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Her Story

‘승무’ 예능보유자 이애주

浮萍草 2015. 11. 18. 18:19
    “60년을 춰도 뭔가 허전… 주역(周易) 배우고 ‘자연춤’ 눈떠”
    승무예능보유자인 이애주가 지난 4일 자신의 승무전수관이 있는 경기 과천시 갈현동 관악산 자락에서 즉흥적으로 춤사위를 펼치고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munhwa.com
    '춤꾼’ 이애주(68)는 근래 그가 빠져있는 주역(周易)의 근본 이치처럼 끝없이 변하고 있다. 대중들에게 그는 1980년대 소위 ‘시국춤’으로 흑백사진 속에 갇혀있지만,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는 온전하게 춤만 파고든 춤꾼이었다. 다섯 살에 춤을 시작해 우리 춤을 알리는 해외 공연에 수십 차례 뽑혀 다녔고,스승 한영숙에게‘승무’의 전승자 로 발탁돼 대학 교수직 제안까지 마다하고 춤에 몰두해 결국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예능보유자가 됐다. 한국 춤의 뿌리를 찾아 십여 차례 요동·요서지방을 뒤지고 다녔으며,운명처럼 ‘주역’을 만나 더 깊고 넓게 우리 춤의 철학과 폭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가 잇고 있는, 이른바 ‘고지무지(鼓之舞之)’ 춤과 ‘영가무도(詠歌舞蹈)’는 우리 조상들에게 맥이 닿아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우리 춤의 개념을 바꾸어 갈지 모른다.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는 이제까지, 앞으로도 존재의 생생함을 위해 춤을 춘다는 것이고 그의 춤은 자신과 타인을 ‘치유하는 춤’이라는 것이다. 이애주를 지난 4일 경기 과천 갈현동 자신의 승무전수관에서 만났다. 자주 알려진 예전 얘기는 접고, 내용은 간단치 않았지만, 주역과 춤에 대해 주로 물어보았다. 주역과의 만남은 춤의 뿌리를 찾던 그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온 듯하다. “서울대 교수로 있던 8년 전 제가 동방문화진흥회 홍역학회에서‘주역으로 푸는 요동·요서지방’특강이 있다 길래 갔어요. 당시 춤의 뿌리를 찾다 보니, 제일 많이 춤의 흔적이 남아있는 게 춤무덤(무용총),씨름무덤(각저총) 등 고구려 무덤벽화와 요하문명권인 홍산지역 등을 다닐 때였습니다.” 동방문화진흥회는 근대 주역의 대가인 야산 이달(也山 李達·1889∼1958)의 홍역학(洪易學)을 잇고 연구 하는 모임으로 야산의 제자인 대산 김석진(大山 金碩鎭)이 1980년대 중반 서울 대학로 흥사단 건물에서 ‘주역’ 강의를 하면서 만들어졌다. “특강을 들으러 갔는데, 저보고 다음 번 특강을 해 달라 하여 난처해 하니 그냥 춤이야기 해 달라 하여 그 대로 ‘이애주의 춤 이야기’특강을 했더니 주역을 배웠느냐고 물어요. 주역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하느냐고 해요. 우리 춤의 숨 들이쉬고 내쉬고, 팔을 올리고 내리고, 감고 풀고,몸이 움직이는 방향도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는 게 바로 주역의 음양오행(陰陽五行)인 거죠. 주역을 안 배워도 기본이잖아요. 그랬더니 ‘청고 회장님’이 같이 주역을 공부하자고 했죠.” 청고(靑皐) 이응문 동방문화진흥회 회장을 말한다. 야산의 손자이자,역사학자 이이화의 조카다. 맥이 야산-대산-청고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주역을 시작했잖아요. 그랬더니 거기에 제가 정리하려고 했던 전통춤의 원리,고대문화의 원리, 더 나아가 현재 삶의 원리까지 다 정리돼 있는 거예요, 처음 접해봤는데도. 그럼 이걸 제대로 해봐야겠다,
    주역의 스물여섯 번째 산천대축괘(山天大畜卦)에‘다식전언왕행(多識前言往行)’해‘이축기덕(以畜其德)’한다고 했어요. 선대부터 이어온 말씀을 많이 배워, 그것으로 덕을 쌓는다. 춤도 바로 그겁니다. 저의 승무 스승인 한영숙 선생님,그 할아버지 되시는 한성준 선생님,또 그 위의 고구려,신라 선조들,북방에서 살던 우리 선조들의 몸짓이 축적돼 오늘의‘승무’라는 춤이 나온 거죠. 그러니까 주역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저는 다 춤으로 보여요. 이렇게 하면 다 ‘춤이론’이 되고, 저렇게 하면 ‘문화이론’이 되고.”주역에서 우리 춤의 뿌리를 봤다는 거다. “저는 전통춤을 어려서부터 하면서 몇십 개국을 다녀봤어요. 몸을 자유롭게 움직여 정신과 하나 되고 심신이 자유롭게 해방되는 게 우리 춤이에요. 야산의 ‘홍역학’은 현시대와 미래의 살아 움직이는 삶의 원리, 그러니까 크게 보면 우주 자연의 원리이면서 삶의 법도를 얘기하거든요. 결국은 춤도 그 얘기에요. 내가 왜 춤을 추나, 나 자신이 뭔가, 홍역학을 만나면서 더욱 자유롭게 움직여지는 것이죠.” 이야기는 ‘고지무지’의 춤으로 이어졌다. “야산 선생님은 주역을 책만 보고 한 게 아니에요. 주역의 계사 상전 12장에는 ‘고지무지이진신(鼓之舞之以盡神)’이 나오는데‘북을 두드리고 춤추며 신명을 다한다’는 뜻이에요. 주역 책을 다 몸으로 체득하신 것이에요. 야산이 몸으로 행하며 구체화한‘고지무지’ 춤과 소리는 자연스럽게 나온 삶의 몸짓이고 신명의 극치였어요. 야산은 일생 신명 난 삶을 통해 득도와 해탈의 경지를 얻은 거지요. 그런데 지금 대산 선생님께서 그래요. 댁에서 만나 뵐 때는 설명을 몸짓으로 보여주세요.” 그러니까, 야산과 대산은 주역을 평생 하다 보니 그것이 몸으로 배어 춤으로 나온다는 거다. 그 모양은 어떨까. “예를 들어,주역 계사정의 행신문(行神文)에 ‘천일(天一) 지이(地二) 천삼(天三) 지사(地四)’를 외며 왼발 오른발을 떼며 발걸음을 옮기실 때에는 몸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는 천생 춤꾼 같았어요. 올해 신명행사 때도 선생의 특강이 거의 끝나갈 무렵 야산 경주(庚呪·야산이 지은 36자의 주문)의 마지막 부분을 외며 무릎을 굽혀‘경(庚)’하며 발을 쾅 구를 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온몸으로 ‘혁(革)’이 일어나는 순간이었어요. 나만 흥분되어 신명이 난 게 아니고, 거기 모인 학인들 모두 그러했던 것 같아요.” 대산 선생이 지은‘스승의 길 주역의 길’(2001,한길사)에 보면,실제 1954년 충남 부여 ‘백제서실’이란 공부방에서 야산의 강의가 끝난 뒤 누구의 지시나 구령도 없이, 그곳에서 스승과 제자 모두가 하나가 돼 하룻밤을 꼬박 새워 신명을 다하는 춤을 춘 기록이 있다. 이애주는 이를 고조선 이래 전승된 영고·무천·동맹 등의 공동체 제의였던 집단 가무,‘신인합일(神人合一)’ ‘천일합일(天人合一)’을 이룬 제천의식 가무의 재현 이라고 본다.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몸이 알아서 자연적으로 자기 장단을 갖는 것이다. 주역에서 말하는 대동(大同), 신명의 춤판인 것이다. 이런 공부는 이애주의 춤에 어떤 변화를 주었을까. “중용(中庸)의 첫 구절이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입니다. 하늘이 준 걸 잘 닦고 길러 맘껏 꽃피우고 자유로워지는 것. 제가 어려서부터 했던 걸 정리하고 새 차원으로 자유롭게 나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60년 이상 춤을 추어오면서 주역을 통해 진짜 자연춤을 추게 된 것이죠. 자연과 하나가 되고, 몸과 정신이 하나가 되고. ‘고지무지’의 장단이 즉흥적이고 자연적인 몸 장단인 거처럼.” 자연과 같이하는 춤은 건강에도 좋을 것 같다. 그는 최고 수준의 춤은 단순하고 쉽고 건강에 좋다고 말한다. “그렇죠, 자연은 어렵지 않아요. 서양의 춤이 직선이라면 우리는 직선으로 안 가고 곡선으로 이렇∼게 가서 늘려버리니까 여유가 있어요. 우리는 느림의 삶을 기본으로 깔고 있던 것이죠. 그런데 서양 제도, 문물을 받아들이니까, 속도가 빠르다 보니 우리 자신이 너무 멀리 가버렸어요. 그것을 되돌리려고 공부를 하는 것이죠. 왜곡된 것을 정중지도(正中之道)로 바로 잡고, 버릴 것 버리고 순수한 근원 그대로, 본성 그대로 되게 하는 것이죠.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하니 치유에도 좋죠.” 또 하나, ‘치유의 몸짓’과 관련해서 이애주에게 “번갯불을 치면서”다가온 게 ‘영가무도(詠歌舞蹈)’였다. 단군시대부터 전해왔다는 영가무도 역시 이애주가 전통춤의 뿌리를 찾다가 박상화 옹을 만나며 알게 됐다. 영가무도는 조선조 때 일부 김항(一夫 金恒·1826∼1898)에 의해 되살려졌고,그의 제자 김창부를 거쳐 박 옹에게 전수됐다. “영가무도는 ‘음-아-어-이-우’의 간단한 다섯 소리를 내며 신명의 춤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에요. 다섯 소리 중 ‘음’은 비장, ‘아’는 폐, ‘어’는간장, 이’는 심장,‘우’는 신장에서 비롯되는 소리라, 이런 소리를 깊고 길게 내뿜으면 상응하는 장부들이 좋아져요. 곡선이라고 했잖아요. 소가 울어도 음∼매∼에 이렇게 울잖아요? ‘음매’ 이렇게 안 울고? 그렇게 세 번을 끌고 올라가요. 또 그렇게 세 번을 치면서 내려가고.초장이 있고 중장, 종장이 있어 천지인(天地人)이에요. 모든 것이 ‘삼수철학’입니다. 그것이 여러 번 반복되면 빨라지고, 그다음에 턱까지 차오르면 무도로 변해요. 그렇게 빨라지면서 몸의 아픈 데를 자연스럽게 쳐요. 이게 바로 자연춤으로 신명의 극치로 올라가 정신이 어디 갔는지 내 몸인지 아닌지도 모르고,어느 순간 그럼 쓰러져요. 그다음에 되돌려서 다시 복귀해요, 가영(歌詠)으로.” 춤을 오래 하다 보니 몇 년 전 왼쪽 다리에 무리가 왔었으나 치유의 춤에 단련돼서인가,칠순이 코앞이지만 이애주는 몸놀림이 여전히 민첩하다. 이들 춤의 전수와 강연 등으로 눈코 뜰 틈이 없이 바쁘다. 남기는 거 없이 몸을 불살라 산다. 앞으로 계획을 물어보았다. “형상적인 거나 정신적인 것이 일관지도(一貫之道)하는 그때까지 가는 거지요. 끝이 어딘지 모르지만. 천부경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무시무종(無始無終)처럼,시작도 끝도 없이 수레바퀴가 돈다고 생각해요. 지구가, 우주가 돌 듯이, 인생이 육십갑자로 돌 듯, 춤도 수레바퀴로 도는 법륜(法輪)입니다. 우리가 갈 길이 끝도 시작도 없지만, ‘정중지도’라는 길이 있잖아요. 그 길로 가는 거죠.”
         엄주엽 문화일보 문화부장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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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애주의 ‘춤 인생’ 민중문화운동 첫 세대… 무형문화재 27호
    춤 공연에 ‘판’‘마당’ 용어 처음으로 사용
    '시국춤’에 가려있지만 이애주는‘정통’으로 우리 춤을 배우고 이어온 예술가다. 황해도에 살던 집안이 서울로 이주한 뒤 태어난 그는 유치원 때부터 춤에 소질을 보였다. 신교육을 받은 어머니가 딸을 예술인으로 키우고자 당시 국립국악원에서 무용하던 김보남(1912∼1964)에게 딸을 맡겼다. 김보남은 승무의 맥을 잇는 한성준(1874∼1941) 무용연구소에서 승무·살풀이 등을 배운 이다. 다섯 살 때부터 승무에서 검무까지 익힌 이애주는 학창시절 각종 대회에서 입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한성준의 손녀이자 승무예능보유자인 한영숙(1920∼1989)을 만났고 나중에 이수자로 선택됐다. 선택될 당시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이애주는 모 대학의 교수로 내정돼 있었는데,교수직을 포기하고 ‘승무’를 택했다. 10년을 매진한 끝에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예능보유자가 됐다. 1996년 이후 서울대에서 후학을 양성해오다 2013년 정년 퇴직했다. 이애주는 1970년대 대학가 민중문화운동의 첫 세대이다.
    지난 1987년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진혼의 춤을 추는 이애주 .
    일제의 용어인‘무용’보다‘춤’을 사용했고,춤 공연에서 ‘판’,‘마당’ 등의 말을 처음 쓴 것도 그다. 당시 문화운동의 기수였던 임진택(65)은 이애주의 제부다. 이런 문화운동의 인연으로 1977년 김민기 김석만 이상우 등이 활약하던 연우무대의 개관공연에서 사물놀이의 이광수 김덕수 등의 연주에 맞춰 ‘바람맞이’춤을 추게 됐고,그것이 말도 못하게 히트하며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춤을 춘 것이 이후 ‘80년대’군부독재를 끝내는 시위현장의 춤으로 이어졌다. “그 시대 사람들의 열망이 내 몸을 통해‘바람맞이’ 춤으로 표현됐고,그런 의미에서 춤은 몸의 언어이자 시대의 언어예요. 그냥 바람이 부는 대로 내 몸이 따라간 거지요.” 당시 ‘진혼(鎭魂)’의 춤을 많이 춰, 지금도‘시국적’죽음이 아니면서도 지인들이 상을 당해 망자를 달래는 춤을 춰달라는‘주문’이 적지 않다. 이애주는 가능 하면 기꺼이 응한다. 1990년대 초반,그는 승무에 온몸을 던지게 되면서 ‘시국춤’과는 거리를 두게 되는데,이를 두고 말도 있었지만“왜 나는 춤을 추는가”라는 처음부터 따라다닌 물음의 심연으로 갔을 뿐이다. 이애주는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을 치유하는 춤,그래서 자신도 치유하고 해방으로 가는 춤을 출 뿐이다. 이애주는 대산의 주역원전강의 동영상을 바탕으로 한 ‘주역과 천부경’ 강의를 매주 목요일 오후 7∼9시 서울 대학로 122 흥사단 4층 동방문화진흥회 대강당에서 이어가고 있다. △ 1982∼2013년 서울대 체육교육학과 교수 △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예능보유자 △ 1974년 땅끝 춤판 공연 △ 1977∼1981년 전통춤 해외 순회공연 △ 1984년 춤패 신 창단 △ 1984년 나눔 굿 공연 △ 1984년 도라지꽃 공연 △ 1987년 바람맞이 공연 △ 2000년∼현재 홍역학연구소장
         엄주엽 문화일보 문화부장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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