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진영에 깃든 선사의 삶과 사상

8 응암희유(凝庵僖愈)

浮萍草 2015. 10. 8. 00:00
    “달마 후신, 서산의 정맥”
    達磨後身 西山正脉 달마의 후신이며 서산의 정맥이다. 志悟靈竗 道廣經學 깨달은 뜻은 영묘하고 도와 경학이 넓다. 潤色鴻猷 餘事翰墨 모습과 뜻은 크나 여생을 필묵으로 보냈다. 遺像儼然 薄夫可肅 남긴 진영은 위엄이 있고 거칠지만 엄숙하다. 축총림 통도사에 소장된 응암희유(凝庵僖愈, 1734~1767 활동)선사 진영에 실린 최남복(崔南復,1759~1814)의 영찬이다. 최남복은 1784년에 대곡천 상류에 백련서사(白蓮書舍)를 짓고 백련구곡을 운영했다. 그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이라 꺼려했지만 월하계오(月荷戒悟, 1773~1849)와 시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눌 정도로 불교에 호의적이었다. 다른 진영과 다르게 응암스님 진영의 영찬은 화면 외곽에 적혀 있다. 이는 제작 당시부터 영찬을 적을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겨진 형상은 위엄이 있고 거칠지만 엄숙하다”는 찬문대로 최남복은 진영을 통해 응암스님을 뵙고 선사로서의 정통성과 수행자로서의 깊이를 찬탄하는 영찬을 지었다. 응암스님은 사명유정의 5세손이자 설송연초(雪松演初)의 법제자이다. 스님은 18세기 통도사에 주석하면서 영자전(影子殿)을 초창하고 대광명전 삼신불도(1759년)와 괘불도(1767년) 제작을 주도했다. 스님이 입적하자 제자들은 1773년에 승탑과 탑비를 통도사에 건립하였다. 진영 조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입적을 전후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영 속 응암스님은 양손에 염주와 주장자를 쥐고 방석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눈매가 매섭고 광대와 턱이 툭 튀어나와 인상이 강한데 이는 최남복이 묘사한 형상 그대로이다. 스님 뒤편에 표현된 경상(經床) 위의 서책은 불가와 유가 책을 가까이 했던 스님의 일상을 보여준다. 응암스님이 세운 통도사 영자전은 그의 4세손인 화봉유철(華峯有喆)에 의해 1824년에 중창됐다. 당시 중창 기문은 월하스님이 지었다. 화봉스님은 영자전에 관심을 기울이며 평소 문중 어른인 응암스님 진영에 찬문이 없음을 안타까워했고 그 마음은 월하스님을 통해 최남복에 전달되었을 것이다.
    ☞ 불교신문 Vol 3098 ☜      
    제찬 해제=정안스님(불교문화재연구소장) / 진영 설명=이용윤(불교문화재연구소 불교미술연구실장)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