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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조선군 사령관으로 있던 日 이타가키, 위안부 동원에 관여"

浮萍草 2015. 10. 31. 07:30
    2015년 9월 16일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집회'가 열렸다. /장련성 객원기자
    스턴트 간호부는 1945년 8월 15일,종전(終戰)을 전후해서 일본군 산하병원에 벼락치기 식으로 고용된 간호부(간호사의 당시 명칭)들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담은 포츠담 선언 이후 간호부로 채용됐다고 해서 ‘포츠담 간호부’라고 불리기도 했다. 학계는 “일본군이 전쟁범죄인 위안소 운영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패전을 전후해 위안부 신분을 대거 간호부로 세탁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실제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름이 상당수가 일본군 산하병원 임시간호부 명단에 등재되어 있다 실제 전후(戰後) 일본군이 위안부를 병원 소속으로 위장채용하고 이 사실을 은폐했다는 증거는 속속 발견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패전 이후 현지병원으로 하달된 일본군 암호문이 해독된 것이다. 제1남견함대 사령관 등의 지시는“위안부 제도와 연관해서 고용된 사람들은 제101(해군병원)의 민간고용인으로 임명한다. 대부분의 소녀들은 임시간호부로 한다.(8월 18일)”“위안부들을 지역병원에 소속시키고,이 전달 내용이 이해되었으면 소각하라(8월 20일)”는 것이었다. 상부의 지시에 따라 위안부들은 거의 무시험으로 간호부가 되었다고 한다. 패전 이후 병원인력을 두 배 가까이 뻥튀기한 명단을 만드느라“철야작업을 했다”는 증언도 남아 있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강정숙 교수는“일본은 간호인력 확보와 위안부에 대한 노출을 막을 수 있다는 두 가지 측면을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 고 밝혔다. 인스턴트 간호부는 크게 ▲실제 병원에서 일을 시켰거나, ▲ 명부에 등재시키기만 했던 ’유령취업’의 경우로 나뉜다. 위안부 생활을 했던 고(故) 문옥주 할머니는 태국 아유타야 육군병원에서 속성으로 교육을 받은 뒤 실제 간호부로 일했다. 문 할머니 증언에 따르면 당시 병원에서는 일본적십자사 소속 간호부가 27~28명 정도가 있었는데 이들은 위안부 출신 간호부를“조센삐(조선 위안부를 지칭하는 비속어)”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이 곳에서는 환자를 돌보는 일 외에도 병원청소와 옷을 만드는 잡일도 위안부 출신 간호부의 몫이었다. 문 할머니는“우리들은 말라리아,뎅기열,피부병,결핵환자를 담당했는데 환자들의 열을 재고 군의관의 명령대로 약을 먹였다”며“간호부 일 외에도 천과 재봉틀 등을 가져와서는 간호복까지 만들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인도네시아 발릭파판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던 강도아 할머니는 “(신분을 속이기 위해) 위안소 주인이 가져다 준 하얀 간호복을 입었지만 병원 근처에도 간 적이 없다”고 정부조사에서 진술했다. 낮에는 간호부로,밤에는 위안부로 동원됐던 경우도 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쿠타라자에서 있었던 이득남 할머니는“매일 차로 15분 거리의 큰 야전병원에 가서,부상병을 치료하고 빨래도 했다. 그리고 저녁에 돌아와서 또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고 말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대부분의 인스턴트 간호부는 자신의 신분이 군병원 소속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만 일본군 서류 위에서 그들은 임시 간호부로 남거나,두어 달 만에 해고됐다. 문제는 일본군 소속 간호부로 ‘신분세탁’되는 바람에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다. 일본군 유수 (留守·외지근무)명부가 위안부가 아닌 간호부로 할머니의 신분을 적고 있기 때문이다. 자카르타의 제5육군병원 간호부로 등재된 한모씨의 유족들은 할머니를 위안부 피해자로 정부에 신고했지만 이를 입증할 방법이 마땅하지 않았다. 1946년 1월 위궤양으로 숨진 제9육군병원 임시간호부 안모씨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위안부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확정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는 형편이다. 조선인 여성들의 집단 병원 편입현상은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사령관으로 있던 제7방면군(남방군) 산하 병원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다. 그의 직전 보직은 조선군 사령관(1941~1945년 4월)이었다. 이타가키가 조선군 사령관으로 있을 때 위안부 동원에 관여했다는 것이 연합군 조사 결과다. 전범으로 사형된 그는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김형원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 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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