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31 오지호의 화순과 호남의 3대

浮萍草 2015. 11. 11. 15:37
    미술 조예가 깊은 호남 지역의 3대 미술가
    난 8월6일 미국에 거주하던 화가 천경자(千鏡子)씨가 작고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전해졌습니다. 
    화가가 세상을 뜬 후 자식들간에 다툼이 일었다는 것은 알려진 뉴스지요. 안타까운 것은 그의 이름을 딴 기념관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천경자씨의 고향 전남 고흥군에서 기념관을 세우려했으나 큰딸과 의견이 달라 무산됐고 경기도 양주시에서도 기념관을 계획했지만 이 역시 
    큰딸과 뜻이 맞지않아 결국 장욱진 미술관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내막은 모르겠지만 안타깝지요.
    오지호 화백 생가의 사랑채다

    예로부터 전라도는 정자(亭子)가 발달했고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흔히 한국의 3대 서양화가라면 박수근-이중섭-김환기를 꼽습니다. 호남에서는 3대 화가로 공재(恭齋) 윤두서, 학포 양팽손(梁彭孫),소치 허련(許鍊)을 인정한다고 하지요. 윤두서 선생은 잘 알려진 것처럼 고산 윤선도 선생의 집안으로,자화상이 유명합니다. 전남 해남 윤씨 종택인 녹우당(綠雨堂) 근처에는 윤씨 집안에서 만든 기념관이 있습니다. 이 기념관에 가보면 윤두서 선생이 그린 자화상 등 볼만한 그림이 많습니다. 윤두서(尹斗緖·1668~1715) 선생은 생존해있던 당대에도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선생과 함께 ‘삼재’로 불린 인물입니다. 그의 선조인 고산 윤선도가 송강 정철과 함께 조선 시가(詩歌)의 쌍벽을 이룬 전통을 공재 선생이 이어받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학포(學圃) 양팽손 선생(1488~1545) 선생은 조선 중종 재위시절 문장과 서화로 명성을 얻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잘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기억이 뛰어난 분이라면 ‘기인이사’ 15편 ‘양산보3대와 소쇄원의 비밀’에서 그가 거명된 것을 아실 겁니다.
    오지호 화백 생가에 석양이 비치고 있다

    양팽손 선생은 정암 조광조와 교우했으며 정암이 사화에 연루돼 화순으로 귀양왔을 때 그를 모셨고 정암을 모시는 죽수서원에도 함께 배향됐습니다. 그의 사촌인 양산보가 정암을 사모했으며 정암의 사후(死後) 출세의 뜻을 접고 소쇄원을 만들었지요.양팽손 선생의 삶을 더 알아보고 갑니다. 그는 본관이 제주이며 1488년 9월 19일 전남 능성현, 지금의 능주 월곡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조광조(趙光祖) 선생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1519년 교리로 있던 중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맞지요. 그로 인해 삭직됐으니 1537년 김안로(金安老)가 사사(賜死)된 뒤 복관(復官)됐는데 훗날 이조판서로 추증됐습니다. 선생은1863년 철종 14년에 혜강(惠康)이란 시호를 받았는데 시호를 내리며 학포의 인간됨을 평한 글이 남아있어 그 인품을 짐작케 합니다. ‘학포는 부지런하고 사(私)가 없으므로 혜(惠)라 하고 연원이 유통하므로 강(康)이라 한다.’ 학포의 대표작으로는 우음(偶吟)-산수도 등이 유명한데 특히 어린 소년이 소를 타고 가며 피리를 부는 장면을 그린 ‘우음’의 옆에 쓴 시는 철학적입니다.
    오지호 기념관에 있는 작품들이다.

    소타는 즐거움을 지금껏 몰랐는데(不識騎牛好·불식기우호)
    말이 없으니 이제서야 알겠네(今因無馬知·금인무마지)
    저녁 들길에 봄풀 내음 향기로운데 (夕陽芳草路·석양방초로)
    해도 나처럼 느릿느릿 지는구나(春日共遲遲·춘일공지지)’ 어떻습니까, 봄날의 서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같은 느낌이 들지요? 윤두서-양팽손과 함께 호남의 3대 화가로 지목되는 허련(許鍊·1809~1892)은 비교적 근대 인물입니다. 허련은 소치(小痴)·노치(老痴)·석치(石痴)란 재미있는 호를 쓰지요. 여기서 ‘소치’라는 것은 ‘작은 바보’라는 뜻입니다. 허련이 이 호를 쓴 것은 스승인 김정희가 “중국 원나라의 4대 화가 중 한명인 대치(大痴) 황공망과 허련이 견줄만하다”는 평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허련은 스스로를 낮춰 큰 대자 아닌 소자를 썼지요. 김정희는 허련을 꽤나 아꼈는지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 그 화풍은 아들 허형(許灐),손자 허건(許楗),먼 친척 허백련(許百鍊)으로 계승됐습니다. 그런데 이 세사람은 왜 호남의 3대 화가로 불리는 걸까요? 그들이 남종화(南宗畵)의 맥을 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종화를 알려면 북종화를 알아야하는데 이 구분은 명나라 말기 동기창(董其昌)이 나눈 개념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오지호 화백 생가 입구 흙담에 낙엽이 엉켜 있다.

    직업 화원(畵員)들이 그린 것을 북종화라 한다면 사대부-선비들이 그린 그림을 남종화라고 하는 것이죠. 북종화는 짙은 채색에 꼼꼼한 묘사가 특징인 반면 남종화는 선비들이 자신의 깊은 내면세계를 수묵(水墨)이나 옅은 담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호남에는 남종화의 맥을 이어온 3대 거장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인상주의(印象主義)를 처음으로 들여온 화가도 있습니다. 그를 이야기하려 천경자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 윤두서-양팽손-허련과 그의 후계자들을 이야기하게 된 것입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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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파의 선구자 오지호의 특이한 전력
      
    ▲ (左) 오지호 화백 부부의 신혼 때 모습▲ (中) 만년의 오지호 화백이 화순군 동복 집 마당을 거닐고 있다 ▲ (右 ) 오지호 화백은 한국 화단에 인상주의를 도입한 선구자다.
    히 한국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이중섭(李仲燮·1916~1956)을 들지만 오지호(吳之湖·1905~1982)를 인상파의 선구자로 꼽는 전문가들도 많습니다. 그는 전남 화순군 동복(同福)에서 구한말에 보성(寶城)군수를 지낸 이재영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전주고보에 입학했다가 휘문고보로 편입했습니다. 이때의 친구가 ‘폐허’ ‘농민’을 쓴 농민문학의 선구 이무영(李無影)입니다. 그는 1924년 동경미술학교에 유학가 1931년 졸업했는데 서양화에 빠진 이유는 1922년 열린 나혜석 개인전을 본 뒤부터라고 합니다. 그때의 기억을 그는 이렇게 회고한 바 있지요. “이것이 유화(油畵)로구나.새로운 그림이란게 이것이었구나. 이 강렬한 색채, 이 힘찬 필치! 하면서 감탄한 후 색의 세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인간의 운명은 순식간에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지호는 1935년부터 인상파 작풍(作風)에 몰입합니다. 신선하고 밝은 색채로 한국의 자연을 표현하기 시작한 그는 1938년 김주경과 함께 ‘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을 냈는데 이것이야말로 한국 인상파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였지요. 재미있는 것은 오지호 화백이 한 백화점의 선전부,지금의 홍보팀에 입사했을 때 시인 이상(李箱)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저는 28년동안 취재를 하며 기인(奇人)과 이사(異士)의 조우를 종종 목격합니다. 오지호는 일제에 순응한 다른 예술가와 달리 요주의 인물이 됐습니다. 1940년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1942년에는 전쟁을 기록하라는 제작령을 역시 마다했습니다. 그는 1943년 일제가 인정하는 기관에 화가로 등록하라는 요구마저 뿌리쳤습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오지호는 가족과 함께 1944년 고향 동복을 떠나 함경남도 단천으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3월 귀향하는데 몇 달 뒤 일제가 전쟁에 져 항복을 하고 조국은 광복을 맞지요. 오지호의 이런 전력은 다른 예술가와 비교됩니다. 1940년대 악에 받친 일제는 회화 보국(報國)운동을 벌였는데 이때 이당 김은호,운보 김기창,청전 이상범 등이 그 활동을 벌여 두고두고 친일파라는 딱지를 달고 다녔지요. 식민지 시대여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안타까운 선택이었습니다. 오지호는 광복 이후 조선대학교 미술과 창설에 기여하며 1960년까지 교수로 재직했고 이후로도 눈부신 활동을 벌였습니다. 잠시 그의 작품세계를 보자면 1950년까지 전기(前期)의 그림은 사실적 시각에 입각해 자연을 밝고 맑은 색조로 그려냈지요. 대표작은 ‘남향집’ ‘처(妻)의 상’ ‘포구’ 등인데 한국형 인상주의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사과밭’은 사과꽃과 잎의 색채가 혼탁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점묘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림을 보면 5월의 태양 아래 만개한 사과밭의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전쟁을 겪은 1950년 무렵부터 59년까지의 중기(中期) 그림들은 전기와 달리 화면이 단순화됩니다. ‘추경(秋景)’ ‘창가의 꽃’ 등이 그것인데 1960년대 들어서는 중기 때보다 화면이 더 단순화돼 청색이 많이 등장하고 화면도 강렬해졌습니다. 이것은 인상주의를 넘어선 야수파(野獸派)적 기법으로 ‘추광(秋光)’ ‘항구’ ‘피카델리 풍경’ ‘과수원’ 등의 작품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오지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림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 국어(國語)교육에도 깊이 개입했습니다. 그는 국한문 혼용(混用)을 주장해 ‘국어교육에 대한 중대한 오해’ 같은 논문 60편을 남겼습니다. 그가 국어운동에 본격 개입한 것은 1969년 7월입니다. 이때 이희승 등 학계-언론계 인사 300명과 함께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창립 멤버가 된 것입니다. 오지호의 한글 전용은 사실 이보다 훨씬 전인 1958년 ‘자유공론’이란 잡지에 ‘한자폐지론 비판’이란 논문을 실으며 시작됩니다. 1979년 나온 ‘알파벳 문명의 종언’은 그가 남긴 60여편의 논문을 정리한 필생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오 화백의 주장을 한번 살펴봅니다. “사학교 교육으로부터의 한자의 제거는 한자어의 제거를 결과하였고 한자어의 제거는 아동들로부터 언어능력을 제거하였고 언어능력의 제거는 그들로부터 사고능력을 제거하였다. 아동들로부터 언어능력을 제거해놓고 학부모들은 그들더러 공부만 못한다고 성화를 대는 꼴을 보고 있으면 마치 성능력이 없는 자식더러 아이만 못낳는다고 안절부절 못하는 어리석은 어버이를 보는 것과도 같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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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의 비극적인 죽음 뒤에는,,,
    는 1974년 3월부터 열달간 아내 지양진 여사와 함께 10개월간 유럽여행을 떠나‘유럽화단의 황혼’이란 에세이를 신문에 3차례 발표했고 1980년에도 4월부터 9월까지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의 세네갈까지 여행했지요. 숨을 거두기 한해 전의 일이었습니다. 나혜석이 그랬고 천경자도 그랬지만 오지호 화백 역시 세계를 돌며 스케치를 하고 그림을 완성하는 것을 즐겨했습니다. 나라 밖으로 나가면 국내에서는 보지 못한 여러 풍물과 색감을 접할 수 있기에 화가들은 외유(外遊)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오 화백은 1982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78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는데 지양진 여사가 3년 뒤 국립현대미술관에 유작(遺作) 34점을 기증했으며 화순군에서는 동복에 있는 생가를 보존하는 한편 100m정도 떨어진 곳에 오지호 기념관을 세웠습니다.
    오지호 화백의 생가 앞에 있는 안내판이다. 오 화백의 생가는 인적이 드물어 가을의 정취를 즐기기에 알맞다.

    오지호 기념관은 작지만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었습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서있는 기념관 앞으로는 너른 들판이 보이고 제가 찾았을 때는 마침 모과나무에 모과가 주렁주렁 열려 가을 정취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무서운 개가 연신 짖어대는게 흠이긴 했지요. 생가 직원에 따르면 1층에 전시된 오 화백의 작품들은 전부 실물이 아니고 복제품이라고 합니다. 다만 지하 1층에는 기증품들이 있는데 진품이 많다는군요
    오지호 화백의 장남 오승우 화백의 작품이다.

    오지호 화백의 작품이다. 인상주의의 효시라 할 만큼 색채가 강렬하다

    월요일에는 휴관하니 혹시 가볼 분은 날짜를 잘 맞춰 헛걸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지호 화백 생가 부근에 있는 기념관이다.

    부근 생가는 가을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찾아오는 이가 드문데 독상면 경로당을 지나면 붉은 단풍이 얽혀있는 오방색으로 된 토담이 보이며 그 뒤로 대문이 열려있습니다
    오지호 화백의 생가 앞. 서향집으로 황혼 무렵에는 햇볕이 쏟아진다.

    여기서 태어난 오 화백은 결혼 후 바로 옆에 붙은 집에서 살림을 했습니다. 원래 이 집은 향교 자리였다고 하지요. 오 화백의 집 옆에는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오지호 화백 집 마당에 있는 500년된 은행나무에도 가을이 내렸다.

    보기 좋게 생긴 이 은행나무가 떨군 은행들이 발에 밟히는데 서향(西向)이어서 저녁이 되면 붉은 노을이 서쪽으로 지는 모습이 일품이었습니다. 오지호 화백의 예술혼은 그 아들 오승우(1930년생),오승윤(1939~2006) 화백 형제와 고 오승윤 화백의 아들인 오병재 화백 3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오지호 화백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계기를 말하고자 합니다. 제 인척 중 한 분의 고향이 전남 화순 동복인데 그의 집을 방문하니 오방색으로 이뤄진 멋진 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매우 단순하면서도 풍수와 샤머니즘을 섞은 오방정색(五方正色)의 세계였는데 바로 그것이 오승윤 화백의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오지호 화백의 차남 오승윤 화백은 사건에 연루돼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안타깝게도 오승윤 화백은 자살로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알려지기로는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렸는데 그 이유가 화집 발간과 전시회가 계속 늦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제가 아는 인척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린 명작들이 사기를 당해 회수할 수 없는 지경에 몰린 것이었습니다. 지금 그의 그림들은 오간데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일로 상심하던 그는 자신보다 네살많은 누나의 아파트에 다녀오던 길에 8층에서 투신하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화가의 최후였지요. 그가 죽음에 앞서 남긴 유고도 있습니다. 원문을 인용해보기로 합니다. “출판사이기 때문에 잘하리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보니 저작권을 모르는 작가는 쉽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었다. 계획적인 계약서다. 혼란스러운 것들을 수정하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어차피 계약을 해지하면 변상하는 작품과 호수를 이야기할 것이다….”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요? 당시 보도를 보면 오 화백과 한 출판사는‘1년에 500만원 가치의 그림을 그려 출판사에 내면 출판사는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하는 한편 1억원 정도를 투자해 2004년 까지 화집을 발간한다’는 골자의 계약서를 썼다고 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단 2006년까지 오화백은 화집에 들어있는 작품을 일반에 팔 수 없고 화집이 나올 때까지는 이미 받은 작품과 200호 이내에서 교환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볼수록 묘한 뉘앙스를 주는 단서임에 분명합니다.
    오승윤 화백은 오방색을 샤머니즘과 접목해 독특한 미술세계를 구축했다.

    이 때문에 출판사는 끊임없이 오화백에게 그림을 요구해 가져간 것만 유화 25점,드로잉 7점,판화 원판 37점이라고 하지요. 오화백은 출판사의 요구에 지친데다 그림을 돌려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상심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문제의 출판사 대표는 오 화백이 숨진 1년 후에 법원에서“유명화가의 작품을 무단으로 게재하고 가족을 협박한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구속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응징한들 한국을 사랑했던 화가는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뒤였지요. 제가 궁금해 찾아보니 오 화백의 죽음과 연관된 출판사의 대표는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최근에도 다른 유명 화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있더군요. 검색을 해보니 ‘전속작가’ 제도가 예술가를 옥죈다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만일 그에게 오 화백의 죽음에 대해 묻는다면 전혀 다른 말을 하겠지요. 하늘에 있는 오 화백은 다시는 입을 열 수 없을테고요. 저는 예술 관련 취재를 해보지 않았지만 일련의 화랑(畵廊) 비리와 뇌물 구조 등을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바 있습니다. 아름다운 예술의 이면에 이토록 비린내가 진동하는 인물들이 둘러싸고 있다니 그것도 세상사의 한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기는 연꽃도 진흙속에서 꽃을 피운다니 할 말은 없습니다만….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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