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27 사도와 정조와 수원화성

浮萍草 2015. 9. 26. 10:37
    뒤주에서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가 명당에 묻힌 이유
    정조와 아버지 사도세자가 나란히 잠들어있는 건릉(왼쪽)과 융릉(오른쪽)이다
    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가운데 조선왕릉이 있습니다. 세계에 현존(現存)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벽한 형태를 보존하고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습니다. 그런데 이 왕릉을 자세히 보면 특이한 점을 한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살펴볼까요? 맨 먼저 경기도 구리시에 동구릉(東九陵)이 있습니다. 동구릉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문종-선조-현종-영조-헌종 등 6명의 왕이 잠들어있지요. 인근 홍유릉(洪裕陵)에는 비운의 왕이라 할 고종과 순종이 있고 남양주의 광해군 묘 광릉(光陵)에는 세조가 묻혀 있습니다. 태강릉(泰康陵)에 명종, 의릉(懿陵)에는 경종,헌인릉에 태종과 순조,선정릉에 성종과 중종,서오릉(西五陵)에 예종-숙종,서삼릉(西三陵)에 인종-철종,경기도 파주 장릉에는 인조가 묻혀 있습니다. 경기도 여주에는 세종과 효종이 묻힌 영릉,강원도 영월에는 단종이 묻힌 장릉이 있지요. 이밖에 왕비들이 있는 김포 장릉과 파주 삼릉과 온릉 및 연산군 묘가 있습니다. 황해도 개성에는 정종이 묻힌 후릉이 있고요. 이 왕릉들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왕릉들이 대부분 서울과 서울을 주변으로 한 경기도 북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릉이 수도 한양을 경계로‘백리 이내’여야 한다는 불문율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숨진 단종의 강원도 영월의 장릉을 예외로 하면 특이하게도 특이하게도 사도(思悼) 세자의 융릉(隆陵)과 그 아들 정조의 건릉(健陵)만은 수원 남부 화성에 있습니다.
    융릉은 조선의 왕릉가운데 4대 명당에 속한다.

    건릉의 전경이다. 융릉이 비해 뭔가 답답한 느낌이 든다.

    건릉과 비교하면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은 사방이 툭트인데다 뒷편의 산세가 예사롭지않다.

    수원 중심부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를 달려야 융건릉이 나타나는데 풍수(風水)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없는 제 눈에도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이 아들 정조의 건릉 보다 나아 보였습니다. 뭔가 탁 트였는데 정조의 건릉은 답답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지요. 융건릉 관리인에게 이런 감상을 전하자 그는 “땅을 볼 줄 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보니 그냥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하자 그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왕릉 중 풍수적으로 뛰어난 곳이 네곳 있습니다. 가장 좋은 곳은 동구릉 가운데도 태조 이성계가 묻힌 곳,여주 신륵사 인근의 영릉,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있는 단종묘가 그렇지요. 나머지 한곳이 바로 이곳의 융릉입니다. 거긴 이유가 있어요.” 그분이 말한 바로는 융릉은 능을 감싸는 청룡과 백호가 겹친 곳이며 천하 명당이라는 겁니다. 또 능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이 능이 용(龍)이 여의주를 물고 희롱하는 격의 형세라는 겁니다. 용은 원래 승천(昇天)해야 하는데 하도 여의주가 예뻐서 하늘로 가지 않고 희롱하느라 소일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왜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세상을 뜬 그가 이렇게 좋은 곳에 묻힌 걸까요? 관리인은 “아들 정조께서 전국의 풍수사를 총동원해 찾았다”고 합니다.
    정조의 초상화 뒤로 펼쳐진 십장생 병풍. 하지만 정조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조선은 급격한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정조가 이 땅을 발견했을 때 한가지 난관이 있었습니다. 원래 왕릉에는 수도 한양에서 백리 이내여야 하는데 실제로 서울 경계선에서 융건릉은 백리가 살짝 넘는다지요. 하지만 워낙 명당이어서 그냥 이곳을 ‘백리(百里)안’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원래 이곳에는 수원읍부(府)가 있었으나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관청을 지금의 수원시 쪽으로 옮기고 능을 만들었습니다. 효심이 지극했던 아들 정조는 원래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 바로 옆에 묻혔는데 정조의 왕비가 돌아가셨을 때 보니 흉한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사도세자 인근에서 땅을 찾은 게 건릉인데 풍수적으로 그리 빼어난 곳은 아니라는 게 중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지요. 왜 단종이 묻힌 청령포의 묘는 명당이라는 걸까요? 옆길로 새는 것 같지만 알아보고 넘어갑니다. 삼촌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은 사방이 물길로 막힌 영월로 보내진 뒤 곧 살해당했습니다. 17세의 짧은 생애를 마친 것이지요.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왕의 시신이 강에 둥둥 떠다니는데도 아무도 거두지 않았지요. 이것을 보다 못한 영월호장 엄흥도라는 분이 삼족(三族)이 멸할 각오로 몰래 시신을 거둔 뒤 도을지산에 매장했는데 원래 이곳은 자기 가족묘를 쓰려고 준비해둔 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엄흥도 일가의 가족묘가 천하의 명당이라는 것입니다.
    장안문은 오래도록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뜻이다. 정조는 이곳에서 왕조의 새로운 도약을 꿈꿨을 것이다.

    장안문안에서 한 외국인이 사진을 찍고있다. 수원화성은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수원 화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화홍문이다. 홍은 무지개를 뜻하는데 밑으로 쏟아져내린 물결에서 무지개가 피었을 것이다.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일대는 화성 관광의 백미다

    청령포 장릉 한쪽 편에는 엄흥도(嚴興道) 정려각(旌閭閣)이 서 있습니다. 내용을 봅니다. “이 비각은 엄흥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충신 엄흥도가 영월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관풍헌에서 1457년 10월24일 조정에서 내려진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순조 33년(1833)에 공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런 걸 보면 몇 가지 느낌이 듭니다. 첫째 일개 호장 엄흥도는 의로운 일을 해 사후(死後)이긴 하지만 판서로 추증됐다는 점,둘째는 엄흥도의 충절을 기린 영조가 정작 제 아들을 죽이고 그 손자 정조가 천하명당 융릉을 세웠다는 게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사실 제가 융건릉을 가게 된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최근 수원 화성(華城)에 흠뻑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십 대 중반에 서울에서 그다지 멀지도 않은 그곳을 처음 가본 게 부끄럽지만 주말마다 성곽을 한 발씩 힘주어 밟으며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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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의 역작, 화성이 세워진 이유
    방화수류정에서 한 선생님이 초등학생들을 놓고 정조의 암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나도 모르게 그 재미있는 설명에 빠져들었다.

    방화수류정은 지붕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옛 건물 뒤로 현대도시의 스카이라인이 교차한다

    화성행궁의 좌익문 앞에 서면 중양문-봉수전이 정확히 일치한다
    국-프랑스에서 본 고성(古城) 못지않게 화성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행궁(行宮)에서 시작해 창룡문(蒼龍門)-방화수류정(訪花随柳亭)-화홍문(華虹門)까지 두 번째는 팔달문(八達門)-장안문(長安門)-화홍문까지 답사했지요. 여름에 시작했으니 주말마다 겨울을 거쳐 내년 봄까지 가볼 요량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은 정조(正祖ㆍ1752~1800)의 역작입니다. 길이 5.7㎞, 면적 1.2㎢인 화성은 단순한 성곽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신도시지요.
    화홍문 밑의 수로는 지금 시민들의 산책로가 됐다

    과연 화성은 어떠한 이유로 만들어진 것일까요? 여기서 바로 최근 개봉한 영화 ‘사도’에 등장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부자 관계입니다. 이 부자의 비극을 알려면 우선 그 가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먼저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소생이었습니다. 숙빈 최씨는 훗날 영의정에 추존된 최효원(崔孝元)의 딸로,궁에 들어온 시점이 엇갈립니다. 7살 때 무수리로 들어왔다는 설이 먼저 있습니다. 다른 설에 따르면 12살 때 인현왕후를 따라 들어왔다는 것인데 변치않는 사실은 그의 신분이 ‘무수리’였다는 것입니다. 무수리는 한자로‘수사(水賜)’라고도 하는데 어원은 몽골어입니다. ‘소녀’라는 뜻이라는데 고려말 공주의 여종을 뜻했습니다. 훗날 숙빈 최씨가 되는 최 무수리는 매우 예뻤는지 숙종의 총애를 받았기에 장희빈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 난관에서도 1693년 첫아들 영수(永壽)를 출산해 숙원(淑媛)이 되지만 영수는 두 달 만에 숨집니다. 둘째 아들인 영조는 이듬해 태어났습니다. 최 무수리가 숙종의 눈에 든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야밤에 숙종이 궁을 거니는데 불켜진 방을 발견했습니다. 들어가 보니 무수리가 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지요. ‘무슨 일이냐’는 숙종의 물음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지요.
    이 독특한 건물을 공심돈이라고 한다. 적의 동태를 살피는 역할이다

    “오늘이 폐비가 되신 중전마마(인현왕후)의 생신이라 간단히 상을 차려놓고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들부들 떠는 그녀가 숙종은 얼마나 귀여웠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숙종은 장희빈의 바가지에 시달리며 인현왕후를 폐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난 숙종은 가끔 최 무수리의 방에 드나들었고 마침내 아이를 낳게 됐다는 것입니다. 왕의 자손을 낳자 최 무수리는 숙원에서 숙의,귀의,숙빈으로 봉해지는데 숙빈은 정1품에 해당하지요. 그녀는 끝내 왕비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이유는 인현왕후가 1701년 죽은 뒤 숙종이 ‘제2의 장희빈’을 겁내 궁녀가 왕비가 되는 걸 막았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무수리 어머니를 둔 영조는 즉위한 이후에도 숱한 구설수에 시달렸던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스스로 더 완벽해지려고 노력했겠지요. 사도세자는 영조의 아내 가운데 정성왕후 서씨-정순왕후 김씨-정빈 이씨 소생이 아닌 영빈 이씨 소생입니다. 영조는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사도세자 화평옹주-화협옹주-화완옹주 등 1남3녀를 낳았지요. 그밖에 숙의 문씨는 두 딸을 낳았습니다. 원래 영조는 맏아들 이행을 세자로 삼았지만 이행은 10살 때 죽었습니다. 그리고 무려 7년을 기다린 끝에 사도를 낳았으니 얼마나 귀여워했겠습니까? 태어난 지 1년 만에 세자가 된 사도의 본명은 선(愃), 자는 윤관이며 호는 의재(毅齋)였습니다. 어릴 적 사도는 무척 똑똑했다고 합니다. 행동거지도 의젓했고 3살 때 아버지 영조와 대신들 앞에서 효경(孝經)을 읽고 ‘천지왕춘(天地王春)’이란 글을 썼는데 무척 힘있는 필체였다고 합니다. 이걸 본 대신들이 서로 그 글을 달라고 졸라댔습니다.
    연무대에서 바라본 창룡문. 드넓은 풀밭사이로 대중교통수단이 오가는 모습이 이채롭다

    흐뭇해진 영조는 세자에게 “아가, 네가 주고 싶은 사람을 가리키라”고 명령하니 세자는 도제조 김흥경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영조는 “세자도 대신을 아는구나”라며 흡족한 웃음을 띠었습니다. 이후에도 영조의 아들 자랑은 계속 됐지요. 조선왕조실록 영조 편에는 ‘근일에 세자가 문왕장을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일찍이 명주와 무명베를 보고 사치와 검소를 구분하여 무명옷 입기를 청했으니 매우 기특하다’는 내용이 나오고 ‘체인(體認)의 공부를 안다’는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체인의 공부라는 것은 사도가 저녁상을 받다 영조가 부르자 입안의 밥을 즉시 뱉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묻자 사도는 “소학(小學)에 이르기를 입에 밥을 물었으면 뱉어야 된다고 하였다”고 했는데 이걸 본 영조가 ‘체인’이란 말을 꺼낸 거지요. 무수리에게서 태어난 콤플렉스를 느끼던 영조는 스스로 엄격하려했고 역시 왕비가 아닌 궁인에게서 즉 서자(庶子) 격으로 태어난 사도에게도 자신과 같은 길을 걷도록 했지만,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예술과 무술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수원 화성의 남대문격인 팔달문이다. 서울의 숭례문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다

    이렇게 부자의 사이는 벌어지는데 훗날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는 남편 사도의 정신이 이상하게 된 원인을 시아버지 영조에게서 찾습니다. 즉 영조가 태어난 지 백일도 안 된 사도를 경종의 왕비인 선의왕후가 살던 저승전에 머물게 했다는 거지요. 저승전은 사후 간다는 ‘저승’을 연상시키지만 한문으로는 저승(儲承)이라고 쓰며 동궁,즉 세자가 머무는 거처였습니다. 그런 저승전은 선의왕후 사후 계속 비어 있던 곳이고 하필이면 근처에 장희빈이 머물며 인현왕후를 저주했던 취선당이 있었으니 어린 사도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기는커녕 방치된 거지요. 혜경궁 홍씨는 또 사도를 보살핀 궁인(宮人)들에 대해서도 지적합니다. 즉 영조가 사도를 선의왕후를 모시던 궁인들로 하여금 보살피게 했는데 여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집권 내내 받았는데 그런 의혹을 떨쳐내려 선의왕후 측 여인에게 자기 아들을 맡기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 달리 선의왕후 측 궁인 가운데 최상궁과 한상궁이라는 여인은 사도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를 업신여기고 모자(母子)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이런 내용은 정조가 쓴 ‘현륭원 행장’에도 나타납니다.
    연무대는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곳이다

    어쨌든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고 말 많은 여자들 사이에서 자라났으며 아버지에게 사사건건 간섭(큰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긴 하지만)당하면서 사도는 점점 스트레스를 받아갑니다. 일례로 사도가 스트레스로 어지럼 증세를 보였을 때의 일입니다. 대신들이 영조에게 지나친 간섭을 하지 말라고 하자 영조는 “애들은 원래 다 그러고 크는 거다. 내버려 두면 낫는다”고 대꾸했습니다. 대신들이 재차 간언하자 영조는 버럭 화를 내면 “내가 세자에게 물어보니 책만 보면 어지럽다고 한다. 그러니 치료 따윈 필요 없다”고 하지요. 이 에피소드는 승정원일기 1743년 11월10일과 14일 자에 나오는 것인데 이때 사도의 나이는 9세 이미 그때부터 부자의 사이는 틀어지고 맙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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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세자를 둘러싼 갑론을박 희생설
    성벽에 난 구멍으로 내다본 수원의 모습이다
    침내 1755년부터 사도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입니다. 그해 4월28일 사도를 진찰한 약방 도제조 이천보는“동궁(사도)이 요즘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는데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그렇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하지요. 증세는 점점 심해져 아버지 영조를 만나는걸 기피하고 옷을 입기 싫어하며 훗날엔 발작증세까지 보입니다. 1760년부터 사도는 나인들과 환관들을 죽이고 자살을 기도했으며 마침내 자기 아들인 은전군을 낳은 경빈 박씨를 때려죽이기에 이릅니다. 이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볼까요? 경빈 박씨는 원래 숙종의 둘째 부인 인원왕후 김씨의 나인이었으며 이름은 빙애였습니다. 그런 빙애를 사도세자가 범하는데 윗사람이 부리던 나인을 건드리는 것은 윗사람의 물건을 취한 것과 똑 같은 금기사항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영조는 매우 분개했는데 평소 성품이 강직한 경빈 박씨는 사도의 비행을 자주 시아버지에게 고해바친 것입니다. 이걸 안 사도는 화가 나 1761년 자기 아내를 살해하는데 이런 사실은 사도의 다른 잘못과 함께 1년 뒤 나경언(羅景彦)에 의해 영조에게 보고되지요. 이렇게 사도세자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자 집권 노론은 환희작약합니다. 사도가 소론을 중용해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도의 약점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반격을 가할 기회를 맞게 됐다고 판단한 거지요. 나경언의 고발은 바로 이런 구도에서 나온 겁니다. 그렇다면 나경언의 고발은 무슨 내용일까요? 첫째 사도가 왕손의 어미,즉 경빈 박씨를 죽였으며 둘째 여승(女僧)을 궁으로 불러들여 풍기를 어지럽게 했고 셋째 서로(西路)에 행역했으며 넷째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사도가 시전 상인들에게 돈까지 빌렸다는 내용은 훗날 영조가 대신 돈을 갚은 데서 밝혀지지요. 서로에 행역했다는 말은 관서(關西)지방을 관람했다는 뜻인데 이것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세자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예를 들면 기생파티 등)이나 반역을 꾀했다는 암시로 보면 무방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 영조의 허락 없이 떠난 북성의 유람도 비슷한 맥락이겠습니다. 영조는 나경언의 고발이 있은지 얼마 안 돼 사도를 뒤주에 가둬 죽였으며 나경언 역시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하지요. 일각에선 사도세자가 노론과 소론의 권력 다툼에서 희생양이 됐다는 설도 있는데 여기서 제가 인용하고 싶은 것은 역사평론가 이덕일 선생이 쓴‘사도세자의 고백’ 이라는 책에 나오는 특이한 분석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는데 골자를 볼까요? 이씨는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가해자라고 주장합니다. 즉 혜경궁 홍씨는 풍산 홍씨 일파를 대변하는 여걸인데 자신의 가문과 노론을 지키기 위해 남편을 희생시켰다는 거지요. 사도세자는 사실 소론의 지지를 받았기에 이런 설이 나오겠지요.
    화성행궁의 정전 봉수당의 내부 모습이다.

    사도세자가 소론을 등에 업고 노론을 치려 하자 노론 벽파가 나서는데 바로 이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인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과 혜경궁 홍씨였던 겁니다. 이들은 사도세자를 광인(狂人), 즉 미친놈을 몰았고 끝에 뒤주에 갇히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펄쩍 뛰지요. 혜경궁 홍씨는 정치적 인물이 아니며 사도가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했다지만 실권이 없었고 이덕일씨는 앞서 말했듯 노론의 벽파와 시파가 사건 당시 갈린 것으로 보지만 벽파-시파는 그 8년 후 분리됐다는 겁니다. 이런 파장만장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정조는 어릴 적부터 스트레스 즉 울화병이 극심했다고 합니다. 철저한 할아버지의 눈에 들어야 하고 11살 때 아버지의 비극을 견뎌내야 했으니 왕이 되면서 비극으로 점철된 한양을 떠날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정조가 이런 결심을 한 건 반대파가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 즉 죄인(사도)의 아들(정조)은 군왕이 될 수 없다며 나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정조는 아버지의 명예회복이야말로 자기의 정통성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조는 1776년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설치했으며 13년 후 양주 배봉산의 사도세자 무덤이었던 영우원(永祐圓)을 앞서 말한 수원의 현륭원,즉 지금의 융건릉으로 옮깁니다. 아버지의 능을 옮긴 지 5년 뒤 정조는 다시 화성건설에 나섭니다. 정치개혁을 위한 자신의 새로운 지역적 기반,그것이 바로 화성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수원 화성을 눈여겨보게 된 것일까요? 거기엔 17세기 실학자 반계 유형원의 혜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한양이 싫었던 정조는 신도시 화성으로의 천도를 꿈꿨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팔달산 아래의 신읍(지금의 수원시)은 구읍(화성시)에 비해 지형상 그 규모가 크며 낮고 평평한 구릉만 있을 뿐 대부분 평야지대로 이곳에 축성해 읍치로 삼는다면 실로 대도회지로 발전할 수 있다”며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지요. 즉 1만 호를 수용할 적지(適地)라고 한 것인데 실제 수원은 지형상 서울과 삼남(충청-경상-전라도)에 가까운 요충지였다는 것입니다. 훗날 이 글을 본 정조는“반계야말로 오늘의 국사와 현실에 유용한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대학자”라고 격찬합니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며 한양 방비도 생각했습니다. 즉 한양을 중심으로 북쪽의 북한산성과 개성의 대흥산성, 서쪽의 강화도성과 문수산성, 동쪽의 남한산성에 남쪽의 수원 화성을 더하면 한양의 외곽방비체제가 완벽하게 확립된다고 본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정조는 중국 한당(漢唐)시대의 수도 장안(長安)을 모델로 삼았으며 몇몇 건물의 이름도 차용했습니다. 장안문-신풍루-장락당 등이 그것이지요. 수원 화성은 2년9개월이라는 초단기간에 완성됐는데 거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수원화성의 정문인 장안문. 화성은 중국 장안을 본 딴 신도시였다

    흙으로 쌓을 경우 인력이 많이 들어가 석축(石築)을 하려 했는데 기적적으로 성을 쌓기 한 달 전 팔달산 서쪽의 숙지산(熟知山ㆍ영복여고 뒷산)과 여기산(麗岐山) 에서 석맥이 발견된 것입니다. 여기에 다산 정약용이 왕명을 받아 만든 거중기를 사용했으니 공기가 획기적으로 단축된 것이지요.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정조는 화성이 완공된 후인 1800년 6월14일 급사합니다. 새 세상을 만들자는 꿈이 건강 때문에 무산된 것인데 따지고 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원인이었습니다. 정조 사후 조선은 어린 순조가 외척들의 세도정치에 휘둘리면서 세계사에서 뒤처지게 됐고 정조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76년 만에 일본과 강화도 수호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으면서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다시 34년만에 일본에 병합되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우리의 멀지않은 역사였습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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