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진영에 깃든 선사의 삶과 사상

11 징월정훈(澄月正訓)

浮萍草 2015. 10. 11. 00:00
    팔공산 사찰 중흥…불문의 사표(師表)
    澄江皓月 是謂法身 我本圓 即假而眞 “물 맑으니 달 밝다. 이는 법신을 말한다. 나의 본래 원적은 거짓이나 참모습이다.” 해사에 소장된 징월정훈(澄月正訓, 1751~1823) 선사 진영에 실린 희곡산인(希谷散人)의 영찬이다. 희곡은 이지연(李止淵, 1777~1841)의 호(號)이다. 징월스님은 1820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서울에 머물면서 영남관찰사를 지낸 김이양(金履陽)을 비롯해 당대 명사인 조만영(趙萬永)조인영(趙寅永),이지연 등과 시를 주고받으며 교우를 맺었다. 이 가운데 영남관찰사로 부임한 이지연은 입적한 스님을 위해 1829년 찬문을 짓고 유고집인<징월대사시집(澄月大師詩集)>의 서문을 남겼다. 그는 영찬에서 스님의 법호인‘징월(澄月)’을 법신에 비유하며 참모습을 찾았음을 표현했다. 징월스님은 서산휴정의 후손으로 기성쾌선(箕城快善,1693~1764)의 4세손이자 관월영수(冠月影修)의 제자이다. 스님은 불문의 사표(師表)로 존경을 받았으며 뛰어난 시(詩)로 사대부 사이에서 명승(名僧)으로 꼽혔다. 또한 폐사된 수도사를 중창하는 한편 동화사,은해사,지장사,압곡사 등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사찰을 중흥하는데 힘을 더했다. 스님이 은해사 운부암에서 입적하자 진영이 운부암과 수도사에 모셔졌다. 은해사의 징월스님 진영 뒤에는“계미삼월 일봉안(癸未三月 日奉安)”이란 묵서가 있다. 행장에 따르면 계미년 2월에 스님이 시적하자 제자들이 스님의 공덕에 감사하며 진영을 제작했다고 한다. 이 기록대로라면 은해사 진영은 징월스님이 입적한 직후 제작된 것이다. 진영 속 스님은 다른 진영과 마찬가지로 가사장삼을 갖춰 입고 양손에 주장자와 장염주를 쥔 채 결가부좌 하고 있다. 다만 행장에서 진영 제작을 “베길 사(寫)”라 표기한대로 스님을 미화하지 않고 돌출된 턱과 튀어나온 입술을 그대로 묘사해 사실성을 높였다.
    ☞ 불교신문 Vol 3104 ☜      
    제찬 해제=정안스님(불교문화재연구소장) / 진영 설명=이용윤(불교문화재연구소 불교미술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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