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진영에 깃든 선사의 삶과 사상

13 오암의민(鰲巖毅旻)

浮萍草 2015. 10. 13. 00:00
    “영남종장”
    形本是假 影豈爲真 형상은 본래 거짓, 그림자가 어찌 참모습이겠는가? 有相非相 離身即身 용모가 존재하나 용모가 아니고 몸을 떠나니 곧 몸이네. 邈來難狀 覔去無因 멀리 와서 모습 알기 어렵고 갈 곳을 찾지만 인연이 없다. 這箇不認 方見那人 낱낱이 부인하고 누구를 볼거나. 경사에 소장된 오암의민(鰲巖毅旻,1710~1792)선사 진영에 실린 자찬(自讚)이다. 이 자찬은 스님의 시문집인 <오암집(鰲巖集)>에도 실려 있다. 조선후기 스님들은 자신의 진영을 보고 스스로 찬문을 지어 남기곤 하였다. 스님들은 자찬에서 진영을 그림자,허깨비라 칭하며 형상에 얽매이지 말고 형상에 담긴 본질을 꿰뚫기를 촉구했다. 오암스님도 영찬을 통해 진영에 투영된 스님의 참모습을 보기를 당부했다. 오암스님은 사명유정(1544~1610)스님의 7세손이다. 사명문중은 18세기 이후 급격히 쇠락했으나 보경사를 중심으로 한 포항 일대에는 사명유정 -송월응상(松月應祥)-춘파쌍언(春坡雙彦)의 법맥을 계승한 후손들이 19세기까지 번성했다. 오암스님은 청하(淸河, 포항의 옛 지명)의 오두촌(鰲頭村) 출신으로 오암이란 법호는 태어난 마을에서 유래한 것이다. 스님은 1732년에 보경사의 각신스님에게 출가해 사명유정의 후손인 계영수행(桂影守行)의 법을 이었다. 내전(內典)과 외전(外典)에 해박하여 많은 이들이 스님에게 배움을 청했고 대중은 스님을 ‘영남종장(嶺南宗丈)’으로 추앙했다. 스님은 경학과 수행만이 아니라 문장에도 뛰어나 많은 시문을 남겼다. 스님이 입적하자 보경사에서는 승탑과 비를 세우고 진영을 제작해 모셨으며,스님의 시문을 목판에 새겨 사중에 보관토록 하였다. 진영 속 오암스님은 살집이 있는 동안(童顔)에 신체는 크고 마른 듯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결가부좌하고 있다. 실제 지연 남경희(止淵 南景羲, 1748~1812)는 오암집 발문에 1777년 내원산 대비암에서 스님을 뵙던 일을 회상하며“얼굴 생김새는 큼직하면서 강직해 보이고 자태는 고고하고 서늘 하여 한눈에도 비범해보였다”고 평했다.
    ☞ 불교신문 Vol 3110 ☜      
    제찬 해제=정안스님(불교문화재연구소장) / 진영 설명=이용윤(불교문화재연구소 불교미술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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