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33 이몽룡과 관방제림, 춘향과 광한루

浮萍草 2015. 11. 21. 00:00
    세계와 무관한 세계대나무박람회
    이 힘찬 기상이 느껴지는가? 이래서 대나무는 선비가 사는 곳이 아니면 자라지않는다고 했다.
    남 담양(潭陽)은 최고의 자연도시입니다. 40여년전 고(故)박정희 대통령이 산림녹화 정책의 일환을 펴자 이곳에 메타세콰이어 나무가 심어졌고 세월이 흘러 이 나무들이 도시를 살리는 자원이 된 사실을 ‘ 문갑식의 기인이사’ 14편에서 보도한 바 있습니다. 지난달 다시 찾은 담양에는 추색(秋色)이 완연했습니다. 담양으로 간 이유는 세계대나무박람회 때문이었습니다. 10월31일 폐막되기 며칠 전 박람회를 취재하려고 바쁘게 담양으로 갔지만 세계대나무박람회는 요란한 선전만큼 기대엔 미치지 못했습니다. 박람회장에 세워진 캠프는 대부분 국내 대나무 관련 회사들의 제품 홍보,판매장과 다름없었습니다. 개중에는 대나무와 관계없는 한복 파는 코너도 있었고 발마사지기도 있었습니다. 그냥 대나무만 선전해도 될 것을 왜 ‘세계’라는 말까지 붙였는지. 외국관도 있었는데 대나무의 효능,산업화에 미칠 영향,대나무와 인간의 관계 같은 내용을 기대 했지만 외국기업인지 불분명한 업체들의 홍보물만 난무했지요. 다만 박람회장 옆 죽녹원(竹綠苑)은 파란 대밭의 광경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죽녹원이 된 곳의 이름은 성인산이라고 합니다. 바로 옆에는 담양향교가 내려다보이지요. 성인산의 규모는 5만여평에 달하는데 죽녹원으로 조성되기 전까지는 담양의 특산물인 죽세공품의 재료를 조달하는 대나무 밭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죽녹원 바로 옆은 유서깊은 담양 향교다.

    관리도 엉성해 볼품없는 야산이었지요. 담양군이 2003년 5월 대나무 정원으로 조성하자 죽녹원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메타세콰이어길과 함께 담양의 상징이 됐습니다. 고(故)박 대통령의 산림녹화에 이은 지방자치단체장의 훌륭한 결정이라 하겠습니다. 울창한 대밭에는 모두 2.2㎞의 산책로가 있는데 이름이 하나같이 재미있습니다. 운수대통길-죽마고우길-철학자의 길 같은 것들입니다. 관람객들은 운(運)에 굶주렸는지 운수대통길을 즐겨 찾더군요. 죽녹원은 산 위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일품이었습니다.
    죽녹원의 길에는 재미있는 말들이 붙어있다. 운수가 대통하고 싶거나 변치않는 사랑을 꿈꾸는 이들은 죽녹원이 추억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제가 앞서 다뤘던 메타세콰이어길도 위에서 내려다보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죽녹원을 걷다보니 낯익은 인물이 눈에 띕니다. 고(故)노무현 대통령 부부가 여기를 찾았을 때 사진인데 그 옆에는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새민련대표도 있었습니다. 죽녹원에서 본 담양의 경치가운데 관심을 끈 것은 죽녹원과 메타세콰이어길 사이 하천과 주변 제방의 나무들이었습니다. 영산강 상류를 둘러싼 제방에 심은 나무에는 공식 명칭이 있습니다. 바로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된 관방제림입니다.
    전남 담양의 관방제림 입구다.
    관방제림 길은 지금 낙엽이 수북 깔려있습니다. 세상 어떤 화가가 그린 채색화보다 더 화려한 낙엽이 관광객들의 발길에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밟히고 있었습니다. 그 길로 접어드는 순간 입구에 서있는 표석(標石)의 내용이 제 흥미를 자극하는 것이었습니다.
    전남 담양의 관방제림에 낙엽이 쌓여 늦가을의 정취가 가득하다.

    표석에 씌여진 글을 읽어봅니다. 관방제림은 말 그대로 관(官·정부)이 만든 제방을 보호하기 위한 나무(防堤林)라는 뜻입니다. 2㎞에 달하는 관방제림에는 200~300년된 노목들로 가득한 데 종류는 푸조나무,팽나무,개서어나무 등이라고 합니다. 북쪽으로는 추월산과 용추봉, 남으로는 덕진봉과 봉황산, 동으로는 광덕산에 둘러싸인 영산강의 상류,담양천은 조선시대 해마다 홍수를 겪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1648년, 즉 인조26년에 이 고을 부사(府使)가 치수(治水)를 위한 대담한 결정을 합니다.
    관광명소가 된 관방제림. 이 제방을 만든 이들은 몇백년 후 후손들이 이 제방을 즐길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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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직한 성이성이 관방제림 제조, 이몽룡의 모델이기도
    전남 담양의 관방제림을 처음 만든 담양목사 성이성은 소설 춘향전 속 이몽룡의 모델이었다.
    양천변에 제방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심는 것이었습니다. 나무가 뿌리를 내리면 제방도 튼튼해지고 나무 자체로도 물의 범람을 막는 역할을 한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바로 그 부사의 이름이 성이성(成以性·1595~1664)입니다. 본관이 창녕인 성 부사의 행적은 인조실록-국조방목-영남인물고 등에 등장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승지를 지낸 성안의(安義)인데 아들 성이성은 1610년 진사가 됐지만 광해군 때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인 1627년에야 비로소 과거를 치러 식년문과 병과에서 급제했는데 당대의 반골이었지요.
    광한루에는 호남제일루란 현판이 걸려있다. 광한루는 황희 정승이 유배시절 세운 건축물이다.

    광한루원에 있는 춘향이의 모습이다. 이 그림은 이당 김은호의 작품이다. 실제 춘향이는 박색이었다고 한다.
    사간원정언-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사헌부지평을 지낸 뒤 1637년 사간원헌납이 됐는데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국정을 농단한 세도가 윤방(尹昉)·김류(金瑬)·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을 ‘오국불충 (誤國不忠)의 죄를 저질렀다’며 직언한 것입니다. 성이성의 대찬 면모는 그 한 해 전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는 인조가 남한산성에 고립돼있을 때 왕을 구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출전하기도 했는데 길이 막혀 더 이상 남한산성에 접근할 수 없게되자 경상감사 휘하로 들어갔지요. 어쨌든 대쪽 같은 성격 때문에 중앙에서 승진이 좌절된 성이성은 진주-강계-담양-창원 등5곳의 외직 (外職)을 돌았는데 그중 하나가 담양부사입니다. 1648년 성이성이 수축한 제방은 200여년이 흘러 1854년 담양부사 황종림(黃鍾林)이 보수했습니다. 관방제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황종림이 연인원 3만명을 동원해 이곳을 다듬은 뒤의 일입니다. 성이성은 고을마다 송덕비가 세워졌는데 강계부사 때는 이 고장의 특산물인 인삼에 붙는 삼세(蔘稅)를 면제해 줘 ‘관서활불(關西活佛)’로 불리기도 했지요. 혼자 글 읽기를 좋아하면서도 찾아오는 이들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고 재물에 초연해 늙어서는 생활에 곤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 성이성은1695년(숙종 21년) 조선시대 공직자론 최고의 영예인 청백리(淸白吏)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 성이성이 ‘춘향전(春香傳)’의 모델이라는 사실은 꽤 알려져있습니다. 이것은 후손들이 성이성의 호 계서(溪西)를 따 만든 ‘계서선생일고’와 역시 후손이 지은 ‘필원산어’ 등을 한 대학교수가 춘향전과 비교한 바에 따른 것입니다. 살펴볼까요? 성이성의 부친은 1607년 남원부사로 발령납니다. 당시 13세였던 성이성은 아버지를 따라왔지요. 성이성은 아버지가 광주목사로 떠날 때까지 5년간 남원에 살았습니다. 당시 성의성은 17세, 춘향전 속 이몽룡이 춘향이를 만난 것은 16세때로 그려집니다. 이후 벼슬길에 오른 성이성은 네차례나 암행어사로 제수됐는데 전국을 순회감찰하면서 남원을 두번 이나 들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이성이 남긴‘호남암행일지’에 나온 자신의 호남 방문 루트와 춘향전 속 이몽룡의 루트가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춘향전 속에서 암행어사 이몽룡이 탐관오리들의 잔치 때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시(詩)와 비슷한 시도 성이성이 남긴 기록에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로 미뤄보면 성이성이 이몽룡의 모델이라는 지적은 상당히 그럴 듯해 보입니다. 어쨌든 성이성의 고향인 경북 봉화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성이성의 생가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재단법인 이몽령(성이성) 기념사업회’라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지자체의 관광객을 끌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 아닌가 싶습니다. 경북 봉화에 있는 계서당은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로 1613년에 건립된 것인데도 상당히 보존이 잘 돼있습니다. 봉화가 오지(奧地)이기에 각종 전란을 피해나갔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른 의문이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춘향은? 제가 춘향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것은 이몽룡의 모델이라는 성이성이 만든 관방제림 때문이 아니고 최근 남원의 광한루(廣寒樓)를 방문했을 때 본 시설물 때문입니다. 지금 광한루는 예전과 달리 ‘광한루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열녀 춘향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광한루원은 제 기억에 생생한 곳입니다. 1984년 대학 4학년 때 졸업여행을 다녀온 곳이기 때문입니다. 첫날 전주에서 비빔밥을 먹고 남원에 들러 광한루를 본 뒤 여수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부산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2박3일짜리 졸업여행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1년만에 광한루원에 갔는데 삼십년전 본 광한루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 뒤편에 작은 사당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도 이런 사당이 있었나?”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안으로 들어가보니 한 여성의 초상화가 있고 현판엔 ‘열녀 춘향사’라는 글씨가 보였지요. 이 사당은 1931년 지어졌다고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대학교 4학년 때 남원에 갔을 때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사당은 남원 유지인 강대형-이현순이 세울 것을 주장했으며 남원-진주-평양-개성 등의 기생들로부터 돈을 모금해 지은 것이라고 하지요.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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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향전 속 성춘향의 실제 미모는 천하박색
    광한루원의 돌기둥에 새겨진 춘향이의 캐릭터다
    당이 건립된 것은 1931년 3월 1일이며 그해 6월 20일 단오날 때 준공식과 함께 처음올 춘향이에게 제사를 지냈다지요. 이들이 춘향사당은 만든 것은 ‘충절(忠節)’을 기린다는 것인데 춘향이가 정절을 지켰는지 이몽룡을 유혹했는지에 대해 시각이 엇갈립니다. 정문에는 단심(丹心)이라는 글이 걸려있고 사당 정면에는 ‘열녀(烈女) 춘향사(春香祀)’라는 현판이 있으며 사당안에는 춘향의 영정이 있습니다. 현재의 영정은 당대의 화가 이당 김은호가 그린 것을 송요찬 전 내각수반이 기증한 것입니다. 남원에는 춘향사당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광한루원 한켠에는 1992년 만든 춘향관이 있습니다. 내부에 춘향전 고서(古書)와 당시 생활을 보여주는 자료,풍속화 등이 있습니다. 남원시는 매년 4월말부터 5월초에 춘향제를 여는데 올해가 90회째입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즉 88올림픽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구례 방향으로 가다보면 육모정 교차로가 나오고 여기서 주천 방향으로 가면 국립공원 매표소에 닿기 전 춘향묘가 보입니다. 묘가 1995년 조성된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광한루와 오작교의 원경이다

    1962년 지금의 춘향묘 위치에 ‘성옥녀지묘’라는 지석(誌石)이 발견되자 남원시에서 이곳을 춘향이 무덤으로 생각하고 묘를 만든 것입니다. 100여 개의 계단을 오르면 봉분이 보이는데 앞에는 ‘만고열녀 성춘향지묘(萬古烈女成春香之墓)’라는 글씨가 보입니다. ‘성옥녀’는 누구일까? 옥녀라는 여인에게 성이성이 자신의 성씨를 부여해‘성옥녀’라 부른게 아닐까하는 상상을 해보지만 안타깝게도 성옥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미상(未詳)의 인물 무덤을 춘향묘로 만든거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남원시민의 상당수가 ‘춘향이는 실존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련 내용을 알아보니 원래 춘향이는 미인이 아니고 천하의 박색(薄色)으로 삼십 넘도록 결혼을 못했으며 어머니는 관기(官妓) 월매였다는 설화가 여럿 있습니다. 춘향이 어느날 남원 시내를 흐르는 요천에서 빨래를 하다 도령을 만나 연정(戀情)을 품다 상사병에 걸렸습니다. 월매는 자기 딸을 위해 도령을 광한루로 유인한 뒤 춘향의 하녀인 향단이를 말쑥하게 꾸며 도령에게 보냈고 술을 강권해 취하게 만들지요. 다음날 도령이 일어나보니 옆에는 천하박색 춘향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도령은 사태를 수습하려 비단 수건을 정표로 준 뒤 한양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떠난 뒤 연락을 끊었지요. 지금이나 조선시대나 신분의 귀천이 있었을테니까요. 이에 상심한 춘향이는 도령이 준 비단 수건을 이용해 광한루에서 목매 죽었다는 것이 설화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다른 설화들도 하나같이 춘향이는 못생겼다고 하니 이것도 하나의 진본(眞本)이 여러 이본(異本)을 만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견우 직녀가 사랑을 맺었다는 오작교에는 지금도 사랑을 찾는 젊은이들이 자주 보인다.

    또 다른 설화의 줄거리도 앞서 설화와 비슷하지만 결말 부분이 다릅니다. 춘향이가 도령에 대한 원한을 품고 죽자 남원에는 3년이나 흉년이 들었습니다. 당시 이방(吏房)이 춘향전을 지어 원혼을 위로했더니 비로소 흉년과 재앙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설화에 불과한 것이지요. 이런 것을 보면 성이성이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 머물 때 한 처녀와 로맨스를 가졌고 그것이 훗날 성이성이 암행어사 시절 재차 알려지면서 구전(口傳)민담 으로 내려오다 춘향전이 된 것 아닐까 싶습니다. 담양의 관방제림에서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다 성이성에서,다시 이몽룡으로,그리고 무대를 남원으로 옮겨 광한루와 춘향이를 되짚어보면서 든 생각이 있습니다. 얼마전 전남 장성에서‘홍길동 생가’와 그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내용을 봤을 때도 그랬습니다. 우리 지자체들은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 자기 지역의 발전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있지요.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관광수입을 늘리려하고 그 방편으로 자기 지역과 연관된 소재를 활용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시멘트 콘크리트로 어마어마한 건물을 지어놓고 소프트웨어는 부실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아마 이렇게 규모를 키우는 것은 다음번 당선을 위한 업적과시용 전시(展示)행정의 일환일 겁니다. 차라리 자료가 없다면 소박한 자연이라도 보게해줬으면 오히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않을까 합니다. 예산을 잔뜩 쏟아부어넣고 아무도 찾지않는 기괴한 유령건물을 만드느니 자연을 벗삼아 우리가 잘 아는 문화의 주인공들을 잠시 만날 기회를 준다면,그게 웰빙을 지향하는 현대사회의 흐름과도 맞지않을까요?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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