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진영에 깃든 선사의 삶과 사상

5 호암체정(虎巖體淨)

浮萍草 2015. 10. 5. 00:00
    “사바세계 보살”
    遺形與骸 迯色與相 一幅傳神 喚惺師之入室也 西山老之傳鉢也 猶若有之圖 貌之安氣之肅 緣塵之未盡拂者耶 于以驗神之佚 于以徵示 于其徒道之嵂 永世認世出之菩薩 “남기신 모습은 색과 모양 밖이다. 한 폭의 진영은 환성 지안스님에게 입실하고 서산 휴정스님의 의발을 받았다. 오히려 진영과 같다면 모습은 편안하고 기운은 엄숙하며 인연의 다하지 못함을 털어내니 영험하고 징험을 보이며 우리 문도의 최고로 영원한 사바 세계의 보살이시다. 어사 소장 호암체정(虎巖體淨,1687~1748) 진영에 실린 영찬이다. 찬자인 송익휘(宋翼輝, 1701~?)는 환성지안(喚醒志安)의 제자이자 서산휴정의 법통을 계승한 호암스님을 문중의 표상이자 세상에 출현한 보살이라 칭송해 마지 않았다. 송익휘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홍계희(洪啓禧,1703~1771)도 “환성의 의발(衣鉢)을 전수 받아 청허의 금탕(金湯; 金城湯池)을 지켜갈 이”라 비문을 지을 정도로 18 세기에 호암스님은 서산과 환성의 적전(嫡傳)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같은 명성은 후대로 이어져 환성문인 가운데 함월해원은 북쪽에서,호암체정은 남쪽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고 <산사약초(山史畧抄)>에 기록됐다. 조선후기 호남과 영남에서 호암스님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호암스님을 비롯해 그의 문하로 만화원오,연해광열,영곡영우,연담유일 등이 대흥사 12대 종사와 12대 강사로 불리고 제자들은 호암스님이 표훈사 원통암에서 입적 하자 추모 불사를 일으켰다. 특히 대흥사에서는 연담스님을 주축으로 호암스님의 승탑과 비(碑)가 건립되고,연담스님은 영찬을 짓기도 했다. 현재 대흥사에 호암스님 진영이 남아 있지 않지만“손에 하늘 닿는 그물을 쥐고 백만 용상(龍象)을 낚았네”라는 연담스님의 찬문처럼 영남에 포진한 호암문도 역시 자신들이 주석한 범어사와 통도사에 진영을 모셔 존경을 다하였다. 영남의 두 사찰에 호암스님의 진영을 모신 이는 제자 용파도주(龍波道周)와 그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호암스님의 진영을 모셔 선사(先師)를 기리는 동시에 서산에서 환성,호암,용파로 이어지는 자기 문중의 정통성을 대외적으로 드높였다. 범어사와 통도사에 소장된 호암스님의 진영은 모본(模本)을 가지고 그린 듯 동일하게 불자(拂子)를 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스님의 얼굴에는‘호암(虎巖)’ 뜻 그대로 호기롭고 굳건한 기상이 담겨 있다. 범어사에는 비록 대흥사처럼 승탑과 비를 건립하지 못했지만 진영에 행장을 압축한 영찬을 실어 스승의 모습을 온전하게 기억하고자 하였다.
    ☞ 불교신문 Vol 3092 ☜      
    제찬 해제=정안스님(불교문화재연구소장) / 진영 설명=이용윤(불교문화재연구소 불교미술연구실장)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