닌가. 어떻게 도자기가 까맣지? 군대를 다녀와서 국립공업연구소 도자기시험소 연구원으로 신소재를 연구했다.
    일 때문에 만난 경기도 이천 도공들은 도자기 이야기를 들려줬다. 청자 가마터에 가면 어김없이 까만 파편들이 있다고 했다. 잊고 있던 단어가 떠올랐다. 흑유. 연대 대학원 세라믹공학과에 들어갔다. 졸업하고선 직장을 때려치웠다. 1991년 고향으로 돌아와 가마를 열었다. 이름은 가평요다. 공학도로 배운 철과 불과 흙이 예술로 합쳐질 차례였다. 김시영이 말했다. "흑유는 불길의 성격에 따라 색과 무늬가 크게 달라진다. 유약과 흙이 변성이 되면서 삼라만상이 창조되는 것이다. 몇 번 맛을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공학이라는 문을 통해 도자기에 접근하니 어렵고도 쉬웠다. 감(感)이 아니라 많은 시행착오에서 얻은 데이터를 근거로 하니 쉬웠고 감으로는 완성됐다 느껴지지만 더 최적화된 데이터를 얻느라 실험을 반복해야 하니 어려웠다. 가마 온도가 1270도일 때 1300도일 때, 그릇 위치가 앞일 때 뒤쪽일 때 기타 등등 변수가 많았다. 10년 동안 뇌 속에 데이터가 축적되더니 온 몸이 계측기로 변했다. 지금 김시영은 가평 고령토와 규석과 장석과 모래를 어떻게 배합해야 하는지 느끼게 됐고, 불 색깔을 보고 온도를 알게 됐고 흙을 몇 번 두드려야 그릇이 될 정도가 되는지 손으로 알게 됐다. 검은색, 검은빛은 무한하다. 시선을 흡수하는 흑색,반사하는 검은빛,그리고 그 검은빛과 색 위로 화염이 만들어낸 온갖 무늬들.그 세계가 김시영이 만드는 흑유 위에 창조돼 있다. 한국보다 일본이 김시영을 먼저 알게 됐다. 2009년 일본 컬렉터들이 작품 구매 때 참조하는 일본미술구락부 '미술가명감'은 가평요 말차다완(抹茶茶碗) 가격을 97만엔이라고 감정했다. ㆍ도공의 두 딸, 김자인과 김경인
    산악회 선배 홍옥주와 결혼한 김시영에게 산은 또 다른 목표였다. 첫딸 자인이 백일을 맞았을 때 두 사람은 북한산 암벽을 올랐다. 배낭에는 백일 된 자인이 들어 있었다. 유전과 환경은 무섭다. 자인과 동생 경인은 각각 검도와 유도를 배웠다. 경인은 고등학교 때 로체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다녀왔다. 지난 12월 31일 아버지는 동해바다로 큰딸은 청계산으로 둘째딸은 소백산으로 뿔뿔이 떠났다.
    상고대가 활짝 핀 호명산 산중 드라이브 코스.

    두 딸은 이화여대와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나와서 지금 도자기를 만든다. "밤새 작업실에 있다가 아침에 흥분한 목소리로 우리를 깨우는 아빠가 존경스러워서"(자인)"멋져보여서"(경인) 아빠에 대한 존경심에 물려받은 재주와 취향이 결합해 두 딸은 가평요 2대 도공이 되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언감생심이었는데, 자기들이 흑유를 한다니 어찌나 기분이 좋았던지." 맏딸 자인이 흑유 다구로 차를 만들면 부녀는 다실에 앉아 논쟁을 벌인다. "최근에 아빠가 커다란 흑유 달항아리를 만들었는데 굽 높이가 파격적이라 우리가 반대하며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한 컬렉터가 바로 그 항아리를 구입하는 바람에 두 딸은 입을 꾹 다문다. "아빠가 우리보다 실험적이라 우리가 제동을 걸 때가 많다. 아마 우리는 강단에서 배운 게 기초이면서 굴레일 수 있지 않을까. 학교에서는 그릇 만들기만 하고 굽는 건 해보지 않았으니 아빠가 우리 스승이다." 요즘 김시영이 만드는 검은 달항아리 시리즈는 3000만원을 호가한다. 느낌이 강렬하고 깊다.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자인과 경인은 생활자기도 만든다. 자본주의 시대에 예술가도 부자가 될 권리가 있다. 세상이 흑유를 접할 수 있도록 두 딸은 누구나 쓸 수 있는 소품들을 함께 만든다. 2008년 공학도 김시영을 산과 흑유로 안내했던 홍옥주가 하늘로 갔다. 큰딸 자인이 그리움과 아픔을 숨기며"나보다 한 살이라도 많으면 좋으니 얼른 새장가 가시라"고 채근해도,김시영은 가마불만 지폈다. 그러다 2년 전 제자였던 공예가 최병랑이 하늘로 간 그녀의 빈터를 채웠다. 새롭게 구성된 도공 가족은 지금 늘미재 너머 홍천 길곡리에 도요지를 세웠다. 이름은 여전히 가평요다. ㆍ공민왕 몽진길, 그리고 가평 드라이브
    왕이 난리를 피해 도주하는 행위를 몽진(蒙塵)이라고 한다.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이다. 공민왕은 개경에서 가평으로, 파주를 거쳐 월악산과 울진을 지나 안동으로 몽진을 떠났다. 하나하나가 21세기 유명 관광지다.
     
    ▲ (右)김시영 흑유 달항아리 '개기월식'. 높이 55㎝, 지름 53㎝

    서울에서 6번 국도를 타고 양평을 지나 가평으로 가는 길은 속칭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다. 두 한강이 만나는 양수리를 지나 북한강 줄기를 따라 북상하는 도로변은 사계절 아름답다. 청평면 상천역에서 복장리 마을회관까지 12㎞ 산중 도로는 특히나 아름답다. 일교차가 심한 이즈음 이 길에는 시도때도 없이 나목(裸木)에 상고대가 핀다. 공기 중 수증기가 눈꽃으로 얼어붙는 현상이다. 운 좋으면 양평~가평~춘천 경춘가도변에서도 상고대를 만날 수 있다. 잣 산지답게 가평에는 늘푸른 잣나무숲이 있다. 축령산 잣나무숲이다. 잘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피톤치드를 원없이 흡입할 수 있는 숲이다. 문제 하나. 과연 공민왕은 그 관광지를 즐기며 피란을 했을까? 답은 '그렇다'다. "왕은 영호루에 가서 배를 타고 풍광을 구경한 후 강가에서 활을 쏘았다. 안렴사가 왕을 위해 잔치를 열자 구경꾼이 빽빽이 모여들었다."(고려사) 살림살이 어렵고 우울한 이 시대 모처럼 나들이 떠난 우리도 겨울을 즐길 권리가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그곳이 개평 잘 주는 인심 후박한 땅 가평이라면. ㆍ가평 여행수첩
    〈볼거리〉

    1. 축령산 잣나무숲
    3월까지 입장료 없음. 너른 잣나무 숲 속에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다. 눈이 남아 있어 운치가 있다. 아침고요수목원 가는 길목. 정식 명칭은 '잣향기 푸른 숲'. 가평군 상면 행현리 922-1
    2. 쁘띠프랑스 지난해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도 매니저가 천이슬을 공중부양시킨 장면을 찍으며 일약 인기 폭발한 곳. 프랑스를 테마로 한 벼룩시장, 기념품점,공연 등. 2월 말까지 오후 8시 폐장. www.pfcamp.com, (031)584-8200.
    〈가평요 오픈하우스〉
    5월 정식 개관을 앞두고 1월 16일(토) 15명 예약자에 한해 오픈하우스 행사를 연다. 1대 도공 김시영의 작품 설명과 감상,요리와 목공 소품 공예가 최병랑의 잔치국수,2대 도공 김자인-경인의 말차 시연 및 시음 행사. 예약은 이메일 gapyeongyo@naver.com로만 받는다. 홈페이지 www.gapyeongyo.com
    〈맛집〉

    돌쇠네
    호명산 산중드라이브길에 있다. 더덕닭갈비 2만5000원, 더덕구이 2만원, 산더덕백숙 5만원 등. 가평군 청평면 상천리 상지로 355-20, (031)584-5382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 전문기자 seno@chosun.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