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32 김정희와 초의선사와 대흥사

浮萍草 2015. 11. 14. 16:29
    채제공, 7살 추사가 쓴 입춘대길 문구를 보고…
     
    ▲ (左) 추사고택의 입구▲ (右)추사 고택에 있는 문에 세월의 더깨가 보인다. 한편의 정물화같다
    남 해남에 대흥사(大興寺)라는 절이 있습니다. 제가 땅끝마을 해남의 이 고찰로 온 것은 충남 예산 추사고택(秋史古宅)을 본 뒤입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와 초의선사(艸衣禪師·1786~1866)의 흔적을 찾아 그곳까지 갔지요. 앞서 오지호 화백 기사에서 잠시 밝혔듯 김정희는 조선 후기 우리 문화의 거대한 봉우리입니다.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그는 교우관계 또한 폭넓습니다. 워낙 다재다능하기에 그의 일대기를 수록한 책자들이 많이 있지만 몇몇 대목을 짚어보려 합니다. 충남의 추사고택은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입니다. 양지 바른 곳에 단정하게 보존돼있는 이 집은 사랑채와 안채가 나눠져 있는데 이것은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 가문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추사고택의 안채다.

    원래 이 집은 남에게 넘어갔었습니다. 그런데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복원을 지시해 지금처럼 우리들에게 추사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지요. 원형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는데 그래도 옛집의 소박한 운치는 남아있습니다. 관리도 철저히 되는 듯 마감시간이면 어김없이 관리직원들이 나타납니다. 추사고택의 사랑채는 기역자(ㄱ) 형이며 가운데로 난 문을 열면 방이 하나로 이어져있습니다
    추사고택 앞의 사랑채이다. 단을 쌓아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구조이다.

    이에 비해 안채는 미음자(ㅁ) 구조로 안으로 들어서면 육간대청이 보이고 양옆으로 안방과 부엌이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안사랑과 작은 부엌도 있습니다. 추사고택의 기둥에는 추사의 글씨가 많습니다. 하나같이 교훈을 주는 말들이어서 집을 한바퀴 살펴본 뒤 글씨의 뜻을 되새기는 것도 뜻있는 여행이 될 듯 합니다. 이 집은 원래 한양에서 나라의 건물을 짓던 목수를 불러 만들었다고 하지요. 무슨 뜻일까요?
    추사 고택 앞에 있는 추사의 글씨체다. 우리나라 서예의 최고 경지를 추사는 보여줬다

    추사가 명문대가의 자제였다는 뜻입니다. 추사는 1786년 6월3일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김노경입니다. 김노경은 월성위 김한신의 손자(추사의 증조부)인데 월성위 김한신은 영조의 부마였지요. 김한신의 아내가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였던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도세자의 형으로, 어렸을 적 죽은 첫아들 효장세자를 낳은 정빈 이씨의 딸이었지요. 그의 천재성을 보여준 일화가 여섯살 때 월성위 궁에 붙인 입춘첩입니다. 입춘첩이란 입춘 때 대문에 붙이는 ‘건양다경’ ‘입춘대길’같은 글을 말합니다. 어린 김정희의 글을 본 박제가는“이 어린아이가 훗날 학예로 이름을 드날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해인 김정희가 7살 때는 당대의 명재상 채제공이 역시 입춘첩을 보고“글씨로 이름을 날릴만큼 명필(名筆)”이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낭중지추였지요. 추사는 당대의 학자 박제가에게 사사했으며 스물네살 때인 1809년 생원시에서 일등으로 합격한 뒤 동지겸사은사부사로 북경에 간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수행 합니다. 자제군관이란 직책을 얻었는데 중국에서 추사는 거유(巨儒)들을 만납니다. 당시 47세인 완원, 78세인 옹방강을 찾아 사제의(師弟義)를 맺고 주학년(朱鶴年)·이정원(李鼎元)·조강(曹江)·서송(徐松)·옹수배(翁樹培)· 옹수곤(翁樹崑)·사학숭 (謝學崇) 등과 친교를 맺지요. 훗날 옹방강과는 편지를 통해 지도를 받는 사이가 됩니다.
    추사 고택의 안채에 있는 문 사이로 또다른 문이 보인다.

    추사에게 중국행은 성리학뿐 아니라 차(茶)를 접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청나라의 고매한 선비들은 차를 즐겼는데 이 문화를 접한 추사도 차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차 문화가 그리 성행하지는 못했다고 하지요. 특히 옹방강은 청나라에서 금석학(金石學)의 대가로 정평이 난 인물인데 김정희를 만난 후“경술문장해동제일(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린 추사에게 귀중한 자료도 잔뜩 선물했습니다. 석묵서루(石墨書樓)라는 곳에 소장된 장서와 고탁본 자료를 추사에게 보내줘 추사의 안목을 한꺼번에 넓힌 것입니다. 옹방강은 불교에도 심취한 인물이었는데 이것은 훗날 추사가 불교에 대해 편견을 갖지않도록한 배경이 되겠지요.
    추사 고택의 전경이다. 선비 집안다운 정갈한 모습이 엿보인다.

    완원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옹방강과 함께 청을 대표하는 학자였는데 추사가 찾아오자 태화쌍비관이라는 거처에서 ‘용봉승설’이라는 명차를 대접했습니다. 추사는 ‘승설도인’이라는 호도 썼는데 이때 맛본 용봉승설의 맛을 잊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草浮
    印萍

    정약용을 계기로 초의선사와 금란지교를 맺은 추사
    사가 서른살 되던 1815년 그는 동갑 초의선사와 금난지교(金蘭之交)같은 관계를 맺습니다. 
    초의선사에 대해 알아보고 갑니다. 1786년(정조 10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초의선사의 속성은 장씨로 15살 때 큰 위기를 맞습니다. 
    강변에서 놀다 그만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 했는데 마침 지나가던 스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이지요. 
    스님은 장씨 소년에게 출가를 권했고 소년은 1년 뒤인 16세 때 남평 운흥사에서 민성스님을 스승으로 삼아 스님의 삶을 시작합니다.
    초의선사는 19살 때 영암 월출산에서 득도를 했다고 하지요.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뒤부터는 전국을 돌며 선지식을 키웠습니다. 
    마침내 대흥사의 13대 대종사가 됐는데 대종사는 한마디로 불가의 큰어른을 말합니다. 
    초의선사의 관심분야는 매우 폭이 넓었다고 합니다. 
    한낱 학승(學僧)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가 추사를 알게된 것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아들 정학연의 소개 때문이라고 합니다. 
    강진에서 17년간 귀양살이한 다산을 아들 정학연은 자주 찾아뵈었지요. 
    그때 정학연은 대흥사의 초의선사를 알게됐고 그의 지식에 감동한 나머지“한양에 올라가면 여러 명사들을 소개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어느날 초의선사가 한양으로 와 정학연을 만나자,정학연은 어렸을 적부터 재주를 보인 추사를 불렀다는 겁니다.
    해남 대흥사에 있는 추사의 글씨다. 원래 대웅전에 걸어놨으나 유배가 끝난 후 다시 이광사의 현판으로 바꿨다

    물론 두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설(異說)도 있습니다. 초의선사가 한때 수락산 학림암에서 해붕선사를 모시고 있을 때 추사가 해붕선사를 찾아왔고 이때 초의선사 와도 인사를 했다는 것입니다만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여기서 ‘문갑식의 기인이사’ 16편에 썼던 ‘정약용과 유일-혜장-초의선사’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산은 기나긴 강진에서의 유배기간동안 유일-혜장스님이라는 당대의 고승들과 교유했고 김정희와 초의선사는 이 정약용을 매개로 만나게된 것입니다. 추사와 초의선사의 관계는 잘 규명돼 있는데 여기서는 추사가 마흔살 때 제주도로 유배당하면서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는 것으로 둘의 관계를 보여 주고자 합니다. 외로운 유배시절, 추사가 초의선사가 보내준 차로 시름을 달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햇차를 몇 편이나 만들었습니까. 잘 보관하였다가 내게도 보내주시겠지요. 자흔과 향훈스님들이 만든 차도 빠른 인편에 부쳐 주십시오. 혹 스님 한 분을 정해 (그에게 차를) 보내신다 해도 불가한 일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세신도 편안한가요. 늘 염려됩니다. 단오절 부채(節萐)를 보내니 나누어 곁에 두세요.”
    “갑자기 돌아오는 인편으로부터 편지와 차포를 받았습니다. 차 향기를 맡으니 곧 눈이 떠지는 것만 같습니다. 편지의 유무(有無)는 원래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나는 차를 마시지 못해 병이 났습니다. 지금 다시 차를 보고 나아졌으니 우스운 일입니다.”
    추사 고택은 한양에서 궁궐을 짓던 목수를 데려와 지은 것이다.

    여기서 ‘편지의 유무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말은 뭘까요? 추사는 편지를 즐겨썼지만 초의선사는 답장을 잘 안보냈다고 하는군요. 아마 그것을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한가지 주목할 부분은 ‘인편으로부터 편지와 차포를 받았다’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인편(人便)은 차 배달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소치 허련이 바로 초의선사의 분부를 받고 추사에게 차를 심부름하는 역할을 자주 맡았지요. 그렇다면 소치 허련은 무슨 연유로 초의선사와 인연을 맺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09년 태어난 허련은 교산 허균의 집안이었다고 하지요. 허균의 후예중 진도에 정착한 이가 허대(許岱)인데 그는 임해군의 처조카였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임해군이 역모죄로 몰려 진도로 귀양오자 수행한 허대가 아예 눌러앉은 것입니다. 진도라는 당시로는 외딴 섬에서 그림을 그리던 허련의 정열을 맨처음 알아본 이는 숙부였다고 하지요. 그는“내 조카는 반드시 그림으로 일가(一家)를 이룰 것”이라며 어렵게 오륜행실도를 구해줬고 허련은 그것은 모방하며 실력을 키웠다고 합니다.
    추사 고택에서는 주련에 걸린 글귀만 봐도 한나절이 지나간다.

    호남 화단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공재 윤두서 선생의 자화상이다.
    허련이 초의선사를 알게된 것은 1835년 무렵입니다. 초의선사는‘호남팔고(湖南八高)’라고 칭송받았는데 ‘다산도(茶山圖)’ ‘백운동도(白雲洞圖)’같은 그림을 보면 초의선사가 불법뿐 아니라 시서화에도 조예가 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초의선사는 허련에게 단비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가 남긴 ‘몽연록(夢緣錄)’이라는 책을 보면 허련이 얼마나 초의선사에게 감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초의선사는 나를 따뜻하게 대접해 주었고 방을 빌려주며 거처하도록 해 주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지요. 허련의 재주를 알아본 초의선사는 대흥사 한산전에 머물며 불화를 가르치는 한편 녹우당의 해남 윤씨 에게 부탁해 허련이 공재 윤두서 선생의 그림을 열람하도록 했습니다. 이 모든게 허련을 위한 배려였지요. 허련은“공재 선생의 그림을 열람한 뒤 수일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초의선사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다산의 문하에서 해남 윤씨 후손인 윤종민, 윤종영, 윤종심, 윤종삼 등과 동문수학했기 때문이지요. 다시 ‘몽연록’을 살펴볼까요? “아주 어릴 적에 초의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멀리 돌아다닐 생각을 하였으며 지금까지 이처럼 홀로 담담하고 고요하게 살았겠는가. 선사와 수년을 왕래하다 보니 기질과 취미가 동일하여 노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초의선사는 이제 허련을 추사에게 소개합니다. 1838년 8월무렵 금강산 유람을 떠난 초의선사는 허련의 그림을 추사에게 보여주지요 허련의 그림을 본 추사는 대번에“압록강 이동에 소치만한 화가가 없다”고 격찬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허군의 그림 격조는 거듭 볼수록 더욱 묘해 이미 격을 이루었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보고 들은 것이 좁아 그 좋은 솜씨를 마음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있으니 빨리 한양으로 올라와 안목을 넓히는 것이 어떨지요?” 자기 문하로 들어오라는 거지요. 초의선사는 이 소식을 허련에게 전했고 기별을 받은 허련은 이십일을 걸어 추사를 만납니다. 소치는 당시를 “초의선사가 전하는 편지를 올리고 곧 추사선생에게 인사를 드렸다. 처음 만나는 자리 였지만 마치 옛날부터 서로 아는 것처럼 느꼈다. 추사 선생의 위대한 덕화가 사람을 감싸는 듯했다”고 기억하고 있지요.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草浮
    印萍

    호국도량 대흥사에서 추사가 대노했던 사연
    사와 소치의 사제관계는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면서 끝나지만 소치는 제주도로 스승을 찾아갈 정도였습니다. 
    이후 소치의 그림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성장했는데 다산의 아들 정학연은 다음과 같은 시로 그를 평가하고있습니다.
    “마음 속에 한폭의 산수를 채비하여 늘 밝은 정신을 품어 세속을 초월하는 풍취가 있은 다음에야 붓을 들어 삼매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 경지는 소치 한 사람
    뿐이다(心窩裏準備一副邱壑 神明中常蘊 傲世絶俗之姿然後 落筆便入三昧 此世界小癡一人而已).”
    이 소치가 후손에 남긴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붓 재주 하나로 성가(成家)할 생각을 말라, 
    둘째 먹을 항상 입에 달고 다녀라, 
    셋째 인연의 소중함을 잊지말라, 
    넷째 나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근면·성실·겸손의 정신이 배어있지요. 
    소치의 가문은 이후 5대에 걸쳐 13명의 화가를 낳으니 한국 동양화의 산맥이라 하겠습니다. 
    소치를 비롯해 2대 미산(米山) 허형(許瀅),3대 남농(南農) 허건(許楗),임인(林人) 허림(許林),4대 임전 허문(林田許文),5대는 허진 전남대교수로 이어집니다.
    어떻습니까, 이러고 보니 사도세자와 정조가 이어지고 정조 시대의 다산 정약용과 연담 유일스님-혜장스님이 연결되며 다시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와 소치 
    허련이 맺어지지않습니까? 
    우리의 역사는,문화사는 이렇게 알고보면 면면히 이어지고있는 것입니다.
    해남 대흥사 13대 대강사 초의선사의 동상이다.

    이제 당대의 거장들이 교유했던 무대 해남 대흥사를 알아봅니다. 대흥사의 창건연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통일신라 말로 추정되며 사찰 스스로는 백제 구이신왕 때인 426년 신라의 정관존자(淨觀尊者)라는 분이 창건 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지요. 하지만 정관존자에 대해서는 생애나 활동 상황이 미상입니다.
    해남 대흥사는 호국의 명찰이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왜군과 맞서싸운 승병장들을 기리는 곳이다.

    조계종 22교구 본사인 대흥사는 근대까지만 해도 대흥사-대둔사로 불렸는데 지금은 대흥사로 통일됐습니다. 이 사찰은 풍담스님부터 초의선사까지 13대 대종사(大宗師)를 배출했으며 만화스님부터 범해스님까지 13대 대강사(大講師)를 낳았습니다. 이곳이 유명한 것은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이라는 명성 못지않게 나라를 지킨 호국도량이가 때문입니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이곳을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로 만년동안 훼손되지않을 땅”이라고 했습니다.
    해남 대흥사에 있는 서산대사의 영정이다.

    그런 이곳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의 총본부가 됐으며 지금도 절 안에 있는 표충사라는 사당에는 서산대사-사명대사-처영스님 같은 승병 지도부의 영정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 유서깊은 대흥사는 볼 것도 많지만 현판을 빼놓아서는 안됩니다.
    해남 대흥사에 있는 사명당 대사의 영정이다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가던 길에 대흥사에 들렀지요. 이때 대웅전 현판을 보고 마음에 들지않아‘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글씨를 써 달게 했습니다. 문제는 추사가 내려버린 대웅전 글씨가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해남 대흥사 침계루라는 글씨는 원교 이광사의 작품이다.

    더욱이 추사는 친구인 초의선사에게 이렇게 호통까지 쳤습니다.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인데 어찌 안다는 사람(초의선사)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달아놓을 수가 있는 것인가?” 추사의 극성에 초의선사는 현판을 떼버렸습니다. 원교는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 특유의 서체인 동국진체를 완성한 인물로 유명하지요. 그런 이광사의 글을 폄하한 추사의 자존심도 대단했지만 7년3개월간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한양으로 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내게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현판은 어디 있는가? 내 글씨를 떼고 그것을 다시 달아주게. 내가 그때는 잘못 보았어.” 이것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 하루아침에 사형을 당할 뻔한 위기를 맞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추사가 제주도라는 절해고도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봤다는 증거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해남 대흥사의 명물 연리지다. 두나무의 뿌리가 얽혀있다.

    참고로 이광사 역시 추사처럼 전남 완도 옆 신지도라는 섬에서 23년이나 유배생활을 하지요 큰아버지가 반(反) 영조의 진영에 섰던게 화근이었고 훗날에 자신도 천주교도들의 나주 벽서사건에 연루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전남의 절에는 원교의 글씨가 제법 남아있습니다. 대흥사의 대웅보전 외에도 침계루-천불전-해탈문이 그의 작품이고 지리산 천은사 극락보전-일주문-명부전의 글씨도 그의 것이지요. 그의 아들이 훗날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입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