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25 조림왕 임종국과 조용헌의 축령산 명당

浮萍草 2015. 9. 12. 10:49
    국토 녹화 사업 공헌자 4인 중 한 분은 나무로 나라를 빛낸 인물이다
    장성 축령산 휴양림 안내문이다. 치유의 숲이라는 설명이 보인다.
    털사이트에서‘축령산’이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두 군데가 나옵니다. 수도권인 경기도 남양주 축령산(祝靈山ㆍ해발 886m)과 전남 장성 축령산(해발 620m)가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두 산은 한자(漢字)가 같고 자연 휴양림이 조성된 것도 비슷합니다. 전남 장성 축령산에 간 것은 동양학자 조용헌씨 때문입니다. 그는 최근‘조용헌의 휴휴명당(休休明堂)’이란 책을 냈습니다. 광고는 이 책을“30년 넘게 우리 산하를 누비며 천문-지리-인사를 공부한 그가 우리나라 영지(靈地) 22곳을 엮었다”고 선전합니다. 저는 조용헌씨가 그동안 쓴 책을 모두 읽은 바 있습니다. 무척 재미있었지요. 특히 이런 부류의 글들이 별로 없던 시절이어서 귀중한 정보가 되기도 했고요. 이번에 출판된 책 역시 조선일보‘북스’지면에서 발견했을 때 반가운 마음을 금할 길 없었지요. 기인(奇人)과 이사(異士)를 추적해온 제 눈이 번쩍 떠질 만한 문구였지만 아쉽게도 책은 읽지 못하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가 있다는 ‘휴휴산방’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이럴 때는 현지 주민에게 여쭤보는 것이 제일입니다.
    휴휴산방의 굴뚝이 꼭 돌탑같다

    축령산 둘레길을 걸으면 금세 건강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장성물류IC를 빠져나와 처음 만난 주민에게 묻자“그 집은 편백나무숲이라는 간판을 따라가면 나온다”고 했습니다. 과연 축령산 휴양림은 마을별로 달라 잘못하다가는 헤매기 십상입니다. 추암마을 편백나무 숲에 도착해서 다시 주민에게 물었습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한 여성이 주위를 둘러보며“내가 어제 거길 다녀왔는데 찾기가 어렵다”며 스마트폰에서 사진 한장을 보여줍니다. 그 사진에 등장하는 주소라는 것입니다.
    축령산으로 이어지는 곳은 모두 3개 마을이다.

    질문을 던질 때는 과감해야 하지요. “그래서 명당이라고 느끼셨느냐”고 했지요. 그녀는 “나는 이상하게 기(氣)가 막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고수(高手)와 하수(下手)의 차이가 있겠지…’속으로 이렇게 되뇌며 산길을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산세가 평범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고즈넉한 분위기는커녕 펜션이 즐비했습니다.
    명당이라는 소문이 나자 축령산 기슭에는 펜션이 줄지어 건축되고있다

    조용헌씨 말 대로‘도시인이 꼭 가봐야 할 곳’이 아니라 ‘도시인이 꼭 피해야 할 곳’이라고 느꼈던 것은 명당이란 단어가 연상시키는 이미지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명당은 으레 신령스럽고 조용하며 뒤에는 진산(鎭山),좌우론 좌청룡-우백호가 있다고 믿지요.
    자칭 강호동양학자인 조용헌씨가 머무는 휴휴산방이다

    휴휴산방 앞에 놓인 나무 벤치가 꼭 그림같다

    휴휴산방의 정면 모습이다

    그런데 눈을 크게 뜨고 둘러봐도 등산길 외에 다른 건 뵈지 않고 조씨의 집 뒤에 틀어 앉은 거대한 저택 두 채 뿐이었습니다. 이곳이 명당이 분명하다는 방증은 산 입구부터 내걸린 무슨 펜션 전문 건축업자의 플래카드였습니다. 명당이니 사람들이 몰리겠지요.
    축령산 입구에 있는 추암저수지다

    아! 나는 그가 주장한 이 천하의 명당을 알아볼 안목이 없구나 하고 한탄하며 터덜터덜 내려오는데 진한 편백(扁栢)의 향기가 풍겨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이 ‘히노끼’라고 부르는 이 나무는 최고급 내장재인데 특히 목욕탕 욕조로 많이 쓰이지요. 일본과 한국 남부지방에 분포하는 이 노송나무라고 불리는 식물은 다 자랐을 때 높이가 40m 지름이 2m나 됩니다. 가지는 수평으로 퍼지며 껍질은 적갈색을 띠지요. 그런데 왜 축령산에 편백나무가 그득하게 됐는지를 알게 되면서 저는 경악했습니다.
    이것이 편백나무 잎사귀다

    이 웅장한 편백나무 숲이 임종국(林種國ㆍ1915~1987)씨라는 개인에 의해 조성된 것이며 그가 2001년 4월 ‘20세기 대한민국 국토 녹화에 기여한 공로가 가장 큰 4인’가운데 한명으로 선정됐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분들의 면면을 살펴볼까요? 첫 수상자는 제가 기인이사 14편에 보도한 ‘박정희와 메타세콰이어 길’의 주인공인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입니다. 임종국 선생을 제외한 두 분은 김이만(1901~1985)선생과 현신규(1911~1986) 박사입니다. 이분들은 어떤 공적이 있는 걸까요.
    故 임종국 선생은 전남 장성 편백나무 숲을 일군 조림왕이다

    김이만 선생은‘나무 할아버지’로 불리며 1922년부터 64년 동안을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구석구석 누비며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나무 종자를 수집하고 품질기준을 정하는데 공헌을 한 분입니다. 현신규 박사는 세계가 인정하는 육종학자였습니다. 그는 1953년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임학교육과 소나무-포플러 육종에 정열을 쏟았습니다. 박 대통령 등 네분은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직동리 국립수목원 내‘숲의 명예전당’에 모셔졌는데 동판 초상화와 공적사항,사진·기념물 등이 전시되고 있다 고합니다. 임종국 선생의 삶을 살펴보기에 앞서 저는 그분의 함자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성은 수풀 임(林) 종은 흔히 이름에 사용하는 쇠북 종(鍾)이 아니라 종자라는 뜻의 종(種) 나라 국(國)자를 쓰니 역시 성함에 나무로 나라를 빛낼 인물임이 나오지 않습니까? 임종국 선생은 1913년 1월19일 전북 내장산 아래 순창군 복흥면 동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임영규, 어머니는 김안나씨였지요. 그가 태어났을 때 우리나라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직후였습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을 교육에 힘썼습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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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사로 생활하던 중3학생 임종국이 자퇴를 결심한 이유
    임종국선생의 몇장 남지않은 사진이 숲 안내소에 보관돼있다

    석양이 질 무렵 숲은 새로운 모습을 준비한다.
    려서부터 서당(書堂)에 데려가 한문교육을 했고 일곱살이 되던 1920년 보습학교 즉 지금의 유치원 같은 곳에 보냈으며 여덟살 때 복흥공립보통학교에 입학시켰지요. 1927년 그는 순창농업중학교에 입학해 3학년이 됐을 때 학업을 중단합니다. 어린 세 동생에 대한 걱정과 함께 농사만으로 일제 치하에서 살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더는 공부만 할 수 없습니다. 동생들을 봐서라도 집안에 보탬 되는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부친은 망설이다 자퇴를 허락했습니다. 임종국은 군산(群山)으로 갔습니다. 지금은 약간 쇠락했지만 일본강점기 군산은 전국에서 실려온 쌀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항구로 대단히 번성했습니다. 거기서 임종국은 군산 제일의 미곡상으로 갔습니다. 그리곤 외쳤지요. “혹시 여기 사람 구하지 않습니까?” 밀짚모자 쓴 사람이 나와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임종국은 “일자리를 구하고 있습니다. 뭐든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그 사람의 대꾸도 기다리지 않고 미곡상 안으로 들어가 빗자루를 들고나왔습니다. 그리곤 상점 앞을 깨끗하게 비질했지요. 밀짚모자 쓴 이는 미곡상 주인 스기다 그가 놀란 것은 말끔해진 상점 앞이 아니라 임종국의 손 바닥이었습니다. 임종국은 상점 앞에 떨어져 있던 작은 쌀알들을 한주먹이나 주워 모은 겁니다. 주인인 스기다마저 신경 쓰지 못한 것을 소년이 한 것이지요. 그날부터 임종국은 모르는 것은 메모하고 외우는 등 밤을 새워가며 일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성실하게 여섯달을 일하자 스키다는 소년에게 서기(書記) 일을 맡겼지요. 얼마나 신임했는지 한 달 뒤엔 은행에서 돈을 입금하는 일까지 담당하게 됐습니다. 그는 장부(帳簿)를 속이자는 유혹이나 협박을 많이 받았지만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먹고살기 어려운 세상이라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아선 안 된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것이 나라를 빼앗은 일본인의 것이라고 해도 그는 정도(正道)를 지켰습니다. 여기서 혹시“일본인들은 속여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백범(白凡) 김구선생의 일화를 들 려 드릴까 합니다. 백범일지에 보면 김구 선생은 자신을 잡아들인 뒤 자백을 받기 위해 며칠밤을 세우는 일본 경찰 들을 보며 스스로 반성했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아!일본놈들은 비록 나쁜 짓이지만 제 나라를 위해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나는 지금까지 나라를 위해 한 번도 밤을 새워 일한 적이 있는가”하는 탄식이었습니다.
    비록 악당(惡黨)이지만 열심히 하는 자세만은 원수지만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1934년 어느덧 스기다 미곡상에서 없어선 안 될 인물이 된 임종국은 스기다에게 소금을 사들일 것을 권합니다. 값이 오를 것을 예측한 것이지요. 그의 예상은 맞았고 스기다는 막대한 돈을 벌었습니다. 스기다는 그를 진남포 출장소장으로 발령냈습니다. 이때 군산에서 진남포(鎭南浦)까지를 가며 그는 처음 헐벗은 우리의 산하(山河)를 봅니다. 일본의 보리 만주의 기장과 조가 들어오며 쌀과 콩을 일본에 내다 주는 우리 처지를 보면서“몇 년 지나면 조선에는 소나무 몇 그루만 남겠지”라며 한숨을 쉬지요.
    나뭇잎을 하나하나 바라보면 꼭 추상화같은 느낌을 받게된다.

    이런 자각(自覺)이 있은 지 얼마 후 그는 모은 돈을 가지고 정미소(精米所)를 차립니다. 그는 현미를 세 번 찧는 다른 정미소와 달리 두 번만 찧었지요. 그렇게 하면 기계 밑에 떨어진 등겨가 늘 세되쯤 됐는데 그는 그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줬습니다. 당시 다른 정미소는 등겨를 돈 주고 팔았지요. 먹을만한 것이 없었던 그 시절, 우리 민족은 등겨에 삶은 쑥과 우거지를 넣고 콩비지 국을 끓이듯 겨 죽을 끓여 먹고 연명했습니다. 그즈음 임종국은 평생의 배필이 될 장성 출신 아내 김영금과 결혼합니다. 중일(中日)전쟁이 일어나면서 임종국은 정미소 문을 닫습니다. 미곡통제령으로 곡식 거래하는 일마저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처분하고 고향 순창으로 내려와 잠업(蠶業)을 시작합니다. 그 이후 그는 장성으로 옮기는데 사연이 있습니다. 잠업을 할만한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던 차에 아내의 고향인 장성에서 한 일본인이 농원(農園)을 내놨다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지요. 그는 빚을 내고 이 농원을 사들인 뒤 1년 만에 흑자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타고난 근면함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누에 키우는 방 둘레에 생석회를 바르고 숯으로 소독했으며 창호지까지 발랐습니다. 사람 사는 것보다 더 깨끗하게 소독을 한 것입니다. 그 후론 누에와 함께 살았지요. 누에농사에 성공하자 그는 고구마 재배를 시작해 이것도 성공합니다.
    얼마나 나무가 빽빽한지 대낮에도 태양이 보이지않을 정도다.

    해방 1년 전인 1944년 7월,전남 장성에는 홍수가 났습니다. 비가 많이 온 탓도 있지만 워낙 산림이 헐벗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급기야 논밭이 다 망가지고 장성역까지 물에 잠겨 기차가 들어오지 못하게 된 겁니다. 그때 그는 조림(造林)을 떠올렸습니다. 그날 이후로 임 선생은 하루도 쉬지 않고 나무를 심고 돌봤습니다. 일꾼들에게 늘 하는 말이 “그저 내 집 일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6ㆍ25가 터지자 사람들은 서둘러 피난갔지만, 그는 농부(農夫)의 생명인 땅을 놔두고 갈 수는 없다고 결심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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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인물은 그 존재만으로 여러명을 먹여살린다
    편백나무와 비슷하지만 이것은 삼나무다.
    쟁이 시작되면서“농지를 몰수한다”“부녀자를 욕보인다”“장정들은 모두 시베리아로 끌고 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지만,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민위원회 소속이라는 사람이 그를 찾아와 다짜고짜 끌고 가더니 유치장에 가뒀습니다. 하루 동안 먹을 것도 주지 않더니 그들은“가지고있는 현금을 모두 내놓아라”고 협박했습니다. 땅과 집과 농장은 모두 몰수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공산당은 그를 방면했습니다. 아무리 뒷조사를 해봐도 ‘먼지’ 한톨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덧붙였습니다. “동무,이렇게 멋진 묘포지를 본 적이 없소.” 묘포지란 어린나무를 키우는 밭을 말하지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이럴 때도 쓰이는가 봅니다. 서슬 퍼런 공산당도 땅과 산에 정성을 다하는 농부를 어찌할 순 없었습니다. 1955년 그는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숲을 가꾸기로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미쳤다’고 수군댔지만 축령산에 숲을 가꾸기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5000평이 땅에 삼나무 6000그루를 심었는데 그의 식재(植)에는 특징이 있었다고 합니다.
    ▲   편백나무-삼나무와 비슷해 보이는 이 나무는 낙엽송이다

    나무를 빽빽하게 심지 않고 어린나무들 사이의 거리를 넓게 잡았으며 묘포지 둘레에는 도랑을 만들어 배수(排水)가 잘되도록 했습니다. 어린나무를 심은 뒤에는 1주일에 한 번씩 겉흙을 긁어내고 새 흙을 생석회와 섞어 뿌렸습니다. 병에 시달린 나무는 30㎝ 정도 흙을 파낸 뒤 짚과 재를 섞어 묵힌 흙으로 옮겨 뿌렸습니다. 이렇게 하자 임종국의 숲은 병충해에 아주 강한 숲이 됐습니다
    ▲   임종국씨와 함께 축령산을 가꾼 이들이 야유회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1959년을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사라’라는 사상 초유의 태풍이 몰아쳐 전국에서 수십만명의 이재민이 난 해지요. 그는 비바람을 뚫고 일꾼들과 함께 미친 듯이 숲을 누볐습니다. 제아무리 강한 태풍도 인간의 이기려는 의지를 꺾을 순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편백나무와 삼나무를 선택한 것일까요? 빨리 자라고 훗날 값어치가 나간다는 계산도 있었지만 여기엔 젊었을 적에 본 인촌 김성수 선생의 장성군 덕진리 야산에서 받은 감동이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당시 인촌(仁村)의 야산에 쭉쭉 뻗어가는 편백나무와 삼나무를 본 그는“아! 우리 강산에도 이런 나무가 성장할 수 있구나”하는 확신을 가졌다지요.
    편백나무는 일본에서 최고급 내장제로 쓰인다

    오늘날 그는 한국 조림(造林)의 효시로 불립니다. 그가 가꾼 편백나무숲은 1헥타르당 700~2500그루가 분포해있으며 나무의 평균 높이는 18m입니다. 수령(樹齡)은 대부분 30년을 넘지요. 축령산은 천연림과 인공림의 비율이 75대 25인데 입목축적은 천연림이 101㎡,인공림이 250㎡입니다. 인공림이 그만큼 잘 보존돼 있다는 뜻이지요. 이 수치는 놀라운 것입니다. 산림학자들에 따르면 선진국의 평균 입목축적은 캐나다가 120㎡,미국이 136㎡, 일본이 145㎡,독일이 268㎡,스위스가 337㎡입니다. 얼마 전 전쟁을 하겠다고 난리를 친 북한은 41㎡입니다. 한마디로 헐벗었다는 말입니다..
    나무는 목재부터 잎사귀까지 버릴 게 없다

    이것은 임종국 선생의 숲이 독일과 스위스에 버금간다는 뜻입니다. 그의 손길이 거쳐 간 곳은 앞서 말한 대로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서삼면 모암리,북하면 월성리 등입니다. 아직도 이 지역에선 가뭄 때면 물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던 임 선생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가 물지게를 지나 마을 주민이 하나둘씩,나중엔 거의 모두가 물지게를 지고 산에 오르는 진풍경이 연출됐다고 합니다. 그의 장남 임지택씨가 한 언론을 통해 남긴 아버지의 증언이 있습니다. “초기엔 투자비용이 많아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다 썼습니다. 60년대 이후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원으로 조림-조경산업이 날로 번창했습니다. 정부에 납품되던 물량이 때때로 줄거나 없어지면 자금순환이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를 전해 들은 박 전 대통령이 재벌 몇 명을 불러 산림보전을 위해 조림지 일부를 매입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재벌 몇 명이 장성 축령산 일대를 직접 현지답사한 것은 그런 지시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결정이 끝나고 청와대에 가서 보고하고 계약서만 받아오는 작업을 남겨뒀을 때 박 전 대통령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재벌들의 조림지 매입 계획은 없던 일이 돼버렸습니다. 박 대통령이 1979년 떠나시고 1년 후인 1980년 아버지도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7년간 투병하다 돌아가셨는데 병원비가 상당했을 뿐 아니라 채권자들의 빚 독촉도 심했습니다. 작업장의 십장들 중에도 병원과 집에 나타나 돈을 달라고 소란을 피우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는 ‘나무를 더 심어야 한다. 나무는 심는 게 나라 사랑하는 길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김재규는 박 대통령을 시해했을 뿐 아니라 이 나라의 조림왕을 살해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었다고 잽싸게 태도를 바꾼 재벌들의 행태도 씁쓸하기만 합니다. 쓰러진 조림왕을 위문하기는커녕 소란을 피운 일부 주민들도 답답하지요. 이렇게 해악을 끼친 김재규를 아직도 ‘유신의 심장을 쐈네’뭐네 하며 재평가한다는 얼빠진 이들이 많을 것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렇다면 임 선생은 보람없이 막대한 빚만 남긴 채 생을 마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남 장성 일대에는 편백나무 상품이 불티난 듯 팔려나갑니다. 값비싼 일본제와 비교해 품질에 손색이 없으면서도 가격은 저렴하지요. 베개부터 도마, 가구까지 수준이 상당히 높아 보여서 저도 도마와 발판을 샀습니다. 아마 임 선생 덕분에 편백나무 상품을 만들어 파는 주민들이며 축령산 편백나무와 삼나무와 낙엽송이 이룬 숲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생계를 잇는 주민이 얼마겠습니까? 위대한 인물은 그 존재만으로 여러 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을 저는 임 선생의 삶을 보며 실감했습니다.
    편백나무를 둥글게 가공한 모습이다.베갯속이나 잡내를 없애는 용도로 쓰인다.

    임 선생의 후손들은 어떻게 지낼까 하고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얼마 전 그의 후손들에 대한 보도가 있었습니다. 임선생 슬하의 6남3녀 가운데 딸 순갑(66)씨와 아들 관택(60)씨,손자 채윤(30)씨가 임업분야에서 종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손자 채윤씨는 산림청 부여 국유림관리소에서 일하고 있는데“어렸을 적 축령산에 갈 때마다 아버지께서 할아버지 말씀을 해주셨다”고 한 보도가 있습니다. 그“할아버지가 심고 가꾼 나무들이 국민에게 휴식과 여가의 장으로 활용되는 것을 보며 너무 자랑스럽다”고 했는데 정말 자랑스러워할 만 하지요.
    임종국선생의 얼굴을 그린 이 그림은 임 선생의 딸이 그린 것이라고 한다.
    축령산에 남아있는 임종국선생의 흔적은 수목장을 한 곳과 공적비뿐이다.

    축령산 편백나무 숲 정상 근처에는 임 선생이 공적비와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나무를 사랑한 이답게 그는 수목장을 택한 것이지요. 그의 처 김영금 여사 역시 남편 근처에 잠들어 계시고요. 이 숲은 전국에서 힐링을 원하는 시민과 아픈 몸을 치유하기 위한 이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축령산 숲 안내센터에서는 치유를 위한 각종 교육도 한다.

    숲 곳곳에는 등산객들이 쉬어갈 만한 공간들이 있었습니다. 이곳의 한 숲 해설가는 조용헌씨의 명당에 대해 묻자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은 하더군요. “고 임종국 선생께서 수목장한 곳이 지관(地官)들이 명당을 손꼽은 곳이며 기념비가 있는 곳도 그 혈맥이 내려오다 맺힌 좋은 지세입니다.”
    숲을 사랑한 임종국선생은 수목장을 택했다.

    ▲   축령산의 임종국 선생 수목장 터. 숲 해설가는 이 자리가 최고의 명당이라고 했다.

    어떻습니까,저는 조용헌씨가 말한 축령산 명당은 분명히 명당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명당은 후손에게 복을 주는 우리가 아는 풍수지리적인 형태의 명당이 아니고 임종국 선생 같은 분들의 땀이 아직도 녹아있는 진정한 의미의 명당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축령산에 깃든 임선생의 땀과 그런 그를 뒷바라지한 박정희대통령의 사연을 알고난 뒤에야 진정 그것을 확신하게 됐습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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