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Her Story

조병국 홀트아동복지회 명예원장

浮萍草 2015. 10. 21. 17:00
    “여자가 무슨 의대냐며 원서 찢어… 아버지 몰래 목도장 파 지원”
    조병국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 명예원장이 지난 14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JW타워에서 중외제약 임직원 대상 강연에 앞서 지난 50년간 버려진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푼 의료 활동을 회상하며 미소 짓고 있다. 김선규 기자 ufokim@
    난 14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JW타워에서 만난 조병국(82)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 명예원장은 너그러운 첫인상에 눈빛도 따뜻했다. 50년 이상 버려진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푼 때문인지 순수한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 원장은 전 세계 6만여 명, ‘한국인 입양아들의 어머니’로 불린다. 조 원장은 의료 시설이 부족하던 시절에 손도 못 써보고 죽은 동생들과 한국전쟁 동안 방치된 아픈 아이들을 보며 소아과 의사가 됐다. 1961년 인턴 시절 홀트아동복지회에 파견 근무를 나간 것이 인연이 돼 지금까지 홀트복지회에서 진료하고 있다. 조 원장은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에서 정년을 두 번 맞았다. 한번은 1993년 60세 때 정년퇴직했지만,후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15년 더 일하고 2008년에 다시 물러났다. 그는 공식적으로 정년 퇴임을 한 상태지만 아직도 이곳에서 여전히 일하고 있다. 이날 조 원장은 JW중외그룹의 공익재단인 중외학술복지재단에서,음지에서 헌신적인 의료봉사활동을 통해 사회적인 본보기가 되는 ‘참된 의료인’을 발굴하기 위해 제정한 ‘제3회 성천상’ 수상 기념으로 중외제약 임직원을 대상으로 강연이 예정돼 있었다. 강연에 앞서 그를 만나 평생을 봉사한 희생적인 삶에 대해 들어볼 기회를 얻었다. 조 원장은 “소아과 의사라는 직업이 천직”이라고 했다. 그는 1933년 평양에서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전쟁과 피란의 고통 속에 어른은 물론 수많은 어린아이가 너무나 쉽게 목숨을 잃던 때였다. 조 원장도 어린 동생들이 병마와 싸우다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조 원장은 어린시절 병을 달고 살았을 정도로 허약했기 때문에 병원에 자주 갔다. 그는 “병원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익숙했기 때문에 의사라는 직업을 큰 부담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고도 했다. 조 원장은 의과대학 입학 당시 면접에서“유아 사망률을 낮추고 싶다”고 대답했다. 너무나 열악한 유아 의료환경이 그가 의대를 지망한 가장 큰 이유였다. 조 원장은 어린 시절부터 의사가 되길 소망했지만,여의사가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비싼 의대 등록금을 걱정한 아버지는 의대 진학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무뚝뚝하고 엄했던 아버지는 큰딸이 내민 의대 입학 지원서를 갈기갈기 찢었다. 하지만 찢겨버린 입학원서도 조 원장의 오랜 꿈을 꺾을 수는 없었다. 죽은 동생들, 엄마 등에 업혀 울던 아이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다른 길은 없었다. 조 원장은 “아버지 목도장을 몰래 파서 지원했다”고 그 당시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도장까지 위조해가며 입학한 의과대학이었지만,소아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후 걸어온 의사의 길은 너무나도 험난했다. 조 원장은 “서울시립아동병원으로 출근한 날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유아 병실의 난로 연통에는 세탁하지 못한 오줌 기저귀가 건조되고 있었다. 겨우 똥 기저귀만 세탁하고 오줌 기저귀는 미처 세탁하지 못해 바로 사용되면서 병실에는 소독약 냄새와 오줌 지린내 등이 뒤섞여 고약한 냄새가 났던 것이었다. 당시에는 친부모로부터 외면당한 아이들이 발견되면 서울시립아동병원으로 보냈다. 정부의 지원 규모에 비해 어린 환자 수가 너무 많았다. 의사와 간호사뿐만 아니라 지원 인력이 턱없이 늘 부족했다. 부족했던 예산 탓인지 서울시가 아동병원을 시립영아원과 합쳤다.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아 동병원 병상 수는 80개 정도에 불과했는데, 갓난아기까지 더해졌다. 연간 환자만 2000명에 육박했다. 조 원장은 “아동병원에서 보던 아이들만 해도 벅찬데 갓난아기 700∼800명이 한꺼번에 맡겨졌다”며“인큐베이터도 없던 시절 이었기에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잃는 아기들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조 원장은 “가장 괴로웠던 시기는 아이들 사망진단서를 내리 13장이나 썼던 날”이라고 했다. 그도 ‘어쩔 수 없다, 내 능력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요즘엔 백일해, 디프테리아,장티푸스 등이 기본 예방접종 대상이지만,그 시절엔 그런 질병으로 수많은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폐렴에 걸려도 항생제가 없어 기증받은 해열제나 수액으로 아이들을 치료할 정도였다. 그래서 조 원장은 아이들을 진료하는 일 외에도 구호활동에도 나섰다. 주말 시립병원 봉사활동에서 얼굴을 익힌 외국 대사관 부인들의 인연을 이용해 외국 구호단체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들의 수술과 치료에 필요한 물품들을 원조해 달라고 손을 내밀었고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시설 확충을 위한 제도적인 개선을 위해 발 벗고 뛰어다녔다. 정부에도 시설을 확충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하루는 정부 관계자가 그를 찾아와 잔뜩 인상을 쓰면서 “더는 외국인들에게 손 벌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정부 쪽 사람들은 그를 ‘국제 거지’ ‘불평 많은 여자’라고 불렀다. 이후 조 원장은 15년간 몸담았던 서울시립아동병원을 떠나 입양기관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에서 입양아들의 주치의가 되기로 했다. 그는 버려진 아이들, 특히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치료만큼이나 부모의 돌봄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턴을 마치고 홀트아동복지회에 파견 근무를 나갔던 적이 있었다. ‘모든 아이에게는 행복한 가정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해리 홀트의 말을 가슴에 담고 있었던 것이 결국 장애와 상관없이 모든 아이에게 가정을 찾아주는 일에 남은 평생을 바치기로 한 이유가 되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을 진료하며 입양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조 원장은 “처음엔 아이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혹시 입양 후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다”며 “몸이 성하지 않은 아이들도 입양되는 것을 보며 안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거친 비난이었다. 아동병원에서 아이들을 외국에 팔아버린다는 비난이 들끓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세계 1위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국외 입양 전면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나중에 국내 입양 수요가 턱없이 부족해 그 조치는 결국 철회되고 말았다. 조 원장은 해외 입양아 가운데 커서 목사가 된 이의 명함을 받고 감명을 받았다. 그 명함에는 ‘아프면 고칠 수도 있고 돈을 잃으면 큰 손해가 나지만 가정을 잃으면 희망을 잃는다’는 글귀였다. 그 글이 힘이 돼 굴욕적인 비난에도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주변의 시선보다 당장 아프고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조 원장은 지난 1993년에 정년 퇴임했다. 자녀들이 있는 캐나다로 떠났지만,홀트아동복지회로부터 다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박봉에 하루에도 수십 명의 장애아 등을 진료해야만 하는 직무로 인해 후임자가 몇개월 만에 그만두고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7년이 지나 2008년 건강상의 이유로 두 번째 정년퇴직했다. 조 원장은 고마운 많은 이 가운데서도 특히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 줬던 남편을 제일 고마운 사람으로 꼽았다. 남편은 한양대 구리병원장을 지낸 이비인후과 전문의 고 김선곤 박사다. 두 사람은 학교 동기로 만나 호감을 보였지만 집 없는 아이들을 위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결혼은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조 원장에게 김 교수는 결혼해도 충분히 일할 수 있다고 청혼했고 그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은퇴하고 나면 같이 무의촌으로 의료봉사를 다녔으면 하던 남편의 바람은 이뤄질 수 없었다. 조 원장이 정년 퇴임을 하고도 15년이나 더 근무하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조 원장은 6만 입양아의 주치의이자 어머니였지만 정작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약속을 안 지키는 엄마였다. 자신의 자녀들도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엄마가 있어야 했는데 응급 환자가 생겨 주말에 놀아주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못했고,참관 학습에는 한 번도 참석해 보질 못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러나 고맙게도 자녀들은 자립정신이 강하고 남들과 잘 어울리며 불쌍한 사람을 많이 돕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조 원장은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홀트 일산복지타운에서 거주하는 장애아들의 건강을 돌보며 봉사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Munhwa ☜     인터뷰 = 박민철 문화일보 경제산업부 차장 mindo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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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성마비 딛고 의대생 된 영수… 딸 이름 ‘말리 병국’이라 지어
    잊을 수 없는 입양아들
    조병국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 명예원장이 젊은
    시절 아이를 진료하는 모습.
    희의 안타까운 죽음, 의대생이 되어 돌아온 영수,의족을 하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아이.’ 조병국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 명예원장은 잊을 수 없는 입양아들이 수없이 많다고 전했다. 지금도 조 원장은 TV를 볼 때, 탤런트 김태희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려던 것을 멈추고 자꾸만 보게 된다고 한다. 그와 남다른 인연이 있어서가 아니다. 조 원장이 기억하는 가장 슬픈 사연의 주인공 이름이 태희다. 어느 날 여자 속바지로 꽁꽁 싸인 채 탯줄과 태반까지 그대로 단 피투성이 갓난아이가 홀트복지회 에 들어왔다. 이런 아이들에게는 보호수속을 밟을 때 의사나 간호사들이 이름을 지어준다. 당시에는 병원장의 성에다 여자아이면‘순’,남자아이면‘석’앞에 가나다순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고 한다. 조 원장은 그 갓난아이에게‘태를 달고 온 여자아이’라는 뜻에서‘태희’라고 이름을 붙여줬다. 태희는 무척 예쁜 아이였는데 4개월 무렵 선천성 심장 기형 진단을 받았지만 수술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유일한 희망으로 외국 입양을 알아봤고 정말 운 좋게 입양이 성사됐다.
    조 원장이 직접 미국에 데리고 갔다. 하지만 입양 후 한 달 만에 태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 원장은“공항에서 떠나보내는 순간까지도 자지러지게 울던 태희를 안았던 팔의 감촉이 아직도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엄마의 태반을 단 채 병원으로 오는 ‘핏덩이’들에게 태희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이번 태희는 제발 오래 살 수 있기를 바라고 좋은 양부모를 만나 불행한 출생을 보상받길 기도했다. 지금도 조 원장은 늘 그 많던 ‘태희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해하고 있다. 조 원장은 9세 때 장애와 가난 때문에 친부모로부터 버려져 홀트복지회로 오게 된 뇌성마비를 앓던 아이 영수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미국으로 입양됐던 영수는 시간이 흐른 뒤, 어엿한 의대생이 되어 조 원장을 찾아왔다. 결혼 후에는 둘째 딸의 이름을 말리 홀트와 조병국 원장의 이름을 딴 ‘말리 병국’이라고 지었을 만큼 두 사람과 특별한 인연을 간직하고 있었다. 조 원장은 기찻길에서 두 다리를 잃은 아이도 특별하다고 했다. 엄마가 아이와 함께 자살을 시도했지만 아이만 다행히 목숨을 구한 것이다. 아이의 입양은 힘든 상태였지만 미국에서 의료 기구를 판매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입양됐다. 양부모는 몇 년 후, 의족을 하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아이의 사진을 보내왔는데 사진을 보고 난 조 원장이 사진을 가슴에 품고 펑펑 울었다고 했다. 아이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조병국
    △ 1933년 평양 출생 △ 연세대 의대(소아과 전공) △ 서울시립아동병원 소아과 의사 △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 근무 △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장

    Munhwa ☜     박민철 문화일보 경제산업부 차장 mindo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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