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땅의 歷史

인제 토박이 조남명과 원대리 자작나무숲

浮萍草 2015. 12. 16. 09:48
    "자작나무 새하얀 숲… 원대리 첩첩산골이 반짝입니다"
    불발탄 주워 놀던 38선 접경 산골 원대리 마을에 1990년대 목재용 자작나무 41만 그루 山中에 심어 한 해 20만명이 오지마을 눈부신 숲 찾아와 2050년이면 가구용 목재로 벌목할 가능성도 '세월이 가면' 시인 박인환이 태어난 곳도 인제 땅 1959년생인 강원도 인제 토박이 조남명은 어릴 적 친구들과 섬밭에서 불발탄을 가지고 놀았다. 섬밭은 인제읍 원대리 내린천에 있던 섬이다. 조남명의 고향 원대리 마을에서 1㎞ 정도 떨어져 있다. 20세기 한때 인제군은 지도에서 사라진 적이 있다. 38선이 인제군을 관통하면서 남쪽 인제 땅이 홍천군으로 편입된 것이다. 원대리는 팔자가 더 사나웠다. 마을 한가운데 남북으로 흐르는 실개천에 38선이 그어져버렸으니까. 원대리 사람들은 낮에는 개울 건너 농사를 짓고 밤이면 다시 개울을 건너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섬밭에 주둔했던 소련군은 낮 동안 빈집들을 노골적으로 털어 가곤 했다. 평화가 왔다. 섬밭에서 아이들은 불발탄을 가지고 놀았다. 장약을 깡통에 모아서 심지에 불을 붙여 섬에 있는 용소매기 연못에 던지면 기절한 물고기가 쏟아졌다. 가끔 손이 날아가 버린 아이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섬밭은 매립돼 수변 공원이 되었다. 엉터리도 그런 엉터리가 없는 마을 역사는 잊혔다. 세기가 바뀐 2015년, 조남명이 사는 원대리에 낭만적 놀이터가 생겼다. 이름하여 '원대리 자작나무 숲'이다. ㆍ조남명과 38선 마을 원대리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하던 땅, 인제였다. 전체 면적 16만5000㎢ 가운데 14만5000㎢, 그러니까 88%가 숲이요 산이다. 지금이야 서울에서 두 시간이면 닿지만 1980년대까지도 인제는 오지(奧地) 중 오지였다. 조남명이 태어난 원대리는 배를 타고 내린천을 건너서 비포장길을 1㎞ 더 들어가야 나왔다. 원대리는 한자로 院垈里다. '집터'라는 뜻이다. 옛 지명은 의미심장하다. 충북 청주에 공항이 생기더니 '비상리(飛上里)'와 '비하리(飛下里)'를 잇는 땅이 활주로가 되었다. 물이라곤 빗물밖에 없던 인제 수산리(水山里) 첩첩 산골에 소양호가 생겼다. 그래서 조남명은 믿는다. 3군단 군인들이 원대리로 들어오는 다리를 만들고 도로를 뚫은 지 40년이 다 됐고 이제 이 '깡촌'도 사람 살기 좋은 집터로 변할 때가 됐다고.
    원대리 마을에 있는 38선 표석과 토박이
    이장 조남명.
    불발탄 줍고 다니던 실개천 변에는 원대국민학교가 있었다. 조남명과 친구들은 이 학교를 졸업하고 재건중학교에 입학했다. 1960년대 가난해서 못 배운 시골 아이들을 위해 만든 무료 학교다. 학교가 부실 운영으로 문을 닫고서 조남명은 한학을 배웠다. 3년 동안 동몽선습과 명심보감을 배웠다. 나이 열일곱에 고향을 떠나 서울과 부산과 울산에서 자동차 판금을 하며 돈을 벌다가 스물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내린천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뚫렸지만 여전히 원대리는 가난했다. 조남명은 골짜기 사이사이 좁은 땅에 농사를 지었다. 화전(火田)은 일찌감치 금지됐다. 원대리에 널린 잣나무에 올라가 목숨 걸고 잣송이도 따서 팔았다. 도로 포장 공사를 할 때는 일품을 팔았다. 지금은 마을 옆 안삽재 골짜기 3만평 땅에 오미자,곰취,콩,풋고추에 토마토,옥수수까지 기른다. 약삭빠르게 마음먹었다면 고향 등지고 대처 나가 돈도 벌었겠지만, 이상하게도 어릴 적 서당에서 배운 교훈이 평생 따라와서 지금도 나쁜 짓은 할 수가 없다"고 했다. 1974년 원대리 남정네들은 화전민이 철거된 마을 뒷산 절골 계곡에 나무를 심었다. 잣나무도 심었고 자작나무도 심었고 낙엽송도 심었다. 조남명은 "파는 묘목이 그 세 종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 구체적인 이유는 없었다"고 했다. 1988년 솔잎혹파리가 원대리 숲을 휩쓸었다. 쑥대밭이 된 산에 이듬해 산림청이 자작나무를 심었다. 1989년 4월 8일 사흘 동안 비탈을 고른 후 4월 11일 원대리 한쪽 3만2000평에 1년생 베루코사 자작나무 묘목 2900그루를 심었다. 묘목 가격은 22만5000원이었다. 침엽수 일색이던 정부 조림목에 드디어 활엽수가 끼어든 것이다. 피폐했던 대한민국 산은 심고 관리하기 좋고 잘 자라는 침엽수로 울울창창해졌다. 이제 종이와 목재를 생산할 경제림(經濟林)을 가꿀 시대였다. 베루코사 자작나무는 핀란드 같은 북유럽에서 자라는 나무였다.
    무늬가 아름다워 가구목으로 쓰인다. 솔잎혹파리가 지나간 숲에 이 나무가 시험적으로 원대리에 뿌리를 박았다. 조남명은 기억한다. " 나라는 올림픽을 치렀지만 원대리는 가난했다. 나무 심기에 동원된 주민들은 일당을 돈과 함께 밀가루로 받았다." ㆍ원대리 자작나무 숲
    그 뒤로 그 숲이 어찌 됐는지는 기록이 없다. 대신 이듬해 원대리에 대규모 자작나무 숲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인제국유림관리소 소장 송갑수가 말했다. "그때 조림 선배들이 전국을 헤매며 자작나무 최적지를 물색했다. 춥고 양지바른 곳을 좋아하는 자작나무에 원대리는 천국이었다." 원대리 자작나무는 잔가지가 위로 솟구치는 시베리아 자작나무(학명 Betula platyphylla)다. 시베리아와 만주, 중국, 한반도 북쪽과 일본 북부 지역에서 자란다. 남한 땅은 애당초 시베리아 자작나무가 살 곳이 아니었지만 송갑수의 선배들은 원대리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산림청은 원대리 국유림 138㏊ 그러니까 41만7450평에 1~2년생 묘목을 자그마치 41만4000그루나 심었다. 1990년 3월 27일을 시작으로 6년 동안 벌어진 일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손을 잡고서 숲 속을 걷고 있었다.내년 2월에 결혼한다고 했다. 연인들을 둘러싸고 서 있는 저 찬란한 숲을 보라.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이다. /박종인 기자

    기후와 토양도 적합했지만 원대리는 숲을 관리할 수 있는 숲 속 임도(林道)도 매력적이었다. 숲에는 인제 사람들이 소금을 사러 양양으로 가던 소금길이 있었다. 그 길 중간에 원대국민학교 회동분교가 있었다. 1976년 이 분교에 근무하던 부부 교사가 3군단에 부탁했다. 아이들도 교사들도 힘이 드니 길을 넓혀달라고 그래서 그 무렵 원대리 들어가는 다리가 생겼고 큰길인 원남로가 생겼고 원대리에서 절골을 지나 정자리로 가는 원정 임도가 생겼다. 가난한 지자체가 엄두도 못 낸 일을 해준 군부대에 감사하는 표석이 자작나무 숲 초입에 서 있다. 길은 이후 자작나무 숲 관리에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여리디여린 자작나무 묘목들이 뿌리내리고 20년이 흘렀다. 조남명은 문득 깨달았다. 원대리가 지명대로 굴러가고 있다고. "마을에 손님이 오면 절골로 가는 임도로 산책을 갔다. 자작 숲이 예쁘다고 난리였다. 우리는 몰랐지. 그런데 손님이 손님을 데리고 오더니 그다음에는 사진가들이 몰려왔다. 그러더니 연예인이 들이닥치고, 그다음에는…." 사람 사태(沙汰)가 난 것이다. 5년 전부터라고 했다. 남한에서 구경할 수 없는 새하얀 자작나무 숲이 숨어 있다니, 소나무 땔감으로 밥을 짓고 소나무 집에 살다가 소나무 관에 들어가 하늘로 가는 중부 이남 사람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이북 사람들과 만주 여진족은 자작나무 땔감과 자작나무 집과 자작나무 관을 썼다. 숲을 찾은 사람들은 그 전설 같은 숲에 틈입했노라고 자랑하기 바빴고 그 덕에 아득한 오지 원대리는 전국으로 유명해졌다. 그 무렵부터 신문, 방송, 블로그에 시인 백석(白石)과 고은(高銀)의 자작나무 제하 시(詩)가 넘쳐났다. 방문객 사태를 맞아 국유림관리소는 2012년 1년생 묘목 1만8000그루를 심은 임도 3.5㎞ 위쪽 6㏊를 탐방로로 개방했다. 이름은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이라 지었다. 그 숲에 자작나무가 첫 뿌리를 내린 이래 36그루는 껍질이 벗겨졌고 7그루는 칼로 낙서가 5그루는 대담하게 조각이 새겨졌다. 20년 넘게 솎아낸 새하얀 자작나무 5444그루 가운데 48그루가 사람 손을 탔다. 큰길가 안내소에서 숲까지 걸어서 40분 정도 걸린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면, 찬란하다. 키가 20m를 넘는 '숲의 귀부인' 5000여 그루가 찬란하다. 이 대단한 숲을 가꿔낸 사람들이 찬란하다. 심한 유혹에도 그 세월 동안 나무들을 건드리지 않은 시민 의식이 찬란하다. 그 덕분에 지난 11월까지 이 숲을 찾은 사람이 19만2000명이었다. 이 엄혹한 겨울날에도 숲 앞 주차장은 만원이다. ㆍ요절 시인 박인환과 자작 숲
    박인환문학관 마당에 서 있는 시인 박인환의
    동상
    시인 박인환은 인제에서 태어나 열한 살 때 대처로 떠났다. 사내는 시인이 되어서 서울 명동 시대를 주름잡았다. 인제읍 생가 마을에는 그 문학관이 서 있다. 대한민국 문예 시대를 이끌었던 1950년대 명동과 종로 거리를 재현해놓았다. 박인환이 운영했던 서점 마리서사,'세월이 가면'을 지은 막걸리집 '은성' 같은 낭만 시대 공간들이 보인다. 설(說)이 분분하지만,세월이 가면'은 1956년 외상값을 독촉하는 여주인 이명숙에게 즉석에서 써준 시였다. 옆자리에 있던 작곡가 이진섭이 역시 즉석에서 멜로디를 썼다. 옆집에서 술을 마시던 가수 현인(나애심이라는 설도 있다)이 와서 악보를 보며 노래를 했다. 사연 많은 여자의 인생을 담은 노래에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인 여주인이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외상값 안 줘도 좋으니 그 노래는 부르지 말아달라"고 박인환은 이후 요절 시인 이상(李常)을 기린다며 폭음으로 지내다 3월 20일 죽었다. 요절(夭折), 서른한 살이었다. 시인만큼 요절은 아니더라도, 쓰임 많은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운명이 결정돼 있다. 인제국유림관리소 소장 송갑수가 말했다. "자작나무는 60년이 되면 베어내 목재로 쓴다. 경제림으로 만든 원대리 숲 또한 2050년 무렵이면 벌목이 예정돼 있다. 하지만 때가 오면 알 수 없지.목적이 바뀔지도." 그렇다. 시인 말대로,세월이 가고 사랑은 가도 과거는 남는 것. 지금 당장 자작 숲이 그리워 사람들이 원대리를 찾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 사랑이 가고, 추억 속에서만 그 자태가 빛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운가. 자작나무 숲으로 가보라.
    [인제 여행수첩] 〈볼거리〉 1. 원대리 자작나무 숲 : 입장은 오후 2시까지. 안내소 방명록에 연락처를 적고 올라간다. 갈림길이 나오면 오른쪽 원정임도를 택할 것. 오르막길 3.5㎞. 잘 정리된 탐방로를 따라 구경을 하고 하산. 주차장이 넓다. 인제국유림관리소 (033)460-8036 2. 박인환문학관 : 박인환 팬과 문학 애호가라면 들를 만하다. 생가도 복원돼 있다. 무료. 인제읍 상동리 415-1, (033)462-2086 3. 인제산촌민속박물관 : 박인환문학관 바로 옆. 산촌마을 문화를 소상하게 엿볼 수 있다. 무료. 둘 모두 공휴일 다음 날 및 월요일 휴관. www.inje.go.kr/museum, (033)460-2085 〈맛집〉 1. 자작나무향토음식점 : 원대리 마을이 운영하는 식당. 조남명 이장의 마을 설명도 들을 수 있다. 자작나무 숲 안내소에서 원대삼거리 방향 3분 거리. 쌈밥 1만원(2인분 이상), 황태구이 8000원, 황태옹심이 9000원, 황태해장국 8000원. 평일에는 전화 요망. 원대리 279, (033)461-4857 2. 합강막국수 : 장작불로 만드는 비빔막국수 6500원, 물막국수 6000원, 메밀전 6000원, 편육 1만5000원. 인제읍 합강2리5반, (033)461-2100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 전문기자 sen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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