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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근심을 날리는 망우리의 유래

浮萍草 2015. 12. 1. 22:27
    기도 남양주 별내에 살고 있는 40년지기 친구가 문득 보고 싶어 만나러 갔을 때였다. 
    마침 저녁시간이라 파란 가을 하늘에 불그레한 기운에 물들고 있었던 그 곳에서 친구가 말하길 “저기 보이는 공원이 걷기에 좋은데 그곳에 조선 개국공신 남재 
    선생의 묘소가 있다”는 것이었다.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남재선생신도비 부근에는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서 늦가을 하늘과도 잘 어울리는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남재(南在·1351~1419)의 자는 경지(敬之) 호는 구정(龜亭)으로 1371년(공민왕 20년) 진사시험에 5등으로 합격했다. 
    그로부터 21년 후인 1392년에 조선이 개국하자 남재는 은둔했다. 
    태조 이성계는 그를 몹시 그리워하여 찾다가 드디어 만나게 되자 있을‘재(在)’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태조는 남재가 생존해 있음에 무척이나 안도하고 기뻐한 것이었으리라.
    남재묘 들어가는 입구. /이장주 교수 제공

    이때 남재는 스스로 경지(敬之)라고 자를 지었으니 이는 태조 이성계가 이름을 하사해 준 것에 대해 공경한다는 의미에서였다. 1396년 태조의 명으로 도병마사가 되어 대마도 정벌에 나서는데 태조는 남대문 밖까지 나와 전송하였다. 당시에 조선에 정벌 당한 대마도 주민을 그 땅에 계속 살도록 허락했으니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사실을 잠깐 엿볼 수도 있다. 남재 선생은 1400년(정종 2년)에 경상도관찰사,의정부찬성사, 우의정을 거쳐 1416년(태종 16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그가 과거를 관장하는 벼슬에 있을 때 태종은 “남재는 시험을 관장하여 선비를 뽑는데 있어 공정하다”고 했다. 1419년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조정(朝廷)과 시장(市場)을 정지하고 장례에 쓰일 돈과 도구를 내렸으며 세종 임금이 직접 조문하였다. 세종은 “…나이 어린 나에게 잘못을 지적하고 주의를 주었다. 그는 나의 스승으로 학문을 가르쳐 준 은혜가 있고…”라 했고 당시에 상왕으로 있었던 태종도 “… 그는 나라를 여는데 있어 큰 공이 있다. 내가 명나라에 갔을 때에 밤낮으로 고락을 함께 하였다. 내가 왕위를 계승한 뒤로는 더욱 나를 도왔는데 한 번 병이 나서 갑자기 죽을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슬픈 마음이 끝이 없다…”고 애도하였다.
    남재 선생을 모신 사당. /이장주 교수 제공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에 새겨진 공신 40인 중 열네 번째에 이름이 있는 남재에게는 전해 내려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남재는 어느 날 태조와 묘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남양주에 같이 갔다. 그런데 남재가 정해놓은 자리가 좋다고 태조가 계속 이야기하자 그 자리를 양보하고 대신 태조가 정해놓은 자리를 맞교환 하게 되었다. 남재가 태조에게 그에게 준 자리는 반역의 누명을 쓸 자리라 하자 태조는 남재에게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남재가 비로소 안심하고 고개를 넘어 오는 길에 이성계가 ‘서로의 근심을 잊게 되었으니 이 고개 이름을 망우고개(忘憂)라고 하자’고 해서 망우리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하니 그 또한 재미있다. 그 후에 남재의 집안 내에는 생육신중 한 사람인 남효온과 젊은 나이에 처형당한 남이 장군이 나왔으나 멸문되지 않고 숙종 때는 영의정 남구만 등을 배출하며 의령 남씨 집안은 번성했다고 한다. 손님이 집에 오면 먼저 바둑을 두기를 권해서 술이나 차를 마시면서 자연히 오갈 수 있는 정치와 남에 대한 뒷담화를 피했고,임금께 직언도 서슴지 않았던 남재는 성격이 활달하고 생각이 깊었다고 한다.
           이장주 성균관대 수학교육과 겸임교수 ljj16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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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이, 수학에 정통했던 이유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도량과 재능을 갖추었으며 활달하고 깊고 고상하다”“산술(算術)을 두루 널리 공부하여 옛사람이 미처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고 모르는 
    수학문제가 없어서 세상에서는 그를 ‘남산(南筭)’,즉‘남 수학’이라 하였다”는 표현이 옛 서적 여러 군데에서 보인다.
    얼마나 수학에 통달했으면 별명이 ‘남수학’이었을까?
    세종이 동궁이었을 때 스승이기도 했으니 세종이 수리 과학에 정통한 군주가 된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 
    조선 중기의 최석정의 수학책‘구수략’ 갑,을,병,정 중에서 병권 마지막 부분인‘고금산학’에서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수학자들을 소개했는데 “…우리나라의 수학자
    로는 신라의 최치원이 있고,조선에는 산법의 재주에 있어 가장 뛰어난 충경공 남재가 있고…”라며 황희,서경덕,이황,이이,김시진,이관,임준,박율,경선징을 이어서 
    적어놓았다.
    남재묘 들어가는 입구. /이장주 교수 제공

    수학과 천문학이 잠시 쇠퇴했었던 고려 말기에도 국자감에서는 수학이 연구되었고 수학 과거시험인 ‘명산과’가 이틀에 걸쳐 엄격하고도 세밀하게 치러졌다. 고려의 수학은 중국의 수학과 달리 신라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보이는 것을 당시의 수학교재 이름에서 알 수 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수학책 ‘철술’을 신라부터 고려까지 교재로 사용했는데 남재,즉 ‘남수학’선생은 이런 종류의 책들도 통달하였으리라. 신라와 고려와 조선의 수학을 잇는 연결선상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남재의 존재감을 인지하게 된다. 그가 죽은 후 가문에서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워서 추모했는데 이 신도비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희놈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라는 시조로 잘 알려진 남재의 10대손 남구만(南九萬)이 내용을 썼다. 신도비 말미에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 …조선을 개국할 때, 기이한 재주와 뛰어난 사람들이 메아리처럼 호응하였네. 이때 계책을 도운 분으로는 충경공 남재가 있었으니 개국 공신이요,지위는 영의정이었다. 네 차례 조정을 섬기고, 두 임금의 능에 공신으로 새겨지며…
    남재신도비(왼쪽)와 이를 해석하여 세운 새 신도비. /이장주 교수 제공

    우리 선조들의 역사 속의 수학의 기록을 살피는 의미는 남재의 신도비에 있는 글로도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물(우리 수학)의 근원을 알려거든 그 흐름의 가깝고 먼 것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요,나무(우리 수학)의 뿌리를 알려거든 그 잎의 무성하고 시들음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니, 이제 공(우리 수학)의 덕을 알고자 한다면 증거할 만한 것이 여기에 있다. 일(우리 수학)을 기록함에 상세하고 간략함을 어찌 따질 것이 있겠는가.” 남재가 남긴 수학은 보이지 않지만 신도비의 수학이야기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서 우리의 가슴에 전해진다. 남재의 신도비를 지나서 묘소로 오르는 동안 한 나라를 열기 위한 기막힌 고비들을 헤쳐 나왔던 ‘남수학’과 신라부터 조선으로 가는 수학의 맥을 생각했다. 오르는 동안 멀리서 저녁 새가 나를 보고 있었다. 저녁노을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 동안 새는 내내 그렇게 앉아 있었다.
           이장주 성균관대 수학교육과 겸임교수 ljj16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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