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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강화 신미양요 전적지와 교육박물관 김동선, 이인숙 부부

浮萍草 2015. 11. 18. 10:00
    교통사고로 시력 잃은 女교사 아내 위해 교육박물관 만든 남편
    秋色 흐르는 강화도 염하 물길… 부부 박물관에는 역사가 숨쉬고
    초지진… 덕진진… 병인·신미양요 격전지, 美 함대 상대로 결사항전한 광성보 부부는 덕포진에 교육박물관 세워 시력 잃은 아내는 '웃음' 가르치고 남편은 "역사에서 배워야" 수업도 동선(75)과 이인숙(68) 부부는 김포 덕포진에 산다. 덕포진은 조선 시대 해군 진영이다. 예나 제나 덕포진은 군사 지대다. 17세기 병자호란 때도 그랬고 19세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도 그랬다. 지금도 덕포진에는 해안 초소가 있다. 그 옛날 군사 요충지치고 관광지로 변하지 않은 곳은 없다. 문경새재가 그렇고, 강원도 양구 펀치볼이 그렇다. 김동선과 이인숙은 그 관광지 덕포진에 박물관을 만들었다. 1996년에 개관했으니 내년이면 20년이다. 이름은 덕포진교육박물관이다. 부부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박물관에 재현한 초등학교 3학년 2반 교실에서 남편 김동선은 역사 수업을 하고 아내 이인숙은 음악과 국어 수업을 한다. 이인숙은 앞을 보지 못한다. 어둠 속에 살아온 지 20년이 넘었다. ㆍ염하(鹽河)에 흐르는 역사
    김포와 강화도 사이에 있는 물길을 염하(鹽河)라고 한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해 서해로 흐르는 물길이다. 양안 사이 거리는 1㎞ 남짓하고 물살은 거세다. 김포와 강화도 해안에는 곳곳에 해군 부대가 있었다. 김포 서쪽 해안에는 덕포진,강화도 동쪽 해안에는 초지진,덕진진,광성보가 대대급 진영이었다. 동과 서에서 퍼붓는 포격으로 한양으로 진격하는 적을 제지할 수 있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신한 조선 왕실도 그렇게 생각했다. 착각도 어마어마한 착각이었다.
    인천 강화도 덕진진 포대 옆 99칸 한옥 공간 학사재는 지금 추색(秋色)에 휩싸여 있다. 덕진진은 신미양요 때 미국 아시아 함대를 향해 포를 퍼부었던 군영이다. 화려한 가을빛 속에는 배워야 할 역사가 숨어 있다. /박종인 기자

    김포를 점령한 3만 청군 병력이 염하 한가운데에서 쏴댄 홍이포(紅夷砲)에 갑곶진은 초토화됐다. 서양 대포를 개량한 홍이포는 최대 사거리가 700m다. 지금 김포와 갑곶진 사이에 놓인 강화대교는 길이가 780m다. 패전 후 조선 왕실은 강화도 해안에 진과 보와 소대급 돈대를 설치하고 홍이포를 도입했다. 세월이 흘러 1866년 10월 16일 프랑스 극동 함대가 염하에 나타났다. 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개항을 강요하려는 의도였다. 이번에는 군기가 빠져 있었다. 그 누구도 프랑스 군함도,상륙하는 600명의 병사도 제지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옛 고려 궁터 강화 유수부를 점령해 11월 21일까지 한 달여 동안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를 약탈한 뒤 불을 지르고 퇴각했다. 이게 병인양요다. 전소(全燒)된 강화 유수부에는 지금 복원된 외규장각이 서 있다. 갑곶진 자리에는 갑곶돈대가 복원돼 있다. ㆍ부부 교사 김동선과 이인숙
    김포 소년 김동선은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1972년 서울 창신초등학교 교사로 연세대대학원 다닐 때 이화여대 도서관에 갔다가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을 봤다. 이듬해 학교로 신참 교사가 부임했는데 그 학생이었다. 이름은 이인숙이었다. 서로 알아봤지만 모른 척하고 지내다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남편은 '옛것들을 보면 가슴이 떨려' 주워오거나 사 와서 집안에 쟁여놓았다. 옛 교과서,성적표,상장,책걸상 같은 수집품이 4000점이 넘었다. 1983년에는 은퇴하면 아이들 인성 교육하겠다며 덕포진에 헌 집도 샀다. 행복했다. 1990년 아내가 출근길 교통사고에 기절했다가 눈을 뜨니 앞이 깜깜할 때까지는. 4년 동안 병원에 다녔는데, 어느 날 의사가 남편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오셔도 됩니다." 다음 날 김동선은 아내 대신 사표를 냈다. 천직(天職)을 강탈당하고 분노한 아내에게 말했다. "평생 아이들 가르치게 해주겠다." 그래서 2년 동안 두 아들과 남편이 벽돌 찍고 날라 만든 게 덕포진교육박물관이었다. 40대 때 본 사랑하는 남편 잘생긴 얼굴은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덕포진에 박물관을 세운 김동선·이인숙 부부.

    박물관 1층에 남편은 아내가 마지막으로 가르친 3학년 2반 교실을 만들었다. 이인숙은 그 교실에서 방문객들에게 풍금을 치며 동요를 가르치고 시(詩)를 가르친다. 학생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위해 새벽 4시면 박물관 안내 데스크에서 라디오를 듣는다.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해서 듣고 또 들어 외운다. 라디오 열댓 개가 고장이 났다. 외우고 있는 시만 150수가 넘는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 더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수업 시간에 자주 읊는 시다. 그러고 나면 남편 김동선이 역사 수업을 한다. 덕포진과 김포와 강화도와 조선과 대한민국과 역사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 ㆍ염하(鹽河) 1871년, 신미양요
    서울에서 88올림픽도로를 타고 김포로 빠지면 대명포구 가는 길이 나온다. 덕포진은 그 옆이다. 2001년 그 옆으로 초지대교가 개통됐다. 항구를 즐기고 다리를 건너 우회전하면 초지진이 나온다. 해안 도로를 따라 북상하면 덕진진이 나오고 광성보가 나온다. 장담컨대 이 유적지들은 가을 산책 길로 '최고'다. 1871년 6월 1일 미 아시아 함대 군함 5척이 염하에 나타났다. 5년 전 평양에서 벌어진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 습격 사건을 핑계로 개항을 요구하러 온 것이다. 광성보 포수가 홍이포를 발사했다. 덕포진,초지진과 덕진진,광성보에 있는 포 수백 문이 불을 뿜었다. 미군이 "남북전쟁 때도 그렇게 엄청난 폭격은 경험하지 못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대규모 포격이었다. 배에는 포탄은커녕 물보라도 튀지 않았다. 열흘 뒤 미 해군과 해병대는 염하를 북상하며 초지진부터 덕진진,광성보까지 초토화시켰다. 해병대는 조선군이 퇴각한 덕진진을 무혈점령했다. 그리고 광성보에서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 해군 350명은 탄환이 떨어지면 창과 칼로 싸웠고 돌을 던지고 흙을 뿌렸다. 한 시간 남짓한 광성보 백병전에서 미군 3명이 전사하고 조선군은 350명 전원 전사했다. 부상당한 병사는 자기 목을 칼로 찌르거나 바다로 뛰어들었다. 전투가 끝나고서 미군은 함대를 향해 퍼붓던 포격이 불꽃놀이로 변한 이유를 알게 됐다. 조선군 대포들이 죄다 통나무 포좌에 고정돼 있는 데다 성벽에 뚫린 포문 또한 좁고 길어서 포를 조준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뜨겁던 여름날 조선군은 면과 솜을 열세 겹 덧댄 방탄복을 입고 있었다. 총알이 스치면 불이 붙었고, 미군 소총은 사정거리가 900m였으니 120m 나가는 화승 총탄 막겠다는 방탄복은 무용지물이었다. 조선군은, 맨주먹이었다.
    신미양요 전투 때 부대원 전원이 전사한 광성보. 목숨을 건 정신력도 열악한 전력을 뒤집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은 용맹했으며 애국적이었다. 아시아 함대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가족과 나라를 위해 그처럼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군인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튿날 미군은 조선군 대장(大將旗)인 수자기(帥字旗)를 함상에 싣고서 염하를 빠져나갔다. 초지진 성벽과 소나무에는 그때 포격을 맞은 흔적이 남아 있다. 광성보에는 어재연 장군과 동생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무명 병사들을 무덤 일곱 기에 모은 신미순의지총도 있다. 덕진진 포대 오른편에는 2000년 재미교포가 만든 99칸 한옥 문화 공간 '학사재(學思齋)'가 단풍에 불탄다. 2000년 광성보 전사들을 기리는 광성제에서 신미양요 때 전사한 미군 매키 대위와 광성보 전투를 지휘한 어재연 장군의 후손들이 악수를 했다. 신미양요를 연구한 영남대 외국어교육원 교수 토머스 듀버네이가 주선했다. 2007년 수자기(帥字旗)도 반환됐다. ㆍ다시 덕포진을 걷는다
    초지대교를 건너 덕포진을 다시 걷는다. 덕포진 포대 지붕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산책 길이 조성돼 있다. 산책로 끝에 있는 돈대 터에는 해병대 초소가 있다. 이 위험한 풍경 속 작은 박물관에서 역사 교사 김동선이 말한다. "열악한 상황에서 우리 조상이 지키려 했던 것이 뭔지 알아야 한다.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뭘 배우고 감사해야 한다고? 참 아름다운 이 가을날, 염하(鹽河)에 가서 물어보라. ㆍ김포·강화 여행수첩
    1.순례길 : 덕포진~덕진진~광성보~갑곶돈대~고려왕궁 순. 어느 매표소에서든 2700원짜리 일괄입장권을 사면 다섯 군데를 다 돌아볼 수 있다. 김포 덕포진은 무료. 2.덕포진교육박물관 : 덕포진 초입.성인 3000원. 이인숙 선생님의 음악 수업과 김동선 선생님의 역사 수업을 초등학교 3학년 2반 교실에서 받을 수 있다. www.덕포진교육박물관.kr, (031)989-8580,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덕포진로 103번길 90 3.대명포구 : 음식점은 요즘 꽃게가 제철. 시장에서는 각종 김장용 젓갈을 싸게 살 수 있다. 이곳에서 초지대교를 건너면 강화도 전적지 순례가 시작된다. 4.학사재 : 개인 집이라 방문은 쉽지 않다. 한옥 관련 동호회를 통해 방문하거나 홈페이지를 통해 방문 신청. www.bahee.org 〈맛집〉 1.갯배생선구이: 초지대교 건너 오른쪽. 조기,청어,고등어,꽁치 등 물고기 7마리를 숯불에 구워 먹는다. 오징어와 새우는 덤이다. 1인분 1만200원. (032)937-7714,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14-7 2.'카페 인 초지': 초지진 선착장 끝 바닷가 카페. 잘 정돈된 정원과 깔끔한 실내. 아이들은 바깥에서 놀 수 있다. (032)937-8744, 해안동로 6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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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 전문기자 sen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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