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28 만공선사와 김일엽과 예산 수덕사

浮萍草 2015. 10. 10. 00:00
    物慾을 멀리하는 만공스님이 천년의 보물인 거문고를 가지게 된 이유
     
    ▲ (左)만공스님의 초상화다.스님은 수덕사가 덕수총림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右) 수덕사 일주문을 지나 언덕을 오르다보면 역사깊은 대웅전이 보인다
    로부터 충남 홍성군 갈산면은‘홍주골’혹은‘홍주마을’로 불렸습니다. 마을에 ‘수덕’이라는 도령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집니다. 명문가의 자제인 그가 어느 날 사냥 나갔다가 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름이 ‘덕숭’이라고 했습니다. 수덕 도령의 끈질긴 구애(求愛)를 받은 덕숭 낭자는 사랑을 허락하겠노라며 한가지 조건을 제시했지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지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수덕 도령이 짓던 절은 완공 직전 불타버렸습니다. 마지막 순간 탐욕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짓기 시작한 절도 비슷한 시기에 소실(燒失)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도령은 부처님만 생각하며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이렇게 절이 지어지자 둘은 결혼했지만 낭자는 도령이 몸에 손대는 걸 한사코 꺼렸습니다. 젊은 도령은 육욕(肉慾)을 견디기 힘들어했습니다. 도령은 싫다는 낭자를 힘껏 끌어안았습니다. 그 순간 뇌성벽력이 일며 낭자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정신을 차린 도령의 손에는 낭자의 버선 한쪽만 남아있었습니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化身)이었습니다. 이후 도령이 지은 절은‘수덕사(修德寺)’로,뒷산은 ‘덕숭산(德崇山)’으로 불렸습니다. 중국 역사서인‘북사(北史)’‘수서(隨書)’‘주서(周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 동진(東晋)에서 온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 땅에 불교를 전한 뒤 승려와 절과 탑이 많아졌다.” 거기엔 절 이름도 나열돼 있지요. 흥륜사(興輪寺)-왕흥사(王興寺)-칠악사(漆岳寺)-사자사(師子寺)-미륵사(彌勒寺)-제석정사(帝釋精寺) 등 12개 사찰인데 이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절은 수덕사 뿐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내용은 전설일 뿐이지만 기록상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이 재위했을 때 창건된 것으로 우리 학계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추정은 수덕사에서 백제기와가 발견됐기 때문이며 삼국유사(三國遺事)·속고승전(續高僧傳)에도 고승 혜현(惠現)이 여기서 법화경(法華經)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요. 역사 깊은 수덕사는 고승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그 가운데 근대 고승으로는 단연 경허(鏡虛·1846~1912)스님과 만공(滿空·1871~1946)스님이 꼽힙니다. 두 분에 힘입어 수덕사는 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으로 꼽히며 1984년 총림(叢林)으로 승격되지요. 걸출한 선사(禪師)의 힘은 이렇듯 위대합니다.
    수덕사 대웅전이다. 비오는 어느날 오후, 아버지가 마당에 아이를 목마태우고있다.

    수덕사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탑의 꼭대기다. 불교의 정화를 상징하듯 금빛이 찬란하다.

    원래 수덕사는 1911년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 선포하면서 조선의 사찰을 30본산제로 바꿀 때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말사(末寺)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절이 ‘근대 선풍(禪風)을 진작한 선지종찰’로 위상을 드높였으니 수덕사의 경허-만공스님 자랑은 대단합니다
    수덕사의 범종을 들으며 숱한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수덕사에는 여러 보물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신비로운 것이 바로 거문고입니다. 현재 성보(聖寶)박물관에 보관 중인 거문고는 원래 고려 공민왕이 만든 것입니다. 풍류를 즐긴 이 거문고는 공민왕이 신령한 오동나무를 얻어 만든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지요.
    공민왕이 신령스런 오동나무로 만들었다는 거문고다. 이 거문고는 만공스님에게 왔다가 지금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있다.

    공민왕의 거문고는 고려말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에게 넘어갔다가 조선이 성립된 후 왕실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이후 거문고는 조선이 망하기 직전까지 왕가에서 후대로 잘 전수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 거문고의 ‘신상(身上)’에 변동이 생깁니다. 거문고는 고종의 둘째 왕자인 의친왕 이강(李堈)에게 전해졌는데 그게 만공스님에게 넘어간 사연은 만공스님이 운현궁으로 의친왕을 찾아가며 시작됩니다. 만공스님은 덕숭산 임야가 이왕직(李王職) 소유로 넘어간 것을 되돌리려 그곳을 찾았습니다. 첫 대면에서 만공스님은 일장 법문으로 의친왕을 감동시켰습니다.
    수덕사 대웅전 바로 밑에 있는 만공기념관에는 만공스님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돼있다.

    수덕사 대웅전 바로 밑에 있는 만공기념관에는 만공스님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돼있다. 세 번의 절로 만공스님을 스승으로 삼고 불법에 귀의할 것을 다짐한 의친왕은 신표를 내리겠다고 합니다. 만공스님은 사찰 임야 문제를 꺼내 의친왕으로부터 바로잡겠다는 약속을 받지요. 의친왕은 말했습니다. “절의 땅을 절로 되돌려주는 것은 당연하니 그것을 신표로 삼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만공스님은 빙그레 웃으며“정 그러시면 저 벽에 걸린 거문고를 내려주십시오”라고 부탁합니다. 천 년 보물을 달라는 말에 의친왕은 놀라고 말지요. 잠시 망설이던 의친왕은 며칠 뒤 사람을 시켜 수덕사 만공스님에게 거문고를 보냅니다. 이때부터 수덕사 소림초당 앞 갱진교(更進橋)에서는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끊어질 듯 이어지는 거문고 타는 소리가 때때로 울려 퍼졌습니다. 만공스님의 연주지요. 그렇다면 만공스님은 어떤 분일까요? 그는 1871년 전북 태인읍 상일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선비인 송신통(宋神通),어머니는 김씨로 어릴 적 이름은 바우였습니다. 바우가 두살 때 아버지는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속세에 살면서 세속을 일할 아이같지가 않아…. 불문(佛門)에 들어 고승이 될 것 같아.” 이 말을 한지 9년 뒤 바우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납니다. 바우가 열세살 때 홀로된 어머니는 바우와 함께 전북 김제 금산사(金山寺)에 갔습니다. 아들의 장수를 기원하려 미륵부처를 찾아간 것입니다. 미륵은 아시다시피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후 56억 7000만년 후 사바세계에 강림한다는 분입니다. 미륵불을 보는 순간 바우는 알 수 없는 기쁨에 들떠 소리를 지르며 부처님께 세 번 절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어머니는 세상을 뜬 남편이 생전에 남긴 예언이 생각나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후 바우는 어머니에게 언제 금산사에 다시 가느냐고 칭얼댔습니다. 이유를 묻는 어머니에게 바우는 말하지요. “꿈에 미륵부처님이 나타나 절 업어주셨기 때문이에요.” 결국 바우는 1년 뒤인 열네살 때 지게 하나를 달랑 지고 출가했습니다. 그가 승려가 된 과정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처음 찾아간 곳은 태인읍의 봉서사였는데 행자(行者) 생활을 하는 동안 온갖 잡일을 다해야 한다는 말에 놀라 줄행랑을 놓고 말지요. 봉서사를 나온 바우가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전주 승주군 송광사였습니다. 거기서 바우는 노스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지요. “같은 나무라도 목수를 잘만나야 큰집 대들보로 다듬어지는 법, 땔나무꾼을 만나면 장작밖에 안 돼 불에 타 없어지느니라.” 그는 노스님으로부터 ‘진암 노스님이 계시는 논산 쌍계사로 가보거라’라는 말을 듣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거지꼴이 되다시피 쌍계사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진암 노스님이 계룡산 동학사에 있다는 말을 듣고 실망하지만 다시 동학사로 향합니다. 나흘 만에 동학사에 도착했을 때 바우는 마당에 앉아 풀을 뽑는 노스님을 보게 되지요. 그 노스님이 바로 진암스님이었는데 바우는 부모의 승낙서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겨날 위기를 맞습니다. 그때 바우는 노스님께 당돌하게 대들었습니다. “제가 진암 노스님을 만나뵙기 위해 몇백리 길을 걸어왔는데 이렇게 갈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바우를 받아들입니다. 1884년 5월 행자 생활을 시작한 바우는 행자로 불문에 들어간 지 다섯달만인 그해 10월 운명적인 만나지요. 진암을 뵙기 위해 찾아온 집채만 한 체구에 사자 갈기 같은 수염을 휘날리는 스님이 일주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가 바로 충청도 서산 천장암에서 수행하던 경허스님이었습니다. 진암은 경허스님을 만난 자리에서 바우를 돌봐달라고 부탁합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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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허스님이 만공스님에게 들은 生과死에 대한 질문
    만공스님의 스승인 경허스님이다. 이 사제의 관계는 상상할 수 없는 일화로 점철돼있다.
    대의 고승이자 사제관계인 경허와 만공스님의 관계를 몇 가지 일화(逸話)로 소개해보겠습니다. 먼저 두 스님이 탁발을 나설 때였습니다. 그날따라 운이 좋았는지 두 스님은 시주를 많이 받아 바랑이 묵직 했습니다. 경허와 달리 만공스님은 힘에 부쳤습니다. “아이고 죽겠네” 소리를 만공스님이 연발하자 갑자기 경허스님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지나가던 젊은 아낙네의 얼굴을 감싸쥐더니 입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아낙네가 물동이를 놓쳐 깨뜨리자 요란한 소리가 났고 마을 사람들이 달려나왔습니다. “저놈들 잡아요!” 여인의 앙칼진 목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몽둥이를 들고 두 스님을 쫓기 시작했지요. 두 스님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차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추격을 따돌리고 두 사람은 산속에서 마주쳤습니다. 만공은 부아가 치밀었지요. 그때 경허스님이 껄걸 웃더니 묻는 것이었습니다. “너 죽으라고 도망칠 때도 바랑이 무겁더냐?”만공이“정신없이 도망치느라 무거운지 가벼운지 몰랐다”고 하자 경허스님은 말했습니다. “그것 봐다 무겁느니 괴롭느니 하는 게 다 마음의 장난이니라.” 만공이 견성(見性)했을 때 둘이 나눈 대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경허가 묻습니다. “생과 사는 어떠한고?” 만공이 답합니다. “다들 도를 깨달으면 살고 죽는 것이 없다 하였으니 제가 아는 바는 그렇지 아니하며 혹은 살기도 하고 혹은 죽기도 합니다.” 다시 경허가 묻습니다.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이던고?” 만공이 말합니다. “얻은 것도 없거니와 잃은 것도 없사옵니다.” 이때 ‘딱’ ‘딱’ ‘딱’하고 죽비 세 번 내려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경허스님은 제자에게 더 이상 물을 게 없었지요. 구름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雲月溪山處處同) 수산선자의 대가풍이여(叟山禪子大家風) 은근히 무문인을 분부하노니(慇懃分付無文印) 한 조각 권세 기틀 안중에 살았구나(一段機權活眼中)
    이렇게 제자의 성장을 목도한 경허스님은 천장암을 만공에게 맡기고 홀연히 떠납니다.
    산에 사자가 두 마리 있을 필요는 없겠지요. 그가 남긴 말은“잘 있거라, 난 이만 갈란다”였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역류하려 용쓰는 일반인과는 다른 모습이었지요. 먼 훗날 경허스님은 함경도 삼수갑산의 웅이방(熊耳方)이라는 곳에서 열반에 든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스승이 숨졌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간 만공스님은 경허스님이 승려도 아닌 행색으로 유랑하며 시를 읊조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다 숨진 걸 알게 됩니다. 삼수갑산에서 경허스님은 박난주(朴蘭舟)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만공스님은 스승에게 이런 게송(偈頌)을 바칩니다.
    수덕사 선미술관 앞에는 고뇌하는 스님의 모습이 새겨진 작품이 있다

    . ‘착하기는 부처님보다 더했고 사납기는 호랑이보다 더했던 분,경허선사여! 천화하여 어느 곳으로 가셨나이까? 술에 취해 꽃 속에 계십니까.’ 수덕사에선 경허-만공스님의 관계 못지않게 만공스님과 김일엽스님의 관계도 유명합니다. 김일엽이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도록 합니다. 1896년 태어나 1971년 숨진 김일엽은 평남 용강에서 5남매의 장녀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원주(元周)였습니다. 아버지는 김용경 목사였지는데 5대 독자로 결혼한 지 6년 만에 얻은 첫 자식이 김일엽이었습니다. 어머니 이말대는 17세 때 집안의 강요로 초혼에 상처한 22세 홀아비 김용겸과 억지 결혼했지요. 김일엽은 네 동생을 뒀지만 모두 요절했습니다. 개화(開化)된 아버지 덕에 어렸을 적부터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배운 김일엽은 아홉살 때 구세소학교(救世小學校)에 입학했으며 1906년 삼숭보통여학교에 입학 했습니다. 이때의 친구가 현해탄에 몸을 던지‘사(死)의 찬미’로 유명한 가수 윤심덕이었습니다. 김일엽의 어머니는 그녀가 9살 때 숨졌습니다. 아버지는 계모 한은총과 결혼했는데 어머니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야당의 대표인사가 된 정일형(鄭一亨)입니다. 그의 아들은 정대철,정일형의 아내가 한국 최초의 변호사 이태영 여사였습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잇달아 동생들을 저 세상을 떠나보낸 김일엽은 훗날 이런 회고를 남겼습니다
    만공스님이 한때 수도했던 서산 간월암이다.

    “불행히 불공평한 운명의 손에 번롱을 받아 파란 많고 곡절 많은 생활에 슬픔과 눈물로 지내든 처녀 시대를 면하고 새 가정을 지내게 된 지 어느덧 새 겨울을 맞게 되었나이다. 파란 많던 처녀 시대에 비하여 지금의 새 생활은 실로 안온하고 따뜻한 것이외다. 그러나 꽃 웃는 아침,달 돋는 저녁에 마루 위에 고요히 앉아 불귀의 객 되신 양친을 애모하는 회포로 기꺼운 현재를 깨뜨리는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없나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평양성 내 공동묘지에 모시었으니까 물론 교육들의 돌봄이 있을 것이고 더구나 전 조선인의 대표적 독신자로 모든 신자의 선앙과 존경을 받으셨으니까 염려가 적지만은 어머니는 외딴 우리 본촌에 벌판을 내려보는 한적한 산 위에 외로이 묻히셨나이다.” 사별과 이별의 상흔을 가슴 깊이 담았던 김일엽은 용강에서 만난 친구 윤심덕,교육인 박인덕과 교유했으며 훗날 나혜석과도 절친한 사이가 됩니다. 1912년 삼숭학교를 마친 그는 같은 학교 보습과(補習科)에 진학했다가 1913년 이화학당에 입학하지요. 이화학당에서 문학동아리 이문회(以文會)에서 활동하던 김일엽은 재학시절 한 부자 집 아들과 혼담이 오갔지만 파혼당하고 맙니다. 그때 이 부자 집 아들은 그녀에게 위로금조로 집 한 채와 많은 땅을 줬습니다. 김일엽은 이때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간월암에서 바라본 낙조다. 화엄세계가 이처럼 장엄할 것이다.

    "(비록 많은 돈을 갖게 됐지만) 내 창자를 위로할 만한 음식과 한서(寒暑)를 피할 만한 옷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는 1914년 이화학당 중등부를 마치고 이화학당 대학 예과로 진학해 1918년 3월 졸업한 뒤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간호사과정을 수료합니다. 그리곤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가 닛신여학교에서 몇달 공부한 뒤 귀국해 그해 여름 정동교회에서 연희전문학교 화학교사 이노익과 결혼합니다. 당시 40세였던 이노익은 미국 웨슬리언대학를 졸업했지만 다리가 하나 없는 장애인이었습니다. 18살이나 차이가 나는 이혼남 이노익과의 결혼을 김일엽의 친구들은 말렸습니다. 그는 외할머니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결혼을 강행했지만 사랑은 없었습니다. 회고록에 임장화-백성욱 같은 남자이름은 등장하지만 첫 남편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니까요. 후일담이지만 김일엽은 결혼할 때만 해도 이노익이 총각인 줄로만 알았고 의족을 한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고 하지요. 이노익의 첫 배우자가 거기 놀라 첫날밤 도망쳤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친구를 통해 들었으니 그 충격이 상당히 심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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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엽의 다사다난한 문학인생
    
    1919년 남편의 도움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김일엽은 허영숙,이광수 등과 교류하면서 잡지 ‘여자계(女子界)’의 주간으로 일하던 신여성 나혜석과 만납니다. 
    그 영향 탓인지 김일엽은 귀국 후 조선에서 여성잡지를 발간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일본에서부터 김일엽은 숱한 남자를 만나게 되지요. 
    이노익과 이혼한 뒤 유학생 시절 만난 시인 임장화와 훗날 동거하는데 이를 두고 김동인(金東仁)은“보금자리를 마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나혜석 때도 언급했지만 김일엽도 이광수와 관계가 있지요.
    ‘일엽’이라는 호는 이광수가 일본의 유명 작가 히구치 이치요 (樋口一葉·1872~1896)처럼 한국의 이치요가 되라고 김일엽에게 붙여준 필명이었습니다. 
    김일엽은 훗날 작가로 활동할 때도 승려로 출가한 후에도 일엽이라는 법명을 사용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일엽이라는 이름은 달마대사와 연관이 있음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달마대사는 나뭇잎으로 만든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설화가 있는데 이것에서 유래한 것 이름이 바로 ‘일엽’이라는 뜻으로 훗날 그의 출가와 연관이 됩니다.
    김일엽은 일본유학 중 3·1운동 소식을 듣고 국내로 돌아와 만세 운동에 참가하다가 헌병대에 끌려갑니다. 
    그때 그는 만세 운동의 실패와 강대국에 좌우되는 국제 정세에 실망하면서 그 대안으로 여성 계몽운동과 언론활동을 시작합니다.
    옹산 전 수덕사 주지스님이 지은 선 미술관은 아담하지만 예술미가 넘친다. 이곳에는 일엽스님의 아들 일당스님의 그림도 두점 전시돼있다

    . 1920년 3월, 최초의 여성주의 잡지‘신여자’를 창간했으며 이 지면을 통해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공개적인 글을 주고받으며 주목받습니다. 당시 ‘신여자’의 필진은 나혜석-박인덕-김활란-김명순-차미리사 등으로 쟁쟁했지만 4호로 폐간됩니다. ‘신여자’가 폐간된 뒤 김일엽은 다시 일본으로, 남편 이노익은 미국으로 떠나면서 이혼합니다. 그는 일본에서 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 법대생 오오타 세이죠와 사귀며 결혼하려 했으나 남자 집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지요. 오오타 집안에서는 그녀가 조선인 출신에,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의 딸이었으며 장애인 남편을 버렸다는 이유로 반대합니다. 둘의 만남은 동경 히비야공원에서 이뤄졌는데 어느 날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둘은 여관에 들어가 육체관계를 맺었다고 합니다. 이때 가진 아이가 훗날 어머니처럼 출가한 일당스님(1922~2014)이지요. 오오타는 도쿄은행장의 아들인데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정한 일본군 장수였다고 합니다. 김일엽은 아들을 낳은 후 오오타의 만류에도 귀국하고 말지요. 귀국 후 김일엽은 일본에서 만났던 임노월과 재회한 뒤 동거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임노월 역시 일찍 결혼해 본처가 있었던 것을 김일엽은 뒤늦게 압니다. 이에 실망한 김일엽은 1923년 9월 수덕사에 갔다가 우연히 만공스님의 법문을 듣습니다. 김일엽은 자신의 복잡한 연애가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나는 피해를 준 적이 없는데 왜 타자(他者)들이 나의 연애 문제에 개입하려 드느냐”며 항변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유부남과의 연애나 애정관계를 옹호하는 입장이었기에 사람들은 그의 발언에 민감했습니다.
    수덕사 대웅전에서 견성암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건물의 대문이름이 불이문이다.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뜻에서 이 문을 통과해야만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상징이다.

    이후 김일엽은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철학자이자 불교학자 백성욱과 동거합니다. 그의 자서전 ‘청춘을 불사르고’를 보면 백성욱이 불교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할 무렵 만나 친하게 되었으며 연인으로 발전해 7~8개월 사랑을 나눴다고 고백하지요. 하지만 백성욱은“우리 둘 사이는 인연이 다했다”는 편지를 남기고 잠적한 뒤 1930년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됩니다. 갑자기 백성욱이 떠난 뒤 받은 충격과 백성욱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실화 소설 ‘희생’에 잘 나타나있지만 방황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김일엽은 이노익-오오타-임장화-백성욱 외에 친구 유덕의 애인인 방인근(方仁根)과 삼각관계로 스캔들을 일으켰고 동아일보 기자 국기열(鞠錡烈)와 동거 하는가하면 춘원 이광수와도 사랑에 빠졌으니 요즘 시각으로 봐도 뜨거운 뉴스메이커였습니다. 결국 김일엽은 1928년 4월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신림암(神林庵)에서 3개월간 수행한 뒤 경성 선학원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았지만 다시 대처승 하윤과 1929년 8월 대구에서 공식적으론 두 번째 재혼을 하게 됩니다. 원래 불교에 관심이 많았지만 하윤실스님과 재혼 후 그는 여러 스님과 교유합니다. 그리곤 마침내 1931년 승려가 되기로 결심하지요. 김일엽은 당시 심정을 나혜석에게 털어놓는데 나혜석은 “현실 도피로 종교를 선택해선 안 된다”고 면박을 주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함께 승려가 되자’는 김일엽의 청을 거절했던 나혜석이 1935년 마음이 바뀌어 승려가 되려고 했을 때는 김일엽이 거절했다는 사실입니다. 여하간 김일엽은 1933년 공식적으로 이혼하고 남자들과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맙니다. 여기서 김일엽과 나혜석의 후일담을 살펴보겠습니다. 나혜석은 이혼한 뒤 수덕사 바로 앞 수덕여관에서 김일엽과 재회합니다.
    수덕여관의 모습이다. 오른쪽에 돌에 여관이름이 새겨져있다.

    수덕여관은 미술가 이응로가 머물며 작품활동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큰 바위에 이응로가 조각을 해놓았다

    수덕여관 뒷편이 환희대다. 이 경계로 속세와 불국토가 갈린다.

    승려가 되겠다는 나혜석의 청에 못 이겨 만공스님을 만나게 하지만 만공스님은 나혜석에게“당신은 색기(色氣)가 지나쳐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요. 그 후로도 나혜석은 6년 동안이나 수덕여관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수덕여관은 작지만 정갈하다. 지금은 비어있다.

    수덕여관 간판 앞에 백일홍이 피어있다.

    일엽스님의 책을 읽고 출가한 옹산 전 수덕사 주지가 지은 선 미술관 앞에는 예술은 인간의 영혼이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다.

    김일엽은 1933년 9월 수덕사 견성암에서 만공스님 상좌가 됩니다.
    수덕사 견성암은 비구니 도량으로 유명하다. 만공스님과 비구니들이 기념촬영한 모습이다.

    수덕사 견성암의 현판이다.

    견성암은 현대식 건물로 재건축됐다

    견성암 앞 나무 밑 기왓장에 새겨놓은 글귀다.

    그는 ‘글도 망상(妄想)의 근원’이라는 만공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절필하는데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년)과 ‘청춘을 불사르고’(1962년)가 나온 것은 30여년 뒤의 일입니다. 1934년 김일엽은 만공스님에게 하엽당 백련도엽 비구니(荷葉堂 白蓮道葉 比丘尼)라는 당호(堂號)와 도호(道號)가 담긴 전법게(傳法偈)를 받습니다. 이것은 ‘일엽이 연꽃처럼 되고 성품도 백련과 같으니 도를 이루는 비구니가 되었도다’라는 뜻입니다. 승려생활 초기만 해도 언론은 그를 잊지 않고 ‘김일엽 여사의 동냥승’(삼천리 1935년 1월호)‘법당에서 참선으로 청춘을 잊는 김일엽 여사(가인 독수공방기)’(삼천리, 같은 해 8월호)같은 기사를 내놓지만 그는 세상에서 서서히 잊히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의 인연은 질긴 법,어느 날 일엽스님에게 열네살 된 소년이 찾아왔으니 그가 일본인 오오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김태신(훗날 일당스님)이었습니다. 아들에게 일엽스님은“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거절하지요. 아들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사랑했던 남자 오오타가 찾아오지만 일엽은 그를 만나지 않습니다. 오오타는 이후 외교관이 됐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1970년 독일에서 세상을 떠났지요. 1962년 일엽 스님의 책 ‘청춘을 불사르고’는 세상에 파란을 일으킵니다. 영화배우 김지미가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는가 하면 수덕사 전 주지 옹산(翁山)은“스님의 책을 읽은 뒤 경북 김천의 집을 떠나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으며 수덕사로 왔다”고 했습니다.
    옹산 수덕사 전 주지스님은 일엽스님의 책을 읽고 출가했다.

    1960년부터 견성암에서 환희대로 거처를 옮길 무렵 유행가 한 곡이 발표됩니다
    갈림길에 서있는 표지판이다. 왼쪽은 환희대, 오른쪽은 대웅전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이 견성암에서 옮겨와 열반에 들때까지 일엽스님이 머물렀던 환희대다

    환희대의 이름은 지금 보광당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유명한 ‘수덕사의 여승’으로, 가수 송춘희가 부른 이 노래는 대히트를 쳤습니다. 일부 승려는 노래가 일엽스님을 연상킨다며 가사를 바꾸라고 항의하기도 했지요.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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