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30 일두 정여창과 함양

浮萍草 2015. 10. 27. 06:00
    동방오현 중 하나로 불린 일두 정여창
    남 함양(咸陽)은 이름이 남다릅니다. 
    중국 서안(西安)에서 서북쪽으로 25㎞ 떨어진 곳에 함양과 한자가 같은 고도(古都)가 있습니다. 
    중국 첫 통일국가 진(秦)의 수도였지요.진시황이 살던 곳인데 우리 함양은 예부터 ‘좌안동 우함양’으로 불렸습니다. 
    흔히 뼈대있는 고장을 말할 때 ‘좌안동 우함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낙동강 동쪽 안동(安東)과 낙동강 서쪽 함양에서 훌륭한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뜻입니다. 
    함양의 대표 인물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선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게 ‘일두’라는 호(號)입니다. 
    풀이하자면 ‘한마리 좀벌레’라는 뜻인데 얼마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평생을 살아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일두 정선생에 대해 조선의 쟁쟁한 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습니다.
    함양의 정자의 고장이다. 대표적인 정자 거연정 뒤로 무주산 자락이 보인다.

    “남계(藍溪)서원에 이르서 재숙하고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서 사당에 배알하였다.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 현인들 가운데 오직 이분만이 거의 흠이 없는 분일 것이다.” 이것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선생이 남긴 말입니다. “일찍이 선정(先正) 정공(鄭公) 휘 여창(汝昌)선생의 풍도를 들었지만 상세한 것을 알지 못해 참으로 부끄럽고 허전합니다. 그 저술과 행장을 갖고 계신다면 잠시 빌려 읽게 하여 무지하고 답답한 제 심정을 풀 수 있게 해주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이것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 남긴 말입니다. 퇴계 선생이야 익히 알려졌지만 의롭지 못한 몸가짐을 할까 두려워 잘 때도 날이 시퍼런 검을 차고 있었다는 남명 선생이 이 같은 평가를 남긴 것을 보면 일두 선생의 ‘그릇’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여창 선생은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꼽히고있습니다. 동방오현은 우리나라가 배출한 다섯 뛰어난 현인을 말하는데 성균관(成均館) 대성전(大聖殿)에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일두 선생 외에 네분의 선비들을 보면 다 대표적인 유학자들입니다. 사옹(蓑翁) 김굉필(金宏弼·1454~1504),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선생 입니다. 중요한 것이 김굉필-정여창이 김종직(金宗直·1431~1492)선생의 제자라는 점입니다.
    함양 거연정으로 가는 다리엔 찌를 드리운 낚시꾼들이 많다

    제가 앞서 조광조 선생 편에서 잠시 언급했듯 우리 성리학의 뿌리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지만 조선조에선 김종직이라는 거대한 인물에게서 대부분의 학맥(學脈)이 발원하며 사화(士禍) 역시 ‘김종직’이라는 이름을 제외하면 설명할 길이 없게 됩니다. 일두선생의 삶을 살펴봅니다. 선생은 본관이 경남 하동인데 증조부 정지 대(代)에 처가 고향인 함양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1450년 음력 5월5일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정육을(鄭六乙),어머니는 경주 최씨였습니다. 할아버지 정복주는 세조 때 재상 정인지와 팔촌지간인데 아버지 정육을이 일두가 8살일 때 의주판관(義州判官)으로 부임했을 때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 사신 장녕(張寧)을 만났는데 그가 일두의 비범함을 알아본 것이지요. 장녕은 어릴적 이름이 백욱(佰勖)이었던 일두를 본 뒤 “커서 집을 크게 번창하게 할 것이니 이름을 여창(汝昌)이라 하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가 18살 때 아버지 정육을은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병마우후(兵馬虞候)로 출전했다가 전사합니다. 이때 일두는 한달간 전쟁터를 돌며 끝내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합니다. 세조는 일두를 가상히 여겨 아버지의 직책(의주판관)을 제수했지만 일두는 고사했습니다. 일두의 아버지는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의 녹훈을 받습니다. 어머니 밑에서 홀로 독서하던 일두는 함양군수 김종직 문하(門下)로 들어가지요. 이때 함께 동문수학하던 친구가 김굉필입니다. 이들은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하는 ‘경명수행(經明修行)’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때의 친구가 김굉필 외에 송석충-정광필이며 사화의 빌미가 된 김일손도 있었지요. 여러번 벼슬길에 천거됐지만 사양하던 일두는 성종 21년(1490) 과거에 급제합니다. 일두는 동궁(東宮)이던 연산군을 보필했지만 대쪽 같은 일두와 성격이 맞을리 없지요.
    일두고택 입구에 서면 그야말로 조선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간듯한 착각에 빠진다.

    훗날 연산군은 사화가 일어나자 자기 스승이었던 일두의 목숨을 빼앗았으니 기이한 인연입니다. 이런 저런 벼슬을 지내던 일두는 1498년 친구인 김일손의 사초(史草)로 시작된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에 유배됩니다. 유배지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마하던 그는 1504년 종성에서 병을 얻어 사망합니다. 여기서 ‘무오사화’를 짚어보고 갑니다. 무오사화는 당시 대립하던 훈구(勳舊)대신들과 신진사림의 세력 다툼에서 어처구니없게 일어났습니다. 발단은 신진사람파로 사간원에서 일하던 김일손(金馹孫)이 중신인 이극돈을 가축인 소(牛)에 비유하며 깔보는 글을 쓰면서 시작되지요. 이극돈은 지금으로 치면 중도보수인사로 비교적 당파성이 약했는데 자신을 젊은 김일손이 소에 빗대자 분노합니다. 그래서 김일손이 썼던 사초를 들여다보니 ‘성종실록’에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 때의 일이 들어가있고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김일손이 수록 하려했다는걸 알게되지요. 뭔가 증거를 찾으려는 이들에게 이것은 큰 수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런 이극돈에게 희대의 간신 유자광이 가세해 연산군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연산군은 가뜩이나 신진사림들과 신경전을 펴왔기에 이 기회를 빌어 신진사림을 정리하려하지요. 이렇게 해서 한 문장에서 시작된 갈등이 대규모 숙청과 처형이라는 대참사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은 ‘의제(義帝)에게 조의(弔意)를 표하는 글(文)’이라는 뜻입니다. 이 의제란 초한지의 주인공가운데 한명인 항우(項羽)가 회왕,즉 훗날 의제를 살해해 물에 던지면서 비극적인 삶을 마치는 인물입니다. 이 글이 문제가 된 이유를 여러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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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그림 연상시키는 개평마을 고택들
    떻습니까, 
    마치 세조(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살해해 묻지도 못하게 강원도 영월 청령포 앞 강물에 던진 것이 연상되지않습니까? 
    그렇다면 세조의 후손들인 예종-성종-연산군은 모조리 정통성이 부인되니 그야말로 역모 중의 역모가 되는 겁니다.
    글의 위력은 이렇게 무섭지요. 
    귀양지인 종성에서 사망한 일두의 시신은 친구와 제자들에 의해 두달만에 함양 남계서원 뒤 승안산 기슭에 안장됐는데 그후 그는 고려 대의 백이정-안향→이제현
    →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으로 이어지는 유학의 적통(適統)으로 숭상받게 됩니다.
    그의 학풍에 대해서는 유학에 문외한인 제가 논했다가는 웃음거리가 될 것만 같아 생략합니다. 
    다만 친구 김굉필과 함께 일두는 이렇게 비교됐다고 합니다. 
    “한훤(寒暄·김굉필)은 이(理)에 밝고 일두(一蠹·정여창)는 수(數)에 밝다.” 
    또 그는 평생 시를 딱 한 수만 남겼습니다. 
    두류산(頭流山),즉 지리산에 터를 골라 집을 지을 때 지은 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람에 부들이 휘날리어 가볍고 부드럽게 희롱하는데
    (風蒲獵獵弄輕柔)
    사월에 화개에는 보리가 벌써 가을일세
    (四月花開麥已秋)
    두류산 천만 골짜기 다 구경하고서
    (觀盡頭流千萬疊)
    조각배로 또다시 큰 강 흐름에 내려가네
    (扁舟又下大江流)’
    여기서 나오는 화개는 지금의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인 화개장터를 말하는 것이고 큰강 흐름이란 섬진강을 말하는 듯 합니다. 부들은 습지에서 자라는 식물로 주로 억새-갈대와 비유되는데 마치 요즘 같은 가을날의 한 서정(抒情)을 보는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펼쳐지는 일두고택. 오른편의 소나무가 불의에 굴하지않는 선비의 기상을 보여준다.

    개명마을에는 고색창연한 기와지붕을 이고있는 고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마치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합니다. 일두고택 외에도 하동 정씨, 풍천 노씨, 초계 정씨 3개의 가문이 종택이 있습니다.
    일두 고택에서 상징적인 건물이 이 탁청재다. 마음을 맑게 닦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이 고택 사이에 있는 길들이 자동차 두대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꽤 넓고 바닥에는 커다랗고 평평한 돌들이 깔려있습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분에게 여쭈니 그가 바로 일두의 후손 가운데 한분이었지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두 고택으로 들어가기 전 담장에 봉숭아가 피어있다. 그야말로 울밑에 선 봉선화다.

    일두고택의 소나무를 뒷쪽에서 본 모습이다. 이 고택에선 한옥체험도 할 수 있다.

    일두 선생의 할아버지께서(증조부 정지 선생을 말하는 듯 합니다) 서울의 명동과 이곳의 풍수를 봤습니다. 명동은 돈은 많이 벌 수 있는 곳이지만 큰 인물이 나기 어렵고 함양 개평마을은 돈도 많이 벌고 큰 학자도 나오는 곳이라 이곳에 터전을 잡게된 겁니다.”
    일두 고택의 문고리다. 이것이야말로 한국미의 정수다

    실제로 이 마을에는 부자가 많아 물건을 운반하는 말이나 마차의 통행이 많았습니다. 만일 흙길 그대로였다면 비오는 날이나 장마철에 진흙밭이 될 텐데 바닥에 깔아놓은 돌 때문에 수월하게 말과 마차가 지나다닐 수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그럴듯하지요? 마치 런던의 오래된 거리에 마차가 지나다닐 수 있게 포도(鋪道)를 해놓은 것보다 더 운치있습니다. 그분에 따르면 안동 하회마을-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언젠가 정부에서 이곳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려 했으나 개평마을에서 고사했다고 합니다. 세계유산이 되면 좋은 점도 많겠지만 관광객들로 전통 가옥이 훼손될 것을 우려했다고합니다. 개평마을 앞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고있는데 바로 이곳을 경계로 옛날 양반과 상민(常民)들이 살던 지역이 갈렸다고 하는데 사실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개천 밖 큰 도로 주변에는 상점도 많지만 개천 안쪽에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개평마을 초입에 일두 고택이 있습니다. 3000평정도의 넓은 집터에는 솟을대문,행랑채,사랑채,안사랑채,중문간채,안채,아랫채,광채,사당 등 총 11개 동의 건물이 들어서있는데 이가운데 사랑채는 18세기에 개축됐다고 하지요.
    일두 고택 사랑채에는'문헌세가'라는 현판이 걸려있다.동방
    오현의 한분으로 꼽힌 정여창선생을 기린 말이다.

    일두 고택의 안채 마당에 방문객들이 앉아 가을의 정취를 즐기고있다.

    일두고택에는 볼 것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대문 위에 걸려있는 정려패(旌閭牌)입니다. 효자가 있는 가문에만 나라에서 하사한다는 정려패가 무려 다섯개나 됩니다. 일두 선생도 천하의 효자로 알려졌는데 그 가풍이 이어졌다는 뜻입니다.
    일두 고택 정문에 걸린 정려패다. 나라에서 효자에게 내리는 정려패가 다섯개나 걸린 집은 이곳뿐이다

    일두고택 맞은 편은 일두선생의 종손이 거주하고있으며 일두고택과 종손 거주지가 맞닿은 골목에 전통주를 파는 곳이 있습니다. 일두 선생의 종부(宗婦)가 집에서 내려오던 전통 그래도 만든 가양주(家釀酒)인데 이름은 ‘솔송주’로 맛이 일품입니다. 일두 선생의 하동 정씨 집안에서는 1년에 쌀 삼백석으로 술과 엿과 식혜를 빚어 손님을 접대하고 임금님께도 진상했다고 합니다. 16대, 530여년간 이어져 내려온 솔송주는 사대부 집안의 전통명주라고 할 수 있는데 돗수가 높은 것이 더 비쌌습니다.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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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종 사극 드라마 무대 되고 볼 거리 많은 일두 고택
    선시대의 빼어난 건축물로 1984년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돼 2013년 문화관광부로부터 ‘명품 고택’으로 선정되기 전부터 일두고택은 유명세를 치렀습니다. 
    1987년 KBS가 방영한 대하드라마 ‘토지(土地)’에서 최참판댁의 무대가 됐지요. 
    2003년에는 MBC 드라마 다모(茶母)에서 어린 채옥의 생가로 등장했습니다. 
    이 고택은 일반인도 투숙할 수 있는데 가장 저렴한 곳이 1박에 10만원선이며 더 넓은 곳은 가격이 올라갑니다. 
    대신 이곳을 관광하려는 분들에게는 입장료를 받지 않습니다.
    함양에는 일두고택을 비롯한 개평마을 종택(宗宅)외에도 볼거리가 많습니다. 
    신라시대 고운(古雲) 최치원선생이 이곳 군수를 지낼 때 만들었다는 숲 ‘상림(上林)’이 꼽히는데 입구쪽에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서울의 시민공원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함양 지곡IC에서 함양 중심부로 가는 26번 국도 주변이 화양동 계곡인데 주변으로 멋진 정자들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맨먼저 나오는 것이 거연정(居然亭)입니다. 
    고려말 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진시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마음을 푸르게 닦는다는 뜻의 탁청재. 우리도 매일같이 이렇게 마음을 닦아야겠다.

    1872년 화림재 선생의 7대손 전재학이 만든 거연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형 누각으로,남덕유산에서 발원해 함양으로 흐르는 개천의 자연암반 위에 세워 졌습니다.
    함양 거연정 옆 개천은 꽤 깊다. 석양이 질 무렵 광경이 한폭의 동양화다

    누우면 ‘자연이 내게 거하고 내가 자연에 거한다’는 거연정의 뜻이 절로 느껴집니다. 거연정에서 보이는 현대식 다리 옆에 군자정(君子亭)이 있습니다.
    군자정은 바위위에 있다. 함양 정자들의 특징은 대부분 강가 자연 암반위에 세웠다는 것이다.

    이 역시 일두 선생과 관련이 깊지요. 정여창 선생의 5대 후손이 지은 것인데 현판에 있는 ‘주부자(朱夫子) 군자정시(君子亭詩)’라는 문구가 눈에 뜨입니다.
    충효절의라는 이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쓴 것이다. 일두 선생을 흠모했던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렸지만 일두의 남계서원에는 손도 대지않았다.

    여기 나오는 주부자란 주자학의 그 주자를 말합니다. 주자는 ‘묵장오영(墨莊五詠)’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셋째,네째 구절에 ‘여러 군자를 서로 만나네(相逢數君子) 나를 위해 염옹을 설명하네(爲我說濂翁)’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염옹은 송(宋)대의 염계 주돈이를 말한다고 하지요. 주돈이는 진흙속에서도 피어나는 연꽃을 너무 아껴 ‘군자’로 표현했는데 일두 선생의 후손이 정자의 이름을 바로 이 시에서 따왔다는 해설입니다. 후손의 선조를 위하는 자부심이 느껴지지요. 거연정과 군자정과 삼각형 모양을 이루는 지점에 영귀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곳은 그리 인상적이지않습니다. 여기서 다시 함양 중심부쪽으로 가면 동호정(東湖亭)이 나오는데 이곳은 조선 선조 때 학자인 동호(東湖) 장만리 선생과 연관이 있습니다.
    동호정 역시 자연암반 위에 세워졌다

    장만리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거연정처럼 중층 누각에 화려한 모습입니다. 동호정 앞에는 해를 가린다는 뜻의‘차일암’이라는 넓은 바위가 있으며 넓은 개천이 흐릅니다. 이 개천이 바로 남강천으로, 남강호를 거쳐 남강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남강천에는 8개의 정자가 있었다고 하며 거연정 외에 농월정이 아름답기로 이름났지만 화재로 소실돼 지난 9월에 복원됐습니다. 저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정자를 보며 그 차이점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는데 여러분도 한번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서울에서 간다면 대전-통영고속도로 지곡IC에서 빠져나와 화양동 계곡의 정자들을 감상하고 개평마을로 들어가 일두고택을 비롯한 여러곳을 보는게 순서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일두고택에서 맞은 편 쪽으로 가까이에 있는 남계서원과 청계서원을 찾을만합니다.
    남계서원의 정문격인 풍영루를 뒷쪽에서 본 것이다. 준도문�라는 글자가 보인다.

    무오사화의 단초가 된 김일손 선생을 모신 청계서원이다.

    남계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2번째 사액서원인데 일두 선생을 모신 곳입니다. 제가 갔을 때는 평지 위에 나지막한 산 위에 붉은 배롱나무꽃이 만발할 때였는데 풍광이 일품이었습니다. 남계서원의 정문은 풍영루(風咏樓)로, 2층으로 된 누각입니다. ‘바람을 읊는다’는 뜻입니다.
    남계서원의 정문 풍영루 뒤로 건물들이 정갈하게 서있다.

    일두선생 사당에서 바라본 남계서원의 모습이다. 앞에 너른 들판을 조망할 수 있다.

    서원의 중앙에 서있는 명성당(明誠堂)은 1559년에 완공됐는데 명성(明誠)이란 중용(中庸)에 나오는 ‘밝으면 성실하다(明則誠)’는 구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명성당 좌우에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습니다. 동재인 양정재(養正齋)이며 서재는 보인재(輔仁齋)입니다. 동재와 서재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으며 그 뒤로는 일두선생의 사당이 있습니다. 남계서원 바로 옆의 청계서원은 무오사화의 발단이 된 김일손 선생을 모시는 서당이지만 규모나 건물의 완성도가 남계서원에 비길바는 못됩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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