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땅의 歷史

왕궁리 유적이 있는 익산 토박이 이상철과 오지나

浮萍草 2015. 11. 11. 09:47
    묻혀 있던 백제 古都, 그들의 땀에 빛이 되었다
    미륵사지·왕궁리 발굴 현장에서 젊은날 다 보내 돈 버는 재미가 호기심으로… 호기심은 사명감으로
    '서동요' 백제 무왕이 마지막 수도 꿈꾸던 곳 김대건 신부 상륙한 나바위 절벽에는 한옥 양식 성당도
    상철과 오지나. 신라 향가 '서동요(薯童謠)'의 실체를 밝혀낸 그래서 우리 역사에 살을 보태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 중 두 명이다. 이상철은 일흔아홉 살이고 오지나는 마흔두 살이다. 두 사람 모두 인생 절반을 발굴터에서 보냈다. 금마면 농사꾼 이상철은 나이 쉰 되던 1986년 6월 20일 미륵사지 발굴팀 인부로 합류했다. 허허벌판 흙 걷어내고 돌 골라 백제 마지막을 밝히며 살았다. 여고를 졸업한 1991년 8월 5일 황등면에 살던 오지나는 줄무늬 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입고 남색 점 박힌 지갑을 들고서 미륵사지 발굴팀 사무실로 출근했다. 커피 나르던 소녀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유적지 도면을 그리고 탁본을 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젊고 어린 날 씨름판을 벌이고 소풍을 갔던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지에서 두 사람은 늙어간다. 그 유적지들은 지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세계문화유산 익산 백제
    지난 7월 부여, 공주 백제 유적과 함께 전북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됐다. 그런데 익산은 아팠다.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 이리역 폭발 사고로 도시 하나가 폐허가 됐다. 이후 이름 자체를 이리에서 익산으로 바꿀 정도로 아팠다. 경제적인 발전은 더뎠다. 낮은 산들로 에워싸인 농토(農土)는 농토로 남았다. 이제 그 농토와 얕은 구릉들은 역사를 은닉하고 있는 보물단지가 되었다.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 발굴 현장에서 반평생을 보낸 이상철(왼쪽)과 오지나.

    김대건 신부는 알지만 170년 전 신부가 된 김대건이 조선 땅에 첫발을 디딘 곳이 익산임은 잘 모른다. 김대건이 올라온 금강변 나바위 절벽에는 나바위성당(사적 318호)이 서 있다. 서울 명동성당을 마무리한 신부 프와넬이 설계를 했고 양식은 전통 한옥을 차용했으며 공사는 중국인들이 했다. 두동리에는 두동교회가 있다. 남자와 여자 신도들 공간을 분리해 남녀칠세부동석을 주장하는 주민들을 전도한 진귀한 건물이다. 무엇보다 신라 향가 '서동요'의 주인공 백제 무왕이 익산에서 나고 죽었다. 서동요는 무왕이 소년 시절에 신라 서울에 들어가 선화공주를 얻으려고 불렀다는 노래다. 익산에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묻혔다는 쌍릉이 있다. 모두 가볼 만한 풍광이며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농부 이상철과 미륵사지
    처음 3인 1조로 리어카를 끌고 미륵사지 현장에 들어갔을 때 그렇게 중요한 줄 몰랐다. 산에서 내려온 모래가 가득한 계곡 초입 너른 터 그곳에서 이상철은 무너진 탑 속에서 낮잠을 잤고 씨름판이 벌어지면 마을 우승에 한몫을 하곤 했다. 그런데 학예연구사 지시에 흙을 걷어내고 보니 온통 절터였다. 반쯤 허물어진 서탑 반대편에 탑이 또 하나 나왔고 그 가운데 아주 큰 목탑 터가 나왔다. 나이 어린 학자들과 낫 들고 싸우려 드는 인부들을 달래며 터를 파냈다. 커다란 당간지주 앞에서 정밀 가공한 서탑 기단이 나왔을 때는 딴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당받는 재미는 호기심이 되더니 사명감으로 변했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에 여명이 밝았다. 백제 무왕은 이곳에 왕궁을 지으며 왕국 부활을 꿈꿨다. 텅빈 궁터에 서면 찬란했던 백제 왕국이 느껴진다. 지난 7월 왕궁리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됐다. /박종인 기자
    발굴 개시일인 7월 7일이면 삽이랑 괭이랑 호미 걸고 윷 놀고 막걸리 먹으며 놀았다. 징그럽던 뱀들은 잡아서 뱀술을 담가 발굴단 사무실 신축할 때 묻었다. 1997년 발굴 종료 후 사무실 철거하고 보니 누군가가 캐가고 없었다. 이듬해 이상철은 왕궁리로 일터를 옮겼다. ▶▶작은집 왕궁리
    발굴팀은 미륵사지를'큰집'이라고 불렀고 왕궁리는'작은집'이라고 불렀다. 오층석탑 하나 서 있는 작은집 야산을 작업반장 이상철과 인부들이 깎아내렸다. 젊고 똑똑한 학자들은 그 터를 살펴 백제를 캐 올렸다. 석탑 주변 절터 아래에 건물터가 나왔고 유물이 쏟아졌다. 사용도 제대로 못한 화장실이 나왔고 불에 그슬린 부엌터가 나왔다. 1965년 석탑을 해체했을 때 아래쪽에서 통일신라 금동불이 나오자 사람들은 왕궁리를 신라 것으로 알았다. 석탑 기단은 신라요, 그 위는 백제 양식이었다. 그런데 2009년 미륵사지 서탑에서 또 다른 왕궁리 유물인 사리장엄과 쌍둥이 같은 사리장엄이 발굴된 것이다. 백제? 통일신라? 미궁(迷宮) 같았다.
    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전용호(43)가 말했다. "후백제를 만든 견훤이 왕궁터에 탑을 세우며 원래 있던 목탑 속 사리장엄을 넣은 게 아닐까." 전용호는 올해 세상을 놀라게 한 부엌터를 발굴한 현장 반장이다. 정원터가 나왔을 때 이상철은 확신했다. '동산 너머에 뭔가 또 있다'고. 과연 어지러운 수로 주변에 정원석이 배치된 후원(後苑)이 나왔다. 일흔여섯 살 된 2012년 크리스마스 무렵 이상철은 은퇴했다. 미륵사지 뱀술로 몸보신 못 해서 섭섭했었고 기자회견 때 끼지 못하고 뒤편에서 서성대며 또 섭섭했다. 그러나 "성과가 나오면 다 가족처럼 기뻐했고, 내 고장 일을 내가 했으니 행복했다"고 했다. ▶▶왕궁리와 여고생 오지나
    첫날 오지나는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큰집' 사무실 앞에서 좌절했다. 미니스커트 입고 다니다가 혼이 나기도 했다.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서 남정네들 사이에 끼어 일을 했다. 커피 타고 문서 수발하고, 탑에 유락객들이 올라가면 스피커로 목청 높여 쫓아내면서 오지나도 전문가로 진화해갔다.
    트레이싱 페이퍼에 그리던 유적지 지도는 일러스트로, 캐드로, 3D 프로그램으로 독학해 그리게 되었다. 탁본 또한 그녀가 책임을 맡았다. 오지나가 말했다. "백제가 우리 가족 먹여 살린다"고. 오지나는 간식을 안기며 구애를 펼친 연구원과 결혼했다. 왕궁리에서 예쁜 뱀 꿈을 꾸고 아들을 낳았다. 나이 열아홉에 뛰어든 발굴터에서 딸 하나 아들 둘 얻고 남편도 얻었다. 그런데 오지나는 아쉬운 게 많다. 정규직 시켜준다고 했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 매년 석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람은 변했는데 풍경도 자세도 표정도 매년 똑같다. 유적만 아니라 기념사진만 아니라, 사람들 희로애락과 일하는 모습까지 다 기록을 남겨놓을 걸. 그 기록이 없어서 이렇게 학자들이 머리를 싸매며 역사를 추리해내느라 죽을 고생을 하고 있지 않은가. ▶▶미스터리의 왕도(王都) 익산
    이상철, 오지나처럼 부여문화재연구소 기사 전창기는 평생을 '큰집과 작은집'에서 일했다.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 익산 유적에 관해 책을 펴내고 답사단체들을 안내하는 전문가다. 그가 그린 도면은 선이 하도 가늘어 인쇄소에서 접수를 거부할 정도였다. 그가 말했다. "진흥왕에게 빼앗긴 영토 회복과 국력 부활을 꿈꾸던 무왕이 부여에서 신라에 가까운 고향 익산으로 천도를 계획했으리라. 선화공주는 이 지역 토착세력 딸이었을 거고. 왕궁은 아들 의자왕 대에 완성됐지만 천도도 하기 전에 나라가 사라졌다. 소박한 줄 알았던 백제 문화가 7세기에 이렇게 찬란한 문화로 급변했다. 그 찬란한 중흥기가 너무 짧아서 아쉽다." 그렇다. 왕궁리 서쪽에 있는 제석사지(이 또한 풍경이 신비롭고 적막하다), 왕궁리, 그리고 미륵사지 규모와 유물을 보면 소박한 백제가 아니다. 미륵사지는 절터 규모가 위압적일 정도로 거대하다. 유물전시관 전시품들은 작은 사리함 하나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방대하고 현란하다. 발굴이 진행 중인 왕궁리는 일출, 일몰, 그리고 심야에 가보면 안다. 석탑 위로 별이 쏟아지면 1400년 전 왕국 부활을 꿈꾸다 죽은 무왕의 아쉬움 그리고 꽃 피우지도 못한 백제 왕국의 영화가 자동적으로 상상이 된다. 유적지에서 평생을 보낸 이상철과 오지나와 전창기와 젊은 학자 전용호 같은 이 덕택에 우리는 그 미스터리를 추적하며 길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오래도록 '솜리'라 불렸던 전라북도 익산 사람들, 백제 이야기였다. ㆍ가볼 곳(내비게이션 검색어도 동일)
    두동리에 있는 두동교회. 남녀 신도가 서로를 보지 못하도록‘ㄱ’자로 설계됐다.
    1.두동교회 남녀 공간을 분리한 초기 교회 건축양식. 2.나바위성당 김대건 신부가 상륙한 절벽에 있는 성당. 산책코스도 좋다. ☞ 나바위성당 ☜ 3.무왕릉 백제 무왕과 왕비인 선화공주 무덤으로 추정되는 쌍릉. 4.고도리 입석 작은 개천을 사이에 두고 200여m 떨어져 있는 남녀 석상 한쌍. 5.제석사지 왕궁리 유적과 동시대 추정 절터. 맛집 황등 비빔밥 황등면 황등시장에 있는 밥집. '백선생'이 비빔밥 3대 천황으로 꼽은 밥집이다. 뜨거운 물로 데쳐낸 밥에 각종 양념을 버무리고 육회를 올려서 선짓국과 함께 낸다. 줄이 길다. 점심 때만 운영. 7000원. 정식 이름은 시장비빔밥. (063)858-6051 각종 정보 미륵사지 www.mireuk saji.org, 왕궁리 유적 wg.iksan.go.kr 익산 관광정보 iksan.gojb.net, 전화 1577-0072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 전문기자 sen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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