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34 백운동 독수정 임대정 명옥헌원림

浮萍草 2015. 12. 19. 11:18
    고려말 충신의 절개를 상징하는 독수정
    홍준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남도 문화 답사의 1번지로 전남 강진을 꼽은 것을 보고 처음엔 의아했습니다. 
    “서울에서 그 먼곳에 무슨 볼 것이 있다는 것일까”하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막상 현장에 여러 차례 가보니 그의 견해에 수긍하게 됐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비밀의 정원을 거닐어볼까 합니다. 
    전남 화순-담양-강진에는 보석(寶石)같은 명소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원림(園林)은 한국적인 미를 보여주는 정원의 정수(精髓)라 할만합니다. 
    그렇다면 왜 원림은 호남에서 발전한 것일까요.
    소쇄원을 봤을 때 그곳에 얽힌 정암 조광조 선생과 학포 양팽손 선생, 양 선생의 일족인 소쇄공 양산보 선생 세 부자(父子)가 얽힌 소쇄원 건설 과정을 흥미롭게 
    취재한 바 있습니다.
    호남의 3대 원림으로 꼽히는 소쇄원의 풍경이 그림같다.

    그러면서 그것이 사화(士禍)와 그에 따른 낙향의 소산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호남의 원림은 그 뿌리가 훨씬 깊었습니다. 전남 담양군 남면 연천리 산음동으로 가봅니다. 산음(山陰) 이란 말 그대로 산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깊은 곳에 독수정원림이 있습니다. 독수정(獨守亭)은 홀로 지킨다는 뜻이지요. 이 독수정이라는 정자와 그 일대의 원림은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입니다. 건설자는 서은(瑞隱) 전신민(全新民)입니다. 그의 생몰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그가 고려 공민왕 때 북도 안무사 겸 병마원수를 거쳐 병부상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14세기 중반에 태어나 15세기 초반에 숨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때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될 때였지요. 망국(亡國)의 한을 품은 전신민은 조선 태조의 부름을 받지않고 머나먼 남도 땅으로 은거해버렸습니다. 독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이며 마루에 앉으면 무등산이 보입니다. 밑으로 시냇물이 흐르며 정자 앞에 작은 연못을 만듭니다. 전신민은 거기서 낚시하며 세월을 낚았지요. 독수정이란 이름은 당나라의 시선 이백의 싯구에 등장합니다. “백이숙제는 누구인가. 홀로 서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죽었네(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 특이한 것은 이 정자가 보통 정자처럼 남향이 아니라 북향(北向)했다는 것입니다. 모시던 왕이 있던 개성쪽을 향해 날마다 울며 절하기 위해 그리 정했지요
    독수정은 특이하게도 북향이다. 쓰러져가는 고려를 위해 매일 아침 절하는 늙은 충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전신민은 본관이 천안으로 국운이 기우는 것을 보고 고려를 지키려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뜻을 같이 했습니다.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들에게 살해당하고 얼마 되지않아 고려는 멸망했지요. 이때 수십명의 충신들이 은거했습니다. 제가 앞서 황희 선생 이야기를 할 때 등장했던 두문동(杜門洞) 72인을 기억하시는지요. 조선 태조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두문동에서 나오지않아‘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그 두문동과 함께 전신민은 전남 담양으로 숨어버린 것입니다.
    고려말 충신 전신민이 조성한 독수정원림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독수정은 후손들에 의해 계속 중건(重建),중수(重修)됐기에 기념물로 지정되진 않았습니다. 주변의 원림만이 지방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는데 안타까운 것은 이 고장 사람들에게조차 독수정원림이 제대로 알려지지않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전신민은 ‘독수정원운(獨守亭原韻)’이라는 글을 통해 자기가 이 정자를 세운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한번 감상해볼까요. 風塵漠漠我思長 (풍진막막아사장-바람과 티끌은 막막하고 나의 생각은 갈수록 깊어지네) 何處雲林寄老蒼 (하처운림기노창-어느 깊숙한 구름과 숲 사이로 이 늙은 한몸을 숨길 수 있으랴) 千里江湖雙鬢雪 (천리강호쌍빈설-임금 계신 곳 천리밖의 자연에서 두 귀밑버리는 눈처럼 희어지고) 百年天地一悲凉 (백년천지일비량-기껏해야 백년도 못사는 인생살이 슬프고 처량하다) 王孫芳草傷春恨(왕손방초상춘한-아름다운 풀과 꽃들은 가는 봄을 가슴아파하고) 帝子花枝叫月光 (제자화지규월광-두견새는 꽃가지에 앉아 달을 보고 우는구나) 卽此靑山可埋骨 (즉차청산가매골-이곳 청산에 뼈를 묻으려고) 誓將獨守結爲堂 (서장독수결위당-장차 홀로 절개를 지키려 이 집을 지었다네)
    임대정원림은 숨은 보석같다. 평범한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화려한 경관의 연못이 등장한다.

    어떻습니까, 요즘 보기힘든 선비들의 기개와 충절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얼마전 세상 뜬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의 상도동계-동교동계가 스러지는 것을 보고도 진박(眞朴)이니 복박(復朴)이니 하고 다투는 사람들이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지요. 독수정원림을 등지고 담양 시내쪽으로 향하면 오른쪽으로는 소쇄원과 식영정,건너편으로는 환벽당과 취가정과 죽림재가 나옵니다. 그야말로 세계에 자랑할 명승가도(名勝街道), 몇번을 가보아도 질리지않는 우리 옛 정자들이 잘 보존된 곳입니다. 이렇게 달리다보면 고속도로가 정면에 보이는데 거기서 우회전에 약 3분을 달리면 명옥헌(鳴玉軒)원림이 나옵니다. 명옥헌은 조선 중기 오희도(吳希道:1583~1623)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곳에 아들 오이정(吳以井:1619∼1655)이 정자를 짓고 주변을 가꾼 곳이지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명옥헌에 오르기전 방문객들은 환성을 자아낼 수 밖에 없습니다. 입구에 커다란 연못이 있으며 여름에서 가을까지 배롱나무가 화려한 자취를 뽐내는 곳입니다. 배롱나무는 선비들의 거처에 많은데 다른 이야기도 있지요. 배롱나무는 일명 백일홍이라고도 합니다. 백일 붉기위해 이꽃은 여러 번 허물을 벗는데 그것이 예전에는 여인들이 치마를 벗는 것에 비유됐다는군요. 치마를 벗으면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이었기에 집 주변에 배롱나무를 심지않는다는 것입니다. 연못길을 따라 올라가면 명옥헌이 보이고 뒤에는 이 고장의 유명 선비들을 제사지내던 도장사(道藏祠)의 터가 남아 있습니다. 연못이 네모난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예전에 우리 선조들은 세상이 네모라고 여겨 연못도 네모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바람소리가 맑아서 소쇄원이라는 이름이 생겼듯 명옥헌은 구슬이 우는 것처럼 정자 주변을 흐르는 작은 시내의 물소리가 구슬이 부딪쳐 나는 소리와 같아 생겼다고 하지요. 명옥헌의 오른편에는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이라는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300년 이상된 늙은 나무인데 인조가 왕이 되기 전에 전국을 떠돌다가 오희도를 찾아 이곳에 왔을 때 말을 매어둔 곳이라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달리는 후산리 은행나무로도 불립니다. 명옥헌 원림은 소쇄원과 함께 명승 제58호로 지정됐습니다. 그렇다면 오희도는 어떤 인물일까요. 본관이 나주(羅州)인 그는 명곡(明谷)이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1602년(선조 35)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4년(광해군6)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정진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효성이 매우 지극한 인물로 알려졌는데 안타깝게도 단명하고 말았습니다. 1623년(인조 1) 알성문과 병과에 급제한 후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는 사관을 대신해 어전에서 임금이 하는 말을 기록하다 능력을 인정받아 예문관 검열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관직에 나간 그해 천연두에 걸려 마흔한살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요. 그의 아들 오이정은 1639년(인조 17) 사마양과(司馬兩科)에 합격하고 1650년(효종 1) 태학(太學)에 들어가 이듬해 정시(庭試)에서 낙방하자 곧바로 낙향했습니다. 그는 학문이 깊고 기예에 능했는데 특히 거문고가 사악한 생각을 금한다고 해 좋아했습니다. 그 역시 병에 걸려 37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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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대정원림 연못 주변에 새겨져 있는 글자는 '세심(洗心)'
    수정원림-소쇄원-식영정-환벽당-취가정-죽림재-명옥헌원림을 보고 저는 다시 길을 거슬러 화순으로 갑니다. 
    임대정원림을 보기 위해서인데 임대정원림은 독수정원림보다 훨씬 찾기 힘듭니다.
    저는 네비게이션만 믿고 달리다 영산강 근처의 모래밭을 헤맸으며 나중에 알고보니 바로 근처까지 와서도 주민들이 독수정이라는 이름 자체를 몰라 곤란을 
    겪었습니다. 
    마침 주변을 지나던 택시기사를 만나고서야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임대정원림을 가면 제법 넓은 연못과 그 사이로 난 길이 보입니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면 임대정이라는 정자가 보이는데 만추(晩秋)일 때의 단풍이 정말 일품이었습니다.
    임대정원림의 연못에 늦가을의 정취가 가득 쌓였다

    임대정은 화순군 남면 사평리 상사 마을 사평천 변에 있는 단층의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3칸,측면 2칸입니다. 제가 설명했던 입구쪽의 넓다란 연못은 단풍못지않게 여름에 가득피는 연꽃으로 유명하다고 하니 내년에 다시 한번 가 볼 생각입니다. 임대정원림 자리에는 원래 고반(考槃) 남언기(南彦紀·1534~?)가 1500년대 말 지은 초가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고종이 집권하던 시기인 1862년 사애(沙厓) 민주현(閔胄顯·1808~1882)이 세칸의 정자를 짓고 임대정이라는 편액을 올렸다고 하지요. 임대정(臨對亭)이라는 이름은 주돈이(周敦頤·1017~1073)의 “낙조임수대려산(落朝臨水對慮山)”이라는 싯구에서 따왔다고 전해지지요
    임대정의 현판이다. 산을 대하고 연못에 임했다는 뜻이다.

    민주현은 1851년(철종 2)에 등과한 후 한성부 우윤,병조참판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역임했습니다. 그것을 1930년대에 후손 민긍호(閔肯鎬) 등이 중건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원림의 건설자들이 하나같이 원운시라는 것을 남겼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왜 이곳에 원림을 짓고 살게됐는가를 밝히는 내용으로 원림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민주현 역시 원운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新築小亭古杏陰 (신축소정고행음-새로 지은 작은 정자에 낡은 은행나무의 그늘이 드리웠구나) 箇中幽興倍難禁 (개중유흥배난금-그중의 한그루가 유독 그윽한 맛이 있어 깊은 흥을 돋군다) 携壺間有詩朋到 (휴호간유시붕도-마음에 맞는 친구들이 어찌 알고 술병을 들고 찾아와) 爭席時看野老尋 (쟁석시간야노심-농사짓는 이 늙은이를 보려 자리를 다투는구나) 夏坐淸風生木末 (하좌청풍생목말-무더운 여름에는 맑은 바람이 나무 끝에서 불어오고) 秋來皓月在潭心 (추래호월재담심-가을이 되면 밝은 달이 정자 앞 연못 속에 잠긴다) 對山臨水無窮趣 (대산임수무궁취-산을 마주하고 물 가까이 있으니 아 이 끝없는 아취여) 不妨軒頭抱膝吟(불방헌두포슬음-흥에 겨워 정자머리에 무릎 껴안고 시를 읊조릴 테니 방해하지 마오)
    임대정원림에 나오는 연못은 실제로 보면 연못이라 칭하기에는 작습니다. 제가 가봤을 때는 가뭄이 극심해 다 말라있었지요.
    임대정원림의 연못도 가뭄에 바닥을 드러냈다

    그런데 연못 주변에 글자들이 새겨져있습니다. 마음을 깨끗이 닦는다는 ‘세심(洗心)’이라는 글자가 특히 눈에 들어왔지요.
    임대정원림의 연못에 새겨진 글귀다.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은 곳은 백운동원림입니다. 이곳은 제 기인이사 시리즈가운데 故 서성환 태평양화학 창업주가 건설한 영암 월출산 주변 차밭 사이에 숨어있는 곳입니다. 성환 회장의 발자취를 취재하려 몇번을 갔을 때 표지판을 봤지만 정작 그곳에 들어간 것은 최근의 일이었는데 놀라고 말았습니다. 이곳은 양산보 선생 3대가 건설한 담양 소쇄원, 고산 윤선도 선생이 만든 보길도의 부용동원림과 함께 호남의 3대 원림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백운동원림을 보고 나서 보길도로 건너가 부용동원림마저 취재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 정도였습니다.
    백운동원림 대문에서 들여다본 정원이다

    백운동원림은 400여 년 전 이담로(李聃老·1627~1701)선생이 들어와 만들었다고 합니다. 계곡 옆 바위에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을 새기고 조영(造營)한 원림으로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배합된 경치가 매우 빼어난 곳입니다. 예로부터 백운동은 ‘월출산에서 흘러 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이곳에는 약사암과 백운암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백운동원림의 존재가 이담로 선생의 6대손 이시헌에 의해 밝혀졌다는 거지요.
    백운동원림 담벼락에는 백매오가 심어져있다. 이끼가 세월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시헌은 백운동에 전해온 각종 기록과 시문을 모아 ‘백운세수첩(白雲世守帖)’이라는 책자를 남겼는데 여기 보면 이 원림이 조성된 시대와 이유와 주인공을 알 수 있습니다. “백운산장은 내 6대조이신 처사공께서 지으시고 내 고조이신 수졸암(守拙庵) 이언길 공께서 받아 전하여 지켜온 것이다.” 백운동원림은 조성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황폐해졌고 경치도 많이 망가졌습니다. 길 잃은 사람들이 ‘귀신이 나올 것 같다’고 느낄 정도였는데 ‘백운세수첩’이 2001년 발견되면서 백운동원림은 다시 주목받게 됩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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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이 꼽은 백운동 12경
    시 ‘백운세수첩’에 나오는 글을 볼까요?
    “(…)이제 대나무 상자를 뒤져 얼마간의 시와 글을 얻고 합쳐서 한 권으로 만들어 오래 전하기를 도모하고 ‘백운도(白雲圖)’를 그려 책머리에 얹는다. 
    맨앞에는 처사공이 지은 ‘백운기(白雲記)’와 ‘명설(名說)’의 초고를 싣고 이를 이어 양세에 종유했던 여러 어진 이의 작품을 실었다. 
    그런 뒤에야 한 구역 경물의 빼어남과 양대에 걸쳐 만들고 지켜온 아름다움이 한권의 책 가운데 갖추어져 자세히 실리게 되었다. 
    후손으로서 백운동을 지켜 이 집을 전하는 자라면 귀한 옥처럼 받들어 오로지 감히 실추시킬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짧은 시와 조각 글 사이에 
    가락이 맑게 울리고 자획이 예스러워 옛 어진 이의 전형과 풍치를 오히려 방불하게 얻을 수 있다. 
    손으로 어루만져 아껴 실피노라니 나도 모르게 숙연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므로 개연히 감탄하였다. 
    훗날 이를 보고 느끼며 법으로 취하는 자가 또한 누가 된다 해도 안 될 것은 없지만 다만 내 후손들이 서로 힘써 이를 지켜 잃지 않아 길이 백운동의 귀한 물건이 
    되게 하길 바라노라. 경술년(1850) 10월 상현에 불초 동주(峒主) 이시헌은 삼가 적는다.”
    
    비오는 만추, 노란 낙엽이 백운동 원림을 뒤덮었다. 서정이란 이런 풍경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백운세수첩’에는 ‘백운도’가 빠져있습니다. 그렇다면 원형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바로 이런 질문에 강진을 유명하게 만든 다산 정약용선생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백운동원림에서 초의선사 등과 하루를 머물며 그린 ‘백운첩’이 나타난 것이지요. 다산은 기록의 천재답게 백운동원림에 머문 시기와 감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산 관련 책자를 쓴 박석무 선생은 다산이 백운동에 간 것이 1812년 9월 12일의 일이라며 그가 같은 고을이지만 거리가 먼 그곳까지 간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백운동은 원주(原州) 이담로처사가 은거하던 곳으로 후손 이덕휘(李德輝·1749~1828)의 초청으로 다산은 초의선사와 윤동(尹峒) 등과 함께 찾아 즐기곤 했다. 초의선사가 ‘백운도’와 ‘다산도’를 그렸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시를 지어붙였다.” 이때 이덕휘의 아들이 훗날 ‘백운세수첩’을 쓴 이시헌(李時憲)이었는데 나이가 겨우 열살이었습니다. 이시헌은 이때 수발과 심부름을 하며 다산을 만났고 훗날 다산으로 따라가 다산의 제자가 되기도 했으니 기이한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다산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 이시헌에게 글과 그림이 있는 20쪽 짜리 ‘백운첩(白雲帖)’을 선물로 준 것으로 보이며 이게 개인소장가에게 넘어갔다가 세상에 공개된 게 2001년입니다. 백운동원림에 대한 다산의 발문과 12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운동원림 정원 한복판에 12경을 안내하는 표지판이다. 뒤로 보이는 게 얼마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흉물스런 안채로 아예 원림을 망가뜨렸다

    “가경 임신년(1812) 가을, 내가 다산에서 백운동으로 놀러 갔다가 하룻밤을 자고 돌아왔다. 남은 미련이 오래지나도 가시지 않기에 승려 의순을 시켜서 ‘백운도’를 그리게 하고 이를 이어 12승사의 시를 지어서 주었다. ‘ 다산도’를 붙여서 우열을 보인다. 9월 22일.” 여기서 등장하는 다산도는 바로 ‘다산초당’의 그림일 것입니다. 다산은 다산초당을 손수 일구다시피했을 정도로 주변 풍광에 자부심이 강했는데 백운동원림을 본 뒤 우열을 가리자고 했던 것은 백운동의 경치에 깊이 빠졌다는 반증이 될 것입니다. 서시(序詩)격인 ‘백운동 이씨의 유거에 부쳐 제하다(寄題白雲洞李氏幽居)’는 다음과 같습니다. 백운처사 숨어 사는 유정의 괘 얻으니, 임금께 헌책(獻策)함은 옳지 않다네. 십무(十畝)의 솔과 대로 땅의 이익 거두고, 반산(半山)의 누각에서 물소리를 베개 삼지. 풍류는 예원진(倪元鎭)만 못하지 않고, 명승은 고중영(顧仲瑛)에게 소문날 정도였네 상자 속에 남긴 글 그대로 있어, 세월이 흘러도 금쪽같은 맹세를 바꾸지않네.
    여기서 나오는 ‘유정(幽貞)의 괘(卦)’란 ‘주역’에 나오는 말로 유정은 벼슬길에 나서지않고 숨어사는 처사 혹은 은사를 말합니다. 두번째 줄의 헌책(獻策)은 벼슬에 나아가 임금께 글을 올려 자기 포부를 펼친다는 뜻인데 이담로는 그런 욕망을 버렸다는 거지요. 10무(畝)넓이란 1보가 사방 6자요,100보가 1무이니 1000보라는 넓이를 짐작할 수 있겠으며 반산은 고시인 ‘누각연우반산중(楼閣烟雨半山中)’에 등장하는 구절 입니다. 예원진(倪元鎭)은 원말과 명초의 문인화가 예찬(倪瓚· 1301~1374)인데 그는 성품이 고결하여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가산을 정리하고 강소성 (江蘇省)의 삼묘호(三泖湖) 호반에 소한관(蕭閒館)을 짓고 은거하여 풍류의 삶을 살았습니다. 고중영(顧仲瑛)은 원대 고덕휘(顧德輝·1310~1369)로 집안에 옛날의 법서(法書)와 명화(名畵)와 정이(鼎彛) 같은 골동품을 모아 서경 서편에 별장을 짓고 ‘옥산가처(玉山佳處)’라고 했는데 손님을 초대해 사방의 학사들이 모두 그 집에 모여들었다고 하지요. 다산이 꼽은 백운동의 12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경은 옥판상기(玉版爽氣)로 집 주변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에 올라보면 백운동원림 너머로 월출산 옥판봉이 보입니다. 그 산이 내뿜는 상쾌한 기운이 원림 주변을 가득채우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백운동원림의 제1경 동백숲에는 벌써 동백꽃이 떨어져 있다.

    제2경은 유차성음(油茶成陰), 백운동원림으로 가는 좁은 길에 드리워진 동백나무 그늘입니다. 동백나무는 산다경(山茶徑)이라고도 불리지요. 제3경은 백매암향(百梅暗香), 즉 원림 담장에 심은 백매오(百梅塢)의 매화향기를 말합니다. 제4경은 풍리홍폭(楓裏紅瀑), 단풍나무의 붉은 빛이 어린 옥구슬 폭포인데 아쉽게도 요즘은 가뭄이 들어 시냇물이 거의 말라버렸을 정도입니다.
    백운동원림 주변은 자연계곡이 이루는 폭포지만 계속된 가뭄으로 수량이 부족했다.

    제5경은 곡수유상(曲水流觴), 마당을 돌아 나가는 물굽이에 띄운 술잔으로 경주 포석정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백운동원림의 명물 가운데 하나인 유상곡수 한복판은 작은 연못이다. 아마 옛 선비들은 신라왕들이 포석정에서 그랬듯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을 것이다.

    제6경은 창벽염주(蒼壁染朱), 창하벽에 쓴 글씨를 말하며
    백운동원림 입구를 지키는 창하벽 뒤로 대문이 보인다

    제7경은 유강홍린(蕤岡紅麟), 정유강(貞蕤岡)의 용비늘 같은 소나무인데 눈에 힘주고 둘러봐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제8경은 화계모란(花階牡丹), 꽃 계단에 심은 모란을 말합니다.
    백운동원림의 작은 계단에도 모란꽃을 심어 풍경을 가꿨다.

    제9경은 십홀선방(十笏禪房), 사랑채인 취미선방(翠微禪房)의 세칸 초가이며
    백운동원림의 사랑방격인 취미선방. 선비의 세계를 담기 위해서는 고대광실이 아니라 이 자그마한 공간으로도 족했다.

    제10경은 홍라보장(紅羅步障),붉은 비단 장막을 펼쳐놓은 듯한 단풍나무이며 제11경은 선대봉출(仙臺峰出),옥판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선대(停仙臺)를 말합니다.
    백운동원림의 제10경 풍단이다. 뒤로 보이는 푸른
    벽 위에 단풍나무가 심어져있다

    마지막으로 제12경은 운당천운(篔簹穿雲), 원림 주변에 자라고있는 왕대나무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리 넓지않은 원림 주변에서 무려 열두곳이나 되는 경치를 찾았다는 점인데 이것은 그만큼 원림 건설자들의 자존심이 높았다는 뜻일 겁니다. 백운동 원림 근방에 월남사 터가 있고 인근에 이담로 선생의 10세손 이한영(李漢永·1868-1956)의 생가가 있습니다. 그는 야생 차나무를 이용해 녹차를 만든 분인데 이한영가에서 파는 백운옥판차와 금릉원산차는 명차로 이름이 나있습니다. 호남의 3대 원림으로 불리다 쇠락한 그곳에서 다산의 ‘기록’을 바탕으로 다시 원형을 찾는 작업에 들어선 과정을 되새겨 봅니다. 강진군에서 백운동원림 복원작업을 완벽하게 끝내 모두가 옛 사람들의 안목을 함께 누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해봅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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