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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솥바위와 이병철과 허준-허만정 부자

浮萍草 2015. 10. 20. 10:16
    나라를 지키고 부자 만들어낸 바위
    도(南道) 기행에 나선 것은 지난달 22일자 신문 기사 때문입니다. 사회면에 이병철(李秉喆ㆍ1910~1987) 삼성 창업주,구인회(具仁會ㆍ1907~1969) 엘지 창업주,조홍제(趙洪濟ㆍ1906~1984) 효성 창업주의 생가를 연말까지 관광코스로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눈길을 끈 것은 경남 남강의 ‘부자(富者)바위’로 알려진 솥바위,즉 정암(鼎岩)에 얽힌 전설입니다. 한말(韓末) 이곳을 지나던 도인(道人)이“솥바위의 다리가 뻗은 세 방향으로 20리 내에 큰 부자가 셋 나올 것이다”라는 예언을 남겼다고 해 유명해졌습니다.
    새벽 남강에 솟아있는 솥바위. 잔잔한 물결 속에 신비로운 모습을 드러내고있다.

    현장으로 달려간 저는 남강(南江)을 마주했습니다. 남강은 186.3㎞로 함양군 서상면(西上面)에서 발원합니다. 서상면은 해발 1503m 덕유산과 닿아있습니다. 이곳을 흐르는 남계천(濫溪川)이 진양호(晉陽湖)로 흘러들면서 남강이 됩니다. 임진왜란 때의 명장 김시민 목사와 논개의 넋이 어린,한국의 3대 누각 촉석루(矗石樓)가 있는 진주가 포함된 곳의 옛 지명이 진양군이지요. 함양~진주를 거친 남강은 함안-의령군의 농토를 풍부히 적셔준 뒤 창녕군 남지읍에서 낙동강에 합류합니다. 과연 의령관문(宜寧關門)을 정면에서 봤을 때 오른쪽 남강에 예사롭지 않은 바위가 서 있습니다. 전설처럼 물밑에 세 다리가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기돗발이 센 곳인지 주변에 누군가 촛불과 막걸리 등을 놓고 기도를 드린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의령관문 옆 다리위에서 내려다본 솥바위는 육지와 무척 가깝지만 임진왜란 때 격전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장을 확인해보니 의령군 솥바위는 세 부자뿐 아니라 다른 역사와도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홍의(紅衣) 장군으로 알려진 의병장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ㆍ1552~1617)장군이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친 곳이 이 정암 나루터 근처입니다.
    솥바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정암루가 서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다.

    지금 의령군으로 진입하는 의령관문 옆에는 곽재우 장군의 동상과 정암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솥바위는 부자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나라를 지킨 바위라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여기서 세 방향으로 나서봅니다. 첫 번째는 의령군 정곡면입니다. 정곡면은 산세(山勢)가 빼어나지도,주변 풍광이 인상에 남을 만큼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잘 가꿔지지않은 자연스러운 시골 마을 그대로지요. 그런데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집만은 예외입니다. 호암재단에서 관리한다는데 정갈한 한옥이 잘 보존돼 있습니다. 이 집은 풍수(風水)에 문외한인 제가 봐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집과 연결된 마두산 자락이 이 집 주변에선 노적가리가 쌓여 있는 노적봉(露積峰) 형상이라는 겁니다. 현장의 문화해설가에 따르면 이 집에는 다음과 같은 기운이 있답니다. “원래 집과 이어진 산의 이름이 말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마두산(馬頭山)이었는데 호암(湖巖ㆍ이병철 창업주의 호)이 유명해지면서 호암산으로 바뀌었지요. 한문은 틀리지만요. 산의 기운이 흐르다 혈(穴)이 맺힌 곳이 이 집으로 알려졌습니다.” 지금 생가는 호암의 할아버지가 1861년 대지 1907㎡, 즉 600평이 넘는 땅에 남서향으로 지었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에 우물 2개, 광이 있는데 이병철 창업주의 성격처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모습으로 보존돼 있습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생가 안채다. 이 전 회장이 병을 치료할만큼 약효가 있다는 앞에 보이는 우물은 지금도 수량이 풍부하며 맑지만 너무 깊어 닫아놓았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생가 사랑채다. 이 전 회장의 성격처럼 군더더기없이 깔끔하다.

    집 뒤편에 바위들 모습을 한참 지켜보고 있자니 문화해설사가 다가와“저쪽은 자라 모양,이쪽은 두꺼비 모양”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과연 그렇게 보입니다
    자라의 형상이 보이는가? 이병철 전 회장 생가 뒤 바위의 모습이다

    재미있어하니 “저기는 떡을 쌓아놓은 모습,혹은 쌀가마니를 쌓은 모습”이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밭 전(田)자 모양의 바위도 있으니 하나같이 돈과 연결되거나 상서로운 동물 모양입니다. 거기다 8.9㎞ 밖의 남강이 역수(逆水), 즉 이 집을 향해 거꾸로 흐르는 모양입니다. 풍수에서 역수는 재물(財物)이 모인다는 뜻이라고 풀이하지요.
    바위가 마치 시루떡을 쌓아놓은 것처럼 생겼다. 이병철 전 회장 생가 뒤 바위의 모습이다

    바위가 꼭 쌀가마를 차곡차곡 얹어놓은 것 같다. 이병철 전 회장 생가 뒤 바위의 모습이다

    서울에서는 이태원동, 동부이촌동 쪽에서 본 한강이 역수 형태여서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호암은 여기서 부친 이찬우,모친 권재림 사이에서 2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는데 이미 아버지는 이곳에서 1000석 농사를 짓는 부농(富農)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삼성’하면 철저하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어렸을 적의 이병철 창업주는 그렇지않았다고 하지요. 먼저 그는 정식 졸업장을 가진 게 없습니다. 어려서 서당을 다니다 진주의 지수초등학교로 가 3년을 다녔고 다시 서울 중동학교로 갑니다. 여기서도 졸업장을 못 받고 속성졸업해 일본 와세다대 정치경제학과를 다녔지만 건강이 악화해 1년 만에 중퇴하고 돌아옵니다. 그의 병을 고친 것은 고향 집 우물이라는데 지금도 이 우물은 6m깊이로 맑지만 사고를 우려해 닫아놓았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게 어떻게 어린 이 창업주가 9㎞나 지수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느냐는 겁니다. 알고 보니 이 창업주의 누님이 허씨 가문에 출가해 지수 초등학교 바로 옆에 살고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 창업주가 그 집에 머문 거지요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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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벌관광코스에 GS그룹이 빠진 사연
    날 이 창업주가 다니던 지수초등학교는 지금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지수면사무소 인근에 그 터가 남아있습니다. 
    학교 한복판에 우람한 소나무 두 그루가 얽힌 듯 서 있는데 이 창업주와 구인회 창업주가 자신들의 추억이 얽힌 학교에 기증했다는 겁니다. 
    이 창업주는 자신의 자서전인 ‘호암자전’에서 “여러 장사를 하다 망해봤으며 노름에 빠져 달 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온 날이 많았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상하는 평소의 이병철 창업주와는 많이 다른, 어찌 보면 인간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구인회 엘지 창업주가 함께 심었다는 소나무가 아직도 지수초등학교 옛 터에 남아있다

    옛 지수초등학교 터에 남아있는 구인회 회장 불망탑이다. 모교를 위해 여러가지 지원을 한 것을 기념해 세운 듯하다

    당시 이 회장은 이미 결혼을 했는데 부인인 박두을 여사는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명인 박팽년 선생의 후손이지요. 그들이 분가해 살던 집이 생가 맞은 편인데 앞에는 아무 표시도 없으며 일반인의 출입도 금하지만 담장 밖으로 뻗은 소나무가 멋집니다. 그렇다면 왜 이 창업주의 아버지는 막내아들의 일탈(逸脫)을 방관했을까? 여기에도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호암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호암의 부친과 친한 도인(道人)이 집을 찾아와 갓난 호암을 덥석 안아보더니 다음과 같은 충고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에게 이래라저래라 절대 하지 마시오. 때가 되면 자기가 알아서 다 할 겁니다.” 그 말을 믿고 호암의 부친은 아들이 제정신 차리길 기다렸겠지만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겠습니까. 여하간 예언대로 호암은 대구에 삼성상회를 차린 뒤 승승장구하지요. 두 번째로 정암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진주시 지수면으로 갔습니다. 구인회 엘지그룹 창업자의 생가가 있다는 지수면 승산마을은 한문마저 뜻깊습니다.
    우리 기업의 산실이라할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다. 왼쪽에 작은 개울이 보인다

    지수(知水)는 물을 안다는 뜻이니 치수(治水)와 같습니다. 여기에 산을 이긴다는 승산(勝山)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지수면 승산마을에는 구(具)씨보다는 김해 허(許)씨의 집성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경남개발공사가 밝혔다는 ‘재벌 관광코스’에 GS그룹이 빠졌다는 것은 뭔가 사연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지금부터 그 원인과 진실을 알아보도록 하지요
    멀리서 본 지수면 승산마을의 전경이다. 산이 마을을 감싸고 돈다. 이른바 회룡고조형의 명당이다.

    먼저 지수면 승산마을이 구인회 창업주의 생가임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승산마을의 진짜 주인공은 지신정(止愼亭) 허준(許駿ㆍ1844~1932) 선생입니다. 영남의 만석꾼으로 불린 허 선생은 부자였을 뿐 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자입니다. 지신정 허준(許駿) 선생은 1844년 12월 7일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태어나 1891년 진사시에 합격해 승정원에서 봉직(奉職)했으나 세상이 시끄럽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습니다. 때는 구한말, 외세의 개입으로 정세가 격동하던 시기였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모범을 보여준 지신정 허준 선생의 고가다

    지신정은 처음에 재령 이씨와 혼인해 큰아들 허만종과 딸을 낳고 함안 조씨를 통해 허만정,허만옥 형제를 낳았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근검절약해 재산을 모았는데 나이 마흔 전후에는 이병철 창업주의 부친처럼 1000여석의 부자가 됐다고 합니다. 지신정은 이 무렵 지수면과 근처에 사는 가난한 농민들에게 땅 200평씩, 모두 800두락을 나눠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땅을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했다면 그는 개화인사가 분명합니다. 이후 독립운동과 육영(育英)사업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는 땅을 농민들에게 나눠준 것 외에도 국고(國庫)가 비면 스스로 채웠고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했습니다. 그가 남긴 일화 첫 번째는 백산상회에 설립에 기여한 것입니다. 백산상회는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ㆍ1885~1943) 선생이 세운 것입니다. 여기서 백산 안희제 선생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갑니다.
    허준-허만정 선생 부자가 도운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다. 백산은 일제가 백범 김구-백야 김좌진과 함께 가장 두려워했던 '삼백'가운데 한분이다

    백산 선생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삼백(三白)’중 한 분입니다. 백산 선생을 제외하면 백범(白凡) 김구선생,청산리 대첩의 주인공인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ㆍ1889~1930)장군이 있지요. 양정의숙 경제과 출신인 백산은 1907년 동래 구포에 구명학교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1908년에는 고향 의령군 입산리에 창남학교를 세웠습니다. 1909년에 대동청년단을 결성해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며 그곳의 여러 독립운동가와 접촉했지요. 그가 1914년 부산에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세운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내외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백산상회는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로 확대돼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조달기관이 됩니다. 바로 이때 백산상회에 돈을 댄 분들이 지신정 허준 선생과 경주 최 부자로 알려진 최준(崔浚ㆍ1884~1970)선생입니다. 한마디로 돈을 돈답게 쓴 분들이지요. 안희제는 이런 활동을 하다 1933년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도 세웠습니다. 백산 선생은 1942년 대종교 일제 탄압 때 대종교 지도자 21명 가운데 포함돼 일제에 체포됐습니다. 감옥에서 일제에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9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중국 목단강 병원에서 순국(殉國)했습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가 의령군 이병철 창업주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습니다. 거기로 가는 도중에는 곽재우 장군의 생가가 있으니 의령 땅은 우리 역사에 걸출한 자취를 남긴 거인(巨人)들의 고장이라고 할 만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흘러갔습니다.

    지신정 허준 선생과 관련된 일화 두 번째는 그의 아들 허만정(許萬正ㆍ1897~1952)선생과 연결됩니다. 지신정선 생이 하루는 아들 만정을 불렀습니다. 둘째아들이 학교를 세운다는 소식에 지신정은 “돈을 어떻게 썼느냐”고 물었습니다. 허만정은 “학교 세우는데 한 번에 털어 넣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지신정은 “잘했다. 돈은 그렇게 써야 한다”고 했지요. 진주여고,즉 진주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를 위해‘털어 넣은’ 돈이 논 3만3000평,전 470평과 대지였으며 그는 일신재단을 만들지요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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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氏와 구氏의 만남과 지수면의 놀라운 산세
    주(曉州) 허만정은 남해대교 아래쪽,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한 사당 충렬사에도 돈을 보냈습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 일부러 이름 정(正)에 갓머리(宀)를 씌웠다고 하지요. 
    그런가 하며 그는 백정(白丁)들의 해방운동도 지원했습니다. 
    이렇게 덕(德)을 쌓았기에 그가 살던 지수면은 6ㆍ25 때도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 전 우익들이 좌익을 해치려 하면 중간에서 설득해 좌익을 살렸고 전쟁이 벌어진 후에는 인민군이 우익을 검거해 살해하려 하자 그가 중간에 나서 말렸습니다. 
    빨치산들도 그의 의로움을 알았기에 지수면을 해치지 않았다고 하지요. 
    한마디로 좌와 우에서 모두 존경받은 것입니다. 
    그는 삼성과 엘지그룹이 창업할 때 종자돈을 댔습니다. 
    그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는데 하나같이 한국 기업계의 거목으로 성장합니다.
    먼저 그의 큰아들 허정구(許鼎九 1911~1999) 전 삼양통상 명예회장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삼성을 세울 때 아버지의 명(命)을 받고 삼성으로 가 초대 삼성물산 
    사장을 지냈습니다. 
    둘째가 허학구 새로닉스 회장,셋째가 허준구 전 엘지건설 명예회장,넷째가 허신구 엘지석유화학 고문,다섯째가 허완구 승산 대표이사 회장,여섯째가 허승효, 
    일곱째가 허승표,여덟째가 허승조씨입니다. 
    장남 허정구 회장의 자손으로는 장남 허남각 삼양통상 회장,차남 허동수 GS칼텍스 회장,삼남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이 있습니다. 
    삼남 허준구 회장은 일찍 작고한 작은아버지 허만옥,즉 허만정 선생의 동생 집안에 양자가 됐습니다. 
    그의 자손으로는 허창수 GS 회장, 허정수 GS네오텍 회장,허진수 GS칼텍스 부회장,허명수 GS건설 부회장,허태수 GS홈쇼핑 부회장이 있습니다.
    허남각 삼양통상 회장의 댁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고즈넉하다

    허정구 회장의 자손들이 태어난 곳은 한옥의 기품이 살아있다

    앞에 간단히 기록했지만 효주 허만정 선생의 차남 허학구 선생에도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그는 경기고를 다니며 운동을 해서 힘이 좋았지요. 어느 날 허학구는 조선 학생들을 괴롭히던 일본 형사 요시다를 계동 골목에서 만나 실컷 두들겨팼습니다. 이때 함께 있던 인물이 훗날 남로당(南勞黨)의 거물이 된 박갑동(朴甲東)이었습니다. 둘은 나란히 퇴학당하고 일본 유학을 떠났는데 허학구는 메이지(明治)대를,박갑동은 와세다대를 다녔지요. 이때 박갑동의 학비를 허씨 집안에서 댔습니다. 해방 후 박갑동이 박헌영(朴憲永)의 비서로 있을 때, 허학구는 고향 지수면에서 이장을 하고 있었지요. 해방 후 좌우익의 충돌시기부터 6ㆍ25때까지 유학파 엘리트 허학구가 공직 대신 고향을 지키는 이장(里長)을 했다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보도연맹 사건 때 좌익으로 지목된 이들에게 우익의 살생을 미리 알려줘 목숨을 구하도록 했습니다. 보도연맹 연루자들에게 “내일 자네 나오라고 부르거든 절대 나가지 말게. 나가면 죽을 테니 오늘 밤에 피신하는 게 좋겠네”라고 귀띔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이 허씨와 구씨의 만남입니다. 지수면 승산마을을 걷다 보면 중간쯤에 허만정 선생 집이 나오고 정면에서 대문을 봤을 때 왼쪽이 엘지 창업주 구인회 선생의 처가이며 다시 그 왼쪽 집이 구인회 (具仁會) 창업주의 생가입니다. 제가 말한 구인회 선생의 처가란 허만식 선생과 그 딸로 구인회 창업주의 아내가 되는 허을수 등 6남4녀가 살던 곳입니다. 허만정 선생에게 구인회 엘지 창업주는 6촌 사위가 되는데 구 창업주가 1931년 진주에서 포목점인 구인회상점을 운영했지요.
    구인회 엘지 창업주의 생가다

    구인회 엘지 창업주의 생가에 붙은 방산정이라는 현판이다. 방산정은 마을을 둘러싼 방어산을 줄인 말로 보인다

    1947년 훗날 엘지그룹의 모태가 되는 락희(樂喜)화학공업사를 세울 때 허만정 선생은 돈을 대며 3남 허준구를 경영에 참여시켰습니다. 지금의 LG그룹과 GS그룹의 동업은 무려 57년이나 이어지다 잡음 없이 ‘아름다운 이별’로 나뉘지요. 허씨와 구씨들은 돈을 사회에 환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지수면에는 1921년과 1961년 각각 세워진 수혜불망비가 있는데 1921년 것은 허만정 선생 별채에서 수년간 숙식을 해결하던 걸인(乞人) 중에 식자(識者)가 은공을 잊지 못해 세운 것이지요. 이외에도 허만정 선생의 자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재산을 기부했는데 이런 전통은 구인회 창업주의 자손들에게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구인회 창업주는 구자경-구자승-구자학-구자두-구자일-구자극 등 아들을 남겼지요.
    허준 선생의 차남 효주 허만정 선생의 집이다. 앞에 있는 나무안내판을 읽어보면 이 집에서 태어난 기업인이 현재 우리나라를 이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허준 선생의 차남 효주 허만정 선생의 바로 옆집이다. 이 집의 허씨 딸이 훗날 구인회씨와 결혼을 했다. 구인회 회장은 허만정 선생의 조카사위가 됐다

    허준 선생의 차남 효주 허만정 선생의 집 현판이다

    구인회 창업주에게는 구철회-구정회-구태회-구평회-구두회 등 다섯 동생이 있는데 구철회 회장의 자손은 구자원 LIG넥스원 회장을 비롯해 구자성-구자훈 -구자준이 있습니다. 셋째 동생 구정회 회장의 자손으론 구자윤-구형우-구자헌-구자섭-구자민이,구태회 회장의 자손으론 구자홍-구자엽-구자명-구자철이, 구평회 회장의 자손으론 구자열-구자용-구자균이 있습니다. 구본무 현재 엘지그룹 회장은 구자경 명예회장의 장남이며 동생으로 구본능-구본준-구본식씨가 있습니다. 엘지그룹 후계자인 구광모씨는 이른바 구씨 가문의 4세대로 1978년생입니다. 마지막으로 지수면의 산세를 살펴봅니다. 지수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방어산(防禦山)입니다. 말 그대로 방비를 한다는 뜻인데 이 산이 마을을 한 바퀴 돌아 감싸니 그 한가운데 허씨 집성촌은 풍수에서 말하는 회룡고조(回龍顧祖)의 명당입니다. 그런가 하면 동네 앞에는 밥상처럼 생긴 안산(案山)이 있으니 부자 터임을 알 수 있지요. 과연 지수면에는 일본 강점기 때도 만석꾼 한 집,오천석꾼 세 집,천석꾼 여덟 집 정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자가 많았으니 당시에도 영업용 택시가 두대나 있었다지요. 앞서 말한 지수초등학교에는 삼성 이병철,엘지 구인회 창업주 외에도 효성 조홍제 창업주가 동창입니다. 이병철-조홍제-허정구 세 명이 동업을 할 때 세 별이 모였다고 해서 회사 이름을 ‘삼성(三星)’을 지었다는 말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끝으로 지수면에서 마지막으로 둘러봐야 할 곳은 연당(蓮塘),즉 연꽃이 가득 피어 있는 작은 연못입니다. 지금은 계절이 그래서 다 시들었지만 이 연당은 조선 효종이 북벌(北閥)을 꾀할 때 ‘관서오호장(關西五虎將)’의 한 분으로 꼽혔던 허동립(許東岦ㆍ1601~1662) 장군이 바로 이 집을 지었다고 하지요. 무과에 급제해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副摠管)을 지낸 장군은 지략과 용맹이 출중해 이완 대장 등과 함께 효종의 북벌 선봉에 나설 재목으로 꼽혔습니다. 허동립 장군이 세상을 떴을 때 현종은 다음과 같은 제문을 내려 애석함을 나타냈습니다. “황조의 중세에 근심이 서북변방에 있어 장수의 재목을 뽑아 쓰는데 순차적으로 하지 않도록 명령했을 때 오직 다섯 사람이 있었으니 그중 한 사람이 경(卿) 이었다. 붉은 끈으로 서쪽 남방에서 애연한 치성이었도다. 다섯번은 장수의 직임을 맡았고 여섯번은 중군을 도왔도다. 어쩌다 한번 든 병으로 갑자기 가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솥바위와 연결된 재벌 스토리를 관광상품화하려면 GS그룹의 초석뿐 아니라 삼성-효성그룹의 씨를 뿌린 지신정 허준 선생과 효주 허만정 선생을 반드시 포함해야겠지요. 여기에 이병철 창업주-구인회 창업주-조홍제 창업주를 포함한다면 가히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과정을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더욱이 이들은 지금의 재벌들과 달리 독립운동이나 학교설립,가난한 농민돕기 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니 더욱 뜻이 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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