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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驪江) 흐르는 여주, 목각장 박찬수와 석각장 여정수]

浮萍草 2015. 11. 4. 10:48
    한 사내는 나무를 깎고 한 사내는 돌을 깎는다
    
    가난해서 시작한 목각이 천직으로 
    나이 마흔여덟에 최연소 무형문화재… 고향 닮은 여주에 박물관 지어
    팔도 떠돌며 온갖 풍상 겪은 인생 나이 쉰에 귀향해 돌 조각 시작해… 돌집은 현대사 응축된 노천 박물관
    원도 태백 금대산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경기도 여주 땅에서 이름을 여강으로 바꾼다. 검은 말 려(驪)에 물 강(江),驪江이다. 흐름도 완만하고 강섶 갈대밭도 아름답다. 이호대교 북쪽 강천면 이호리 숲 속에 웅장한 기와집이 있다. 집은 물론이거니와 정원에 우거진 소나무며,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상들이 누가 봐도 보통 목수 재주와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신묘한 공간이다. 이름은 목아박물관이다. 여강을 따라 북상하면 전북리가 나온다. 강 건너 파사산성에서 화살(箭)이 날아왔다고 해서 전북리다. 살띄마을이라고도 한다. 살띄마을에는 돌로 만든 집이 있다. 대문은 연전에 사라진 서울 삼풍백화점 기둥으로 세웠고 대문 대들보는 일제 강점기 식산은행 돌을 가져다 세웠다. 그 아래 주춧돌은 서울 동숭동 옛 서울대학교 돌이 박혀 있다. 돌집 이름은 풍운원이다. 직접 봐야 한다. 아무리 말해봤자 느낄 수 없다. 목아박물관을 만든 사람은 박찬수, 풍운원을 만든 사람은 여정수다. 가난 탓에 고향을 등지고 세상을 떠돌다가 연어처럼 돌아와 삶의 흔적을 깊게 새긴 것도 두 사람은 닮았다. ㆍ풍운원 돌쟁이 여정수
    여주에서 태어난 여정수가 국민학교 3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다. 아홉 살에 입학했으니 열두 살이었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대신 서당에 보내며 이리 일렀다. "우리 집 똑바로 지켜라." 1951년 음력 정월 초하루 전북리에 미군과 중공군 포탄이 쏟아졌다. 기어다니던 여동생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여정수는 무작정 도망갔다. 돌아와 보니 옆집 할머니가 "니 동생, 죽었다"고 했다.
    여강 따라 남하하면 나오는 목아박물관(사진 위)은 무형문화재 108호 목조각장 박찬수가 만든 공간이다. 박찬수는 “전통은 계승도 중요하지만 발전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여정수가 만들고 있는 경기도 여주 전북리 돌집 풍운원에는 대한민국 현대사가 응축돼 있다. 30년 고집이 만든 역사다. /박종인 기자

    칡뿌리도 없어서 굶주리던 1956년 7월 어느 날 밤새 줄담배를 피워대는 아버지를 보고서 여정수는 다음 날 아침 보리 한 말을 들고 가출했다. 원주에서 일 년 동안 식당 일하고 번 돈 들고 부산으로 갔다. 지게꾼 한 명이 영주동 숙소로 데려가 고봉밥 먹이고 일을 시켰다. 그때 보았다. "이 미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밤이 되면 신문을 사서 읽고 세상일을 토론하는 것이다. 절대 천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정수는 언젠가 자기도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백학당제과에서 '아이스케키'를 떼서 팔다가 아이들한테 떼로 얻어맞기도 했다. 여정수가 맷집 좋게 대드니까 깡패 조직 칠성구락부가 데려간 적도 있었다. "서울말을 쓰니, 광복동 화양극장 앞에서 부산 놀러 온 서울놈들 지갑 털어라." 일주일 털다가 양심에 찔려 관뒀다.
    여강변에 사는 두 고집쟁이, 박찬수(왼쪽)와 여정수

    재고 빵 판매부터 청과상까지 갖은 일 다 하다가 1960년을 마산에서 맞았다. "엿 도가에서 엿을 파는데 숙소가 웅성댔다. 신문을 보고 사람들이 부정선거 때문에 나라 망한다고 했다." 그때 여정수가 있던 엿도가에는 전직 선생부터 부도난 사업가까지 인텔리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신문을 보고 하는 말에 여정수는 가만있지 못했다. 마산 굴다리 아래는 데모가 한창이었다. 데모대를 쫓아낸 지프는 여정수를 끝까지 따라와 두들겨 팼다. 피투성이가 된 여정수는 지프 꽁무니에 포승줄로 묶여 경찰서로 끌려가며 기절했다. 그다음 기억은 이렇다. "야, 저 새끼 집어던져." "살아 있네?" 또 정신을 잃고 깨보니 마산도립병원이었다. 두 다리, 한쪽 팔이 부러졌다. 조사를 해보니 사회주의자 몽양 여운형 집안이 아닌가. 서슬 퍼렇던 자유당 정권 때 젊은 엿장수 운명은 뻔했다. 4월 12일 병원에 사람들이 몰려왔다. 고등학생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을 맞고 시체로 떠올랐고 그 시신이 병원에 있다는 것이다. 4·19 학생혁명이 벌어졌고, 4월 25일 이승만이 하야했다. 그날 검찰로 갈 예정이던 여정수는 석방됐다. 2004년 여정수는 다른 동료 92명과 함께 건국포장을 받았다. 몽양 집안이라는, 반정부 데모꾼이라는 꼬리는 길었다. 정보과 형사들이 따라다녔다. 태백으로 도망가 이름을 바꾸고 탄광에서 일하기도 했다.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1980년대 서울에 식당을 차려 생계를 꾸렸다. 집안 친지들까지 하나둘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무슨,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든지." 여정수가 말했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집터가 너무 세니, 돌로 눌러 보라"고. 1981년 부정 재산 축재가로 몰린 권세가들 재산이 몰수됐다. 서울 해방촌에 있던 이후락 별장이 철거됐다. 그 별장 석재가 여정수가 모은 첫 번째 돌이다. 트럭으로 싣고 옛집에 쌓고 보니 그리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그 돌에 글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돌로 집을 다시 짓고 나니 현대사가 있었다. 대문 양쪽 기둥은 삼풍백화점 앞 연못 장식물이고, 아치를 받치는 밑돌은 이후락 별장 돌이다. 문 양편 둥근 초석은 서울 명동에 있던 식산은행 부술 때 얻어온 돌이다. 계단 아래에는 동숭동 옛 서울대 철거 때 남은 주춧돌이다. 이기붕 아들 이강국이 살던 사랑채 주춧돌, 성균관대학교에서 병원 지으면서 부순 돌집 벽도 있다. 그 돌마다 여정수는 좋은 글귀들을 새겨넣었다. 4·19와 맺은 인연으로, 서울 망우리 4·19묘지에 있는 '민주 성역' 석각도 여정수가 했다. 집 이름은 풍운원(風雲苑)이라 지었다. 바람과 구름이 노는 정원이라는 뜻이다. 팔순은 넘긴 여정수가 꿈을 말한다. "백년 뒤에 공원을 만들 거다. 지금은 번잡하고 두서없지만 그때는 누군가가 번듯하게 정리해주겠지. 나는 시작만 한 거고." 대문 안쪽 큰 바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 霜菊雪梅(상국설매·서릿발 속 국화, 눈 속에 핀 매화)'.옆문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江山萬古主 人間百年賓 강산은 만고의 주인이요 사람은 백년 왔다가는 객이라'. ㆍ목아박물관, 나무쟁이 박찬수
    1948년생인 박찬수는 무형문화재 108호 목조각장이다. 인생 여로는 여정수와 비슷하다. 가난의 대명사 경남 산청에서 날 풀만 자라는 촌구석 생초면(生草面) 그중에서도 제일 촌구석인 상촌리에서 태어났다. 가난을 이기지 못한 집은 박찬수가 열두 살 때 서울로 올라왔다. 박찬수는 왕십리에서 목각을 하는 김성수 아래 조각을 배웠다. 도장도 파고 공예품도 만들고 나무에 인두화도 그렸다. 그러다 집안을 따라 원주로 갔는데 중학교 미술 시간에 미술 선생 이운식 눈에 띄어 데생과 흙과 주물을 배웠다. 30대에는 서울 고려조각학원에서 홍익대 교수 김찬식으로부터 현대 조각을 배웠다. 10대부터 30대까지 정규 학력은 변변찮지만 당대 최고수들로부터 나무 보는 법과 칼 쓰는 법을 다 배웠다.
    목아박물관에 있는 ‘하늘교회’ 내부. 아늑하고 경건하다.

    1950~1970년대 서울 반도호텔 아케이드에 있던 화랑은 박찬수 같은 쟁이들의 비상구였다. 거기 전시된 지게에 물동이에 갓 쓴 할아버지 조각상은 미8군 군무원과 군인들에게 대인기였다. 박찬수를 가르친 도장장이 김성수는 민속품 조각 일인자였다. 박찬수에게도 먹고살려고 한 일이 천직이 되어갔다. 생계를 위해 나무를 깎으며 틈틈이 박찬수는 작품을 만들어 공모전에 출품했다. 1 982년 단원예술제에서 대상을 시작으로 1986년 대한민국 불교미술전 대상 1989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까지 공예로 받을 수 있는 상은 다 받았다. 그리고 1996년 만 48세에 건국 사상 최연소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열두 살에 고향을 떠난 지 36년 만이다. 그때까지 박찬수는 고향을 좀체 찾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마흔이 될 때까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고향이었다. 지독하게 가난했고 지독하게 암울했으니까." 대신 처가가 있는 여주에 박물관을 지었다. 아예 원적을 파서 여주로 옮기고 고향 산청 경호천을 닮은 여강 강변에 땅을 사서 끌과 자귀와 칼로 집을 지었다. 직접 만든 작품과 수집한 전통 공예 작품을 거기에 모았다. 세상 살다 보니 남들과 다투고 할퀴어대서 뭐하나 싶어서 불교에 기독교에 단군까지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정원 한쪽에는 첨성대를 닮은 작은 교회가 있다. 이름은 '하늘교회'다. 몸 하나 눕히기도 좁은 공간에 들어가면 천장에서 빛이 내려오고 십자가상이 그 빛을 받는다. 교회 앞에는 푸근하게 생긴 늙은 수녀상이 웃는다. 싸우고 할퀴기 싫으니 더 이상 고향을 싫어만 할 수는 없었다. 그 래서 박찬수는 고향 생초면에 전수관을 지었다. 산청 명물이다. 여주 박물관을 축소한 듯 예쁘고 웅장한 작품들이 그만큼 웅장한 집 속에서 웃는다. 그런데 작품들이 하나같이 비정형적이다. 석가모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 벌리고 웃는가 하면 목사와 신부와 이슬람 이맘과 승려가 손잡고 웃는다. 박찬수가 말했다. "전통 작품을 똑같이 재현하는 작업은 한두 번이면 된다. 더 하면 그건 짝퉁이지 작품인가." 전통을 계승하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계승한 그 전통을 발전시키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1000년 뒤 여강 강변 유적지에서 출토될 장인(匠人)들 작품들을 보고 "조선 시대 이후 목공예는 발전이 없다"고 결론짓지 않겠는가. 지난해 박찬수는 강원도 영월 김삿갓 계곡으로 숨어들었다. 지게로 나무 날라 산골짝에 집을 짓고 명상과 작업을 하며 산다. 호(號)는 목아(木芽)에서 고림(古林)으로 바꿨다. 목아는 나무에서 싹을 틔운다는 뜻이고, 고림은 늙은 숲이라는 뜻이다. 이제까지 나무에 숨어 있던 싹을 틔우는 작업을 했으니 이제 그 싹이 커 나갈 수 있도록 늙은 숲 그림자가 되겠다는 말이라 했다. 핏줄 따라 공예를 전공한 두 아들이 박물관과 전수관을 운영한다. 박물관에는 며느리가 운영하는 찻집이 있다. 테이블도 모두 시아버지 박찬수가 만들었다. 같은 나무라도, 같은 돌이라도 만나는 사람 따라 갈 길이 다르다. 박찬수를 만나면 나무는 부처가 되고 성모 마리아가 된다. 여정수를 만나면 폐기된 건축 석재는 현대사가 된다. 여주 여강 강변을 거닐며 그 살아 숨 쉬는 돌과 나무를 만나보시라.
    ㆍ여주 여행수첩 1.돌집 풍운원 내비게이션에 ‘전북리 마을회관’을 검색한 후 회관 앞에서 산길 끝에 있다. 보이면 자동으로 알게 된다. 여정수씨가 있을 때 가면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가정집이니 예의 최대한 지킬 것. 2.목아박물관 신륵사와 함께 둘러보면 좋다. 입장료 5000원. moka.or.kr, (031)885-9952. 찻집 목아도 훌륭하다. 테이블은 박찬수씨 작품. 작고 예쁜 ‘하늘교회’는 반드시 볼 것. 3.맛집 목아박물관 옆 고향집 곤드레밥. 건조나물이 아니라 생나물을 삶아 낸 영양밥. 이호리 강문로 252, (031)886-7776 4. ☞ 여주 관광정보 (031)887-2833 ☜
    Premium Chosun ☜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 전문기자 sen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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