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26 진짜 홍길동과 허균

浮萍草 2015. 9. 19. 00:00
    기록과 유적으로 살펴보는 홍길동의 발자취
    이곳이 홍길동 생가라고 장성군이 만들어놓은 공원이다. 좌측에 보이는 정자가 활빈정이다.
    남 장성 축령산에서 조림왕(造林王) 임종국(林種國)선생 취재를 마친 뒤 흥미로운 표지판을 발견했습니다. 부근에 홍길동 생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허균(許筠ㆍ1569~1618)의 소설 주인공인 그가 실존 인물이란 이야기는 들었지만 생가는 이번에 처음 가봤습니다. 제 눈앞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한옥군(群)이 펼쳐졌습니다. 활빈정(活貧亭)이란 정자를 지나 다리를 건너니 생가라는 건물이 나오는데 마당으로 들어가다 깜짝 놀랐습니다.
    홍길동 생가의 활빈정은 누가 붙였는지 절묘한 이름이다.

    무릎을 꿇고 있는 홍길동의 동상과 대청에서 호령하는 아버지 인형이 보였습니다.
    홍길동 동상은 아무리 봐도 중년으로 보인다.표정도 우울하다.

    무슨 근거로 만들었는지 아들 홍길동은 늙수그레한 중년 같아 보였는데 정작 아버지는 소년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아들은 동상, 아버지는 인형인데 생가 뒤 초가집에서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컴컴한 내부에 바느질하는 여자 인형이 보인 겁니다.
    생가 뒷켠의 초가로 들어설 때 조심하시길 바란다. 어두컴컴한 방에 갑자기 여자 인형이 불쑥 보여 소름이 쫙 끼쳤다.

    알고 보니 홍길동의 생모(生母)라는데 공포영화를 선전할 때 등장하는‘노약자와 임산부는 관람 금지’라는 경고문이라도 붙여야 할 것 같이 기괴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넓은 공간에 관람객은 저를 포함해 딱 두팀뿐인 겁니다. 민선 1-2-3대 군수(郡守)를 내리 역임하신 분께서 자신의 야심 찬 치적(治績)이라 믿고 넓디넓은 홍길동 생가를 조성한 것 같다고 확신한 것은 그가 남긴 글 때문 입니다. ‘홍길동의 영웅적 삶을 추모하며’라는 제목의 글을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홍길동 생가로 가는 길이다. 앞에 보이는 한옥이 생가다.

    장성군은 매년 홍길동 축제를 연다

    홍길동 생가로 들어서는 순간 놀라게된다. 텅빈 공간에 웬 인형과 동상만 보인다.

    "그는 고려 명문가 후손으로 무등의 정기를 받아 퉁퉁바위 염원을 안고 남도의 평화로운 마을 아치실에서 태어났으나 서자를 차별하는 국법에 묶여 사나이 울분을 가슴에 묻고 헐벗은 민중의 횃불이 되어 이 땅의 어둠을 밝히던 자유민권 운동의 선구자. 이 땅을 떠난 지 오백년 뱃길로 삼천리 낯선 이국 땅 저 멀리 일본 오키나와 열도에 만민평등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세계화의 선봉에 서서 동(東)중국해를 무대로 웅혼한 기개를 떨치던 대한의 남아 홍길동,오늘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이 글에 등장하는‘퉁퉁바위’는 무엇일까요? 전북 장수군지(誌)에 따르면 장수군 계남면에서 장안산으로 뚫린 도로를 따라 1km쯤 가면 장안리(내동)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 산자락에 높이 3m,둘레 10여m 의‘동암(銅岩)’이란 바위가 있었습니다. 이 바위가 퉁퉁바위 혹은 베틀바위로 불리는 것은 퉁퉁 베 짜는 소리가 났다는 겁니다. 옥황상제는 하늘에서 내려다본 내동(內洞)을 안타깝게 여겼다지요. 토지도 비옥하고 어미 닭이 새끼 품듯 명산(名山)도 있는데 딱 하나 없는 게 있었습니다. 베를 짜는 기술이었지요. 생각 끝에 옥황상제는 베 짜는 기술을 가진 선녀를 보냈고 이 선녀가 동암에 베 짜는 모습을 보던 마을 사람들이 마침내 기술을 익혔다는 것입니다. 소임을 다한 선녀는 마을이 부유해지자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등천(登天)했다지요. 그런데 왜 전남 장성의 홍길동에게 전북 장수의 선녀 스토리를 엮어놓은 것일까요? 허균의 소설 속 홍길동이 의적(義賊)으로 그려졌긴 하지만‘민중의 횃불’‘자유 민권운동의 선구자’로 마치 70~80년대의 민주화 투사처럼 둔갑시킨 것도 이해가 안 갑니다. 게다가 홍길동이 오키나와 해상에 왕국을 건설했다는 것은 역사 속에 나오는 류쿠(流球)왕국 부근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이게 사실(史實)일까요? 오키나와에서도 이런 사실을 알 텐데 한국인의 역사 인식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참으로 궁금해졌습니다. 이런 인식을 깔고 저는 장성군이 소개하는 홍길동을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장성군에 따르면 홍길동(洪吉童)은 1446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아치실에서 양반 아버지,노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신분은 소설과 일치하지요. 장성군은 그의 가계도까지 설치해놓았는데 홍길동의 선조는 남양 홍씨입니다. 이중 홍규-홍주는 고려 때 각각 남양 부원군을 지냈다는 것입니다. 홍 길동의 부친은 홍상직(洪尙直)으로 귀동(貴童)-일동(逸童)-길동 등 세 아들을 뒀습니다.
    홍길동 집안의 가계도다. 고려시대부터 명문이었다.

    홍길동의 실존 증거로는 명문가의 족보를 모아 성씨별로 주요 인물만을 기록해놓은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에도 나옵니다. 여기서 홍길동은 형 일동과 함께 홍상직의 아들로 이름이 올라와 있고 ‘도술(道術)을 부렸던 자’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만성대동보에 등장하는 홍길동을 보여주는 자료다.

    홍길동이 실존인물임을 보여주는 사료다.

    이 역시 허균의 소설에 등장하는 기인(奇人)적인 행동과 일치합니다. 그런가 하면 황윤석의 ‘증보해동이적(增補海東異蹟)’,이희준의‘계서야담(溪西野談)’,이원명의 ‘동야휘집(東野彙輯)’에도 홍길동이 등장합니다. 증보해동이적에는 이 가운데 홍길동의 이야기가 비교적 자세하게 등장하는데 한번 살펴보도록 합니다. ‘옛적에 듣자니,국조(國朝) 중엽 이전에 홍길동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재상 홍일동의 동생이다. 재기를 믿고 스스로 호탕해하였지만, 과거를 보아 청훈과 현직을 맡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국법에 구속되자 하루아침에 홀연히 도망갔다. 후에 명나라 사신으로 갔던 자의 말이,명나라 조정에 해외 일국의 사신이 왕의 표문을 올렸는데 성이 홍씨였다. ‘공(共)’자 밑에 ‘수(水)’자를 하였으니 곧 ‘홍(洪)’자로, 이는 길동이 성을 바꿔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뒤에 나오지만 홍길동의 오키나와 열도 진출설은 바로 이‘해동증보이적’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홍길동의 어머니에 대해선 기록이 없는데 구전설화에 따르면 함경도 경성의 기생이었던 옥영향(玉英香)이라고합니다.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것은 홍상직이 함경도 경성(鏡城) 절제사를 지낼 때였다지요. 이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입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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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존인물 홍길동과 달리 의적으로 둔갑시켜 소설로 되살아난 홍길동
    라면서 서얼의 관리등용을 금지하는 경국대전 때문에 과거 치르는 것을 포기한 홍길동은 집을 떠나 양민을 괴롭히는 탐관오리와 토호(土豪)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에게 나눠주는 의적활동을 했다는 장성군의 설명도 소설과 같습니다. 
    장성군의 설명과 별개로 구전설화에 따르면 홍길동은 활빈당을 공주 마곡사 뒤 상원골이라는 곳에서 조직하는데 조직원 가운데는 마(馬)씨 형제도 포함돼 있었다고 
    하지요. 
    최어중이 쓴 ‘현장풍수’란 책에는 공주 상원골의 옛 지명이 ‘마가번둔’입니다. 
    마가(馬家), 즉 마씨 성을 가진 형제들이 진을 친 도적 소굴이라는 뜻이지요.
    홍길동이 연산군 6년인 1500년 관병을 사칭한 ‘강상죄’로 의금부에 투옥된 것까지는 팩트입니다. 
    강상죄란 삼강오륜, 즉 미풍양속을 해친 죄를 말합니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명종 때(1562년 정월),화적패의 두령 임꺽정(林巨正)을 생포하였다고 어전 회의에 보고.이때 왕이 하교하기를 ‘과거 연산6년(1500년) 도적괴수(홍길동)를 놓친 
    예가 있는데 그 때일을 거울삼아 철저히 대비 압송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그가 장성군 주장처럼 류쿠열도 앞서 말한 일본 오키나와 부근의 섬으로 탈출해‘오야케아카하치 홍가와라’로 이름을 바꾸고 이시카키지마(石垣島)-
    오하마무라(大兵村) 등으로 세력을 확장했다는 데서부터 논란이 시작되지요.
    장성군에 따르면 홍길동은 민주화투사요, 해외진출을 이룬 개척자다.

    장성군의 생가엔 없지만 포털 상에는 홍길동과 그 일당의 행적이 연도별로 정리된 것도 보입니다. 홍길동은 조선을 탈출해 1500년 12월 5일 하테루마지마에 정착했으며 1501년부터 1503년까지 이시가키지마 등에 거주지를 조성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시가키지마-오하마무라-후루수토 등에서 지배력을 기른 홍길동은 1504년 미야코지마(宮古島)의 추장 나카소네의 압제와 과중한 세금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원주민을 규합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카소네 집단을 섬 외곽으로 밀어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홍길동은 1505년부터 1508년까지 구메지마(久米島)에 상륙해 추장 마다후쓰를 몰아내고 일본-류쿠왕국-중국을 상대로 중계무역을 하면서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뒤 섬의 요처에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 양식의 성(城)을 구축했다는 겁니다. 홍길동이 70세에 사망한 뒤 그의 후예들은 1609년 일본 싸쓰마번(薩摩幡)의 류쿠왕국 침공으로 오키나와의 지배권을 잃은 뒤 1612년 고국인 조선으로 되돌아와 경상도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이것을 일본의 재침으로 조정이 오인해 관리들이 대거 피난길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가설이지만 재미있는 내용이지요? 장성군은 홍길동이 이시가키지마에 진출한 증거로 이시가키지마에 오야케아카하치 홍가와라를 자유민권운동의 선구자로 추념하는 기념비가 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이것을 검색해보니 포털에는 오야케아카하치(遠弥計赤蜂, 於屋計赤蜂)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홍길동 생가 기념비다

    홍길동을 도적에서 의적으로 탈바꿈시킨 고산 허균의 초상화
    ‘그는 야에야마 제도 이시가키 섬의 오하마 마을(현재의 이시가키 시 오하마)를 근거지로 한 15 세기 말의 호족이다. 홍가와라(洪家王, ホンガワラ),보타케카와(保武川),호리카와 하라(堀川原),타모츠무와(保武瓦) 라고도 불린다.’ 이런 부연 설명도 있었습니다. ‘오야케아카하치가 홍길동과 동일 인물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소수 있지만 근거가 빈약해 한국과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이 주장을 정설로 보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과 연산군일기엔 홍길동이란 강도를 체포한 기록만 있을 뿐 그가 탈옥해 율도국을 세운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장성군은 이런 지적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여놓았습니다. “실존인물 홍길동에 대한 고증자료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의 성종-연산군일기 -중종-선조 편에 홍길동 이름이 수차례 등장한다.” 실록(實錄)에는 어떤 내용이 등장한 걸까요? 연산군일기를 봅니다. 연산군 6년 10월22일에는‘도적 홍길동을 잡았으니 나머지 무리도 소탕하게 하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엿새 뒤엔 ‘홍길동을 도와준 당상 엄귀손의 처벌을 의논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홍길동을 도와준 엄귀손을 끝까지 국문하게 하다’‘정승들에게 홍길동의 무리인 엄귀손이 어찌 당상의 자리에 올랐는지 문책하다’‘홍길동의 죄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관리들을 변방에 보내기로 한다’는 내용도 과연 실록 연산군일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전라도에서 태어나 충청도에서 위세를 떨친 홍길동은 기록대로라면 지금으로 치면 전국구 조폭 두목쯤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의적으로 둔갑한 데는 허균의 영향이 큽니다. 허균은 1606년 충청도 공주목사로 부임합니다. 이때 백성으로부터 공주 무성산을 무대로 활약하던 홍길동의 무용담을 전해듣고 저술한것이 ‘홍길동전’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공주 무성산에는 지금도 홍길동이 축조했다는 성터가 남아있지요. 그런가 하면 그가 살았다는 동굴이 있다는 이야기도 공주시장을 지내고 지금은 전국 최고의 명문고인 공주 한일고 교장으로 재임하는 이준원선생으로부터 들은 바 있습니다. 그는 마곡사와 가까운 무성산 근처에서 전원주택을 짓고 머물고 있지요. 그런데 왜 허균은 홍길동을 의적으로 둔갑시켜 소설로 되살린 것일까요? 이것은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관련이 깊습니다. 허균은 경상감사를 지낸 허엽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문벌과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지요.
    허균의 삶은 홍길동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그가 훗날 복잡한 삶을 산 것은 스승 이달(李達ㆍ1539~1612)을 만나면서 시작됐다는 게 정설입니다. 이달은 당대에 최경창-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불릴 만큼 당시(唐詩)의 대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바로 서얼, 즉 천출(賤出)이었지요. 여러 번 얘기했지만 조선시대 서자(庶子)라는 신분은 천형(天刑)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부모 때문에 비롯됐는데 야망을 펼 공간이 없었지요. 이달을 동정했던 허균이 불합리한 조선의 사회 구조에 눈을 뜨게 됩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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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조반정때 허균만 이중역적으로 몰린 이유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은 짧지만 한많은 일생을 살다
    갔다.
    균은 다섯살 때 글을 배우고 아홉살 때 이미 시를 잘 짓는다는 소문이 날만큼 문재(文才)를 지녔지만 12세 때 아버지 20세 때 둘째형 허봉,21세 때 누이 허난설헌을 잃지만 17세 때 초시에 26세 때 정시에 합격해 승문원 사관으로 벼슬길에 오릅니다. 그는 한때 서애 류성룡에게도 사사했는데 이달에서 받은 영향이 너무 커 비록 자신은 입신양명할 수 있지만 이상주의자요 자유주의자이며 혁명가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천지간의 일대 괴물’ ‘개돼지 같은 행동’이란 비난까지 받게 됩니다. 그의 파격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일화는 많습니다. 29세에 황해도 도사로 나갔을 때 그는 별실(別室)을 만들어 서울 기생을 살게 했지요. 이 사실이 밝혀져 조정의 비난을 받자 반성하긴커녕“남녀 간 정욕은 천(天)이요,예법 행검(行檢)은 성인(聖人)이다. 나는 천에 따를지라도 성인에는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39세에 삼척부사로 있을 때는 유학자이면서도 스님처럼 목에 염주를 목에 걸고 부처를 모셨으며 불경(佛經)을 가까이해 파면당했습니다. 이때도 그는 이렇게 항변했습니다. “예교(禮敎)는 너무나 구속적이다. 세상사 모든 것을 이 마음에 맡기리라. 군은 모름지기 군의 법을 따를 것이요, 나는 스스로 나의 인생에 투철하리라.” 그런가 하면 공주 목사를 지낼 때는 서자들을 뒷바라지하고 천민 평민들과 서슴지 않고 교류하다 파직을 당했습니다. 1610년,즉 광해군 2년 때는 허균이 과거시험의 감독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당해 전북 익산으로 유배됩니다. 벼슬생활 20년 동안 무려 6번이나 파직당했던 허균이 1606년,즉 선조 39년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 하는 종사관이 되고 1614년,즉 광해군 6년에 종2품 겸 진주부사로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것은 그 재주가 남달랐다는 증거입니다. 일례로 선조실록이나 광해군실록에는 허균에 대해 괴물,금수(禽獸),요망(妖妄)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하나같이 나쁜 표현들이지만 정작 그의 글재주와 학문에 대해서 만큼은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수창(酬唱) 외교’때문이었습니다. 조선은 명나라와 외교를 할 때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뜻을 통하도록 했습니다. 수창외교로 유명한 이는 조선 초기 세종-세조 때의 신숙주가 있습니다. 신숙주 이전까지 명의 사신들은 조선 관리들을 비웃었으나 신숙주를 본 뒤 최대의 찬사를 보냅니다.
    즉“동방의 거벽(巨壁)”“굴원(屈原)의 문단에 올랐다”는 찬사를 받은 거지요. 이런 표현을 한 것은 명의 한림학사로 속칭 ‘일급 문사(文士)인 예겸이 한 말이니 신숙주의 시를 짓는 솜씨가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허균 또한 만만치않았지요. 왕에 의해 중용(重用)됐다가 파직-유배를 밥 먹듯 반복하던 허균은 마침내 벼슬에서 물러난 1612년 서자와 천민과 여자들도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꿈을 소설‘홍길동전’으로 풀어냅니다. 그는 실제 홍길동 같은 계획을 꾸미기도 했습니다.
    허균 생가의 안채다. 어린 허균과 허난설헌이 여기서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허균 생가는 넓지않지만 격조높은 선비 집안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옥을 보면 볼수록 기하학적인 문양의 결정체다.

    광해군 5년(1613) 혁명을 도모하고 거사금을 조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는데 그가 조직한 혁명세력의 일원인 박응서가 붙잡히는 바람에 전모가 드러났는데 행인지 불행인지 당시 주모자였던 허균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허균은 오히려 시치미를 뚝 떼고 당시의 권력자인 이이첨에게 접근해 형조판서와 좌찬성이라는 고위직에 오릅니다. 이이첨과 허균은 한때 같은 서당에서 공부했던 사이였지요. 그런 허균도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말을 실증하고 맙니다.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廢母)’와 관련된 논쟁에서 허균은 폐모를 주장하고 실제로 인목대비를 끌어내리지요. 이 일로 허균에게는 불의(不義)라는 낙인이 선비 사회에서 찍히고 맙니다. 이렇게 된 허균이 이이첨에게는 이제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사면초가에 몰린 허균은 “혁명의 뜻을 이루기 전에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하여 다시 한번 혁명을 꿈꾸지만 함께 모사(謀事)했던 현응민이 역모죄로 체포되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1618년 8월 25일 기록에는“허균이 애초에는 (광해군을 밀어내고) 의창군을 추대하는 것으로 계책을 삼았는데 나중에는 허균이 스스로 하고자 하여 결정하지 못 했다”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허균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다는 거지요. 이런 허균의 음모는 기준격의 비밀상소에서 드러납니다. 기준격은 인목대비 폐모론 당시 허균과 대립했던 영의정 기자헌의 아들인데 아버지가 위기를 맞자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허균의 음모를 폭로한 것입니다. 기준격의 비밀상소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허균이 인목대비 아버지인 김제남을 이용해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영창대군을 왕으로 삼은 뒤 군권을 잡아 김제남을 제거하고 자신의 조카사위인 의창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건 발생 나흘 만에 허균은‘자백’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처형됩니다. 기록에도“허균은 아직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결안(자백)할 수 없다면서 붓을 던지고 서명하지 않으니 좌우의 사람들이 핍박하여 서명하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허균을 급히 처치한 것은 이이첨의 음모였다, 광해군에게서 버림받은 것이었다는 설이 지금에도 난무하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현응민의 자백으로 허균은 대역죄인이 돼 1618년 사지가 찢기는 능지처참형을 당하며 생을 마감합니다. 4년 뒤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광해군 때의 역적은 모두 구명됐는데 허균만은 ‘이중(二重) 역적’으로 몰렸습니다. 인목대비 폐모에 앞장섰으니 인조에게도 역적이요,광해군 축출을 꾀했으니 광해군 세력에게도 역적이 된 것입니다. 강원도 강릉의 유명 관광지 경포대 옆 초당마을에는 허균의 생가가 있습니다.
    강릉 초당동에 있는 허균 생가의 정문과 우물이다.

    허균 생가의 방안에서는 소나무가 보인다.
    생가 앞에는 허난설헌의 황동 동상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까운 곳에는 ‘교산(蛟山) 시비’도 있습니다.
    허균 생가에서 가까운 언덕에 교산 시비가 서있다.

    거길 가보면 허균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 선비 집안인지 알 수 있지요. 그뿐 아니라 초당 두부의 유래도 허균의 부친 허엽(許曄ㆍ1517~1580)이 삼척부사로 왔을 때 비롯된 것입니다
    초당동 골목에서 벽화를 그리는 예술가들. 이 마을은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만든 초당두부로 유명해졌다.

    초당 두부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첨언하자면 허엽 역시 언사가 과격했다지요. 부전자전(父傳子傳)은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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