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24 박정희와 율곡의 국방관

浮萍草 2015. 9. 5. 11:08
    재건된 화석정의 현판에 박정희 대통령이 적은 '병오 사월'의 뜻은?
    북한 대치 상황이 엄중하던 시기 경기도 파주의 임진강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제가 서 있는 곳은 화석정(花石亭)이라는 정자입니다. 
    정자 주변에 임진팔경(臨津八景)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팻말이 있습니다. 
    이곳의 빼어난 경치 8곳을 말합니다.
    ▲  화석정에는 임진왜란과 얽힌 사연이 있다.야사에 따르면 율곡의 말을 듣지않고 국방력을 강화하지않은 선조는 왜군에 쫓겨 피난갈 때 이 정자를 불태워
    주변을 밝힌 뒤 임진강을 건넜다고 한다.

    원래 모습과 눈앞의 풍광은 차이가 컸습니다. 개발하느라 어수선하고 시선을 두는 곳에는 전깃줄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지요. 옛 모습은 간데없고 다리가 놓여 있는가 하면 강변도로는 트럭과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살풍경입니다. 두 달 전 이곳에 왔을 때 놀랐습니다. 화석정이 온통 공사판이었습니다. 뭔가 예전 장인의 기법을 기대했는데 그라인더 같은 공구(工具)가 널려 있었습니다. 문화재를 이렇게 관리하는 우리 지방자치단체의 능력에 내내 한탄을 금하지 못했습니
    ▲  화석정 근처에는 원래 래소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하나
    자취를 찾을 수 없다.화석정에서 본 임진팔경의 안내문인데 지금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지금 ‘화석정’은 말끔하게 단장돼 있었습니다. 군사시설 속에 정자 한 채 놓여 있지만 여기엔 우리가 잊어선 역사가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 선생이 어렸을 적 놀던 곳이며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논하던 장소입니다.
    ▲  화석정 옆에는 율곡이 여덟살 때 지었다는 화석정 시가 새겨져있다

    여담이지만 율곡 선생은 5000권,그 어머니인 신사임당께서는 5만원권 화폐에 등장하지요. 모자(母子)가 한꺼번에 화폐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이 정자 터는 고려시대‘삼은’중 한명인 야은 길재(吉再)선생의 유지(遺址)가 있던 곳입니다.
    ▲  신사임당이 그린 팔폭병풍이다.

    세종 25년 즉 1443년 율곡의 5대조 이명신이 정자를 건립하고 증조부인 이의석이 1478년 정자를 중수(重修)했으며 이숙함이‘화석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그랬던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현종 14년(1673년) 다시 세워졌지요. 정자의 운명은 이후로도 역사와 궤를 함께 했습니다. 6·25때 다시 불탄 것을 1966년 파주의 유림(儒林)이 성금을 모아 재건했으니 이 정자 한곳에 우리 역사상 3대 전란이라 할 임진왜란과 6·25의 상흔(傷痕)이 짙게 남아있다고 하겠습니다.
    ▲  아침 햇살이 화석정과 느티나무를 비치고있다.평일에는 찾는 이가 거의 없는 한적한 곳이다.

    화석정은 왜군의 전격전에 혼비백산 달아나던 선조가 눈물을 뿌렸던 곳으로 알려졌지요. 비 내리던 날 임진강변에 선조가 다다랐을 때 주변은 칠흑처럼 어두웠습니다. 그때 누군가 화석정에 불을 붙였는데 활활 타올라 주위를 밝혔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율곡이 훗날 이런 일이 있을 것에 대비해 정자에 기름칠해놓았다는 야사(野史)가 전해집니다. 그런데 이날 이른 아침 이곳을 찾았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  화석정에서 바라본 서쪽 풍경이다. 가운데 부분이 북한 땅이다.

    화석정 바로 앞에 있는 매점을 관리하는 노인은 이렇게 묻더군요. “좋습니까?” 그래서 대답했지요. “얼마 전에 왔을 때 공사 중이어서 다시 왔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이러는 것이었습니다. “두 달 전쯤 오셨겠구먼. 그 공사가 50년 만에 한 것이라오.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께서 세운 뒤로 처음 하는 공사였어요.” 이게 무슨 소린가요? 분명히 화석정 앞에 있는 안내문에는 지방 유림의 성금으로 세워졌다는 말이 있는데…. 그분은 제 의문을 이렇게 풀어줬습니다. “박 대통령께서 1966년 이곳에 왔다가 다 쓰러진 정자의 기초석을 보고 안타까워하시면서 돈을 주셨지요.” 그는 놀라는 제게 다시 이런 말을 보태는 것이었습니다. “ 그게 바탕이 돼 지방 유림이 모금을 했고요. 궁금하면 저 위에 현판을 보세요.” 화석정 현판에는 ‘병오 사월(丙午 四月) 박정희’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병오년을 찾아봤지요.
    ▲  화석정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병오 사월이라고 써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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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임당 후손이 알려준 자운서원 재건의 핵심인물은 박 대통령
    말 병오년은 1966년이었습니다. 
    재미있다는 듯 노인은 덧붙이는 것입니다. 
    “제가 신사임당 후손이요. 
    서울서 공직을 끝내고 여기 와서 벌써 30년이 지났어요. 
    한여름철 매점 장사해 먹고삽니다. 
    내가 없어지면 여길 관리하는 사람도 없을텐데….” 
    팔순을 훌쩍 넘겼다는 그는 매일 주변을 청소하고 물을 뿌리고 손님을 맞습니다. 
    평일에는 거의 없고 휴일에만 오는데 앞서 말씀드렸듯 주변에 토우 미사일 발사 추적장 등 군 시설이 있어 버스가 올라올 수 없는 좁은 도로기에 노인들이 힘들어
    한다더군요.
    내친김에 근방에 있는 자운서원(紫雲書院)을 찾았다가 저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서원을 재건한 것도 고 박정희 대통령이었습니다.
    ▲  자운서원으로 들어서면 강인당이 나온다

    ▲  자운서원의 전경이다. 오른쪽으로 율곡선생 일가의 묘지가 있다.

    사실 전국을 종횡하다 보면 이런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자운서원에 대해 알아보고 갑니다. 자운서원은 광해군 7년(1615년) 율곡을 추모하려 지방 선비들이 세웠습니다. 효종 원년(1650년) 왕이 ‘자운’이란 현판을 하사하며 사액(賜額)서원이 됐고 숙종 39년(1713년)에 율곡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金長生)-현석 박세채선생을 추가로 모셨지요.
    ▲  율곡선생을 모신 곳이다. 제자 김장생-박세채 선생이 배향돼있다.

    자운서원은 1868년 대원군에 의해 철폐됐는데 이것을 102년 만에 복원시킨 분이 박 전 대통령입니다. 이곳에서 저는 우리의 한심한 좌파들을 떠올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아산 현충사를 그들은“박정희가 군부 쿠데타의 오명을 씻으려 만들었다”고 했지요. 자운서원이나 충청도 예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선생 고택(古宅)을 복원한 것도 박 전 대통령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뭘 희석시키려고 했다고 할지 궁금합니다.
    ▲  자운서원의 복원 내역을 알리는 돌 안내문이다.

    율곡은 십만 양병으로 대변되니 좌파 주장대로라면 박 대통령이 국방력을 강화하려고? 추사는 추사체로 유명한 명필이니 박 대통령이 추사 고택을 다시 세운 것은 자기 글씨를 자랑하려고? 좌파의 목소리들이 이렇게 코미디 같다는 것을 전국에서 확인하면서 저는 박 전 대통령이야말로 ‘역사의 복원자’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합니다. 자운서원의 안내문 가운데 저를 감동시킨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시무육조(時務六條)와 10만 양병론(養兵論)입니다. 선조에게 이 글을 올린 것이 1583년 즉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9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율곡은 그 이듬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시무육조, 즉 ‘시급히 해야 할 여섯 가지 일’의 원문을 보겠습니다. 첫째 임현능(任賢能), 어진 자와 능력 있는 자를 임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양군민(養軍民), 군대를 양성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줄여 잘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족재용(足財用), 즉시 사용할 수 있는 재산을 충분히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고번병(固蕃屛), 변방 수비를 튼튼히 하라는 것으로 이것은 왜국을 겨냥한 것입니다. 다섯째 비전마(備戰馬), 싸움에 동원할 수 있는 말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여섯째 명교화(明敎化) 교육을 해 백성들을 문맹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  율곡이 올린 시무육조는 지금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반드시 되새겨야할 항목이다.

    전쟁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기에 여섯 조항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전쟁과 관련이 있지만 간접적인 것을 제외하더라도 2-3-4-5번 항목은 직접적인 전쟁 준비에 해당합니다. 과연 율곡은 왜 이렇게 절박하게 느낀 것일까요? 우리 역사를 보면 조선개국(1392년) 이후 약 200년간 전쟁이 없었습니다. 세종 대에 대마도와 여진을 정벌하긴 했지만 당시의 조선은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세계적으로도 거의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강국이었기에 왜-여진을 일방적으로 토벌했지요.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90년 전부터 왜구는 우리 삼남지방을 유린했습니다. 교과서에는 이것이 왜변(倭變)이라고 표현되기에 우리는 사소한 분쟁 정도로 생각할지 몰라도 사정은 심각하기 그지없었습니다. 1508년 왜구는 가덕도 왜변을 일으킵니다. 가덕도는 부산 동래 지역을 말하는데 이때 왜구는 우리 벌목공들을 목 베어 죽이고 달아납니다. 2년 후 왜구들은 제포-부산포-염포 등 세 곳에서 삼포왜변을 일으킵니다. 당시 대마도주까지 나서 침략한 왜구 수는 8500명에 달했습니다. 이후에도 왜구는 사량진왜변(1544년)-달량포왜변(1555년) 등을 잇달아 일으키며 조선의 ‘능력’을 테스트하지요. 즉 임진왜란은 갑자기 벌어진 것이 아니라 복싱으로 치면 끊임없이 ‘잽’을 던지던 일본이 “이젠 해볼 만 하다”며 전면전에 나선 것입니다. 당시 선조 휘하에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포진해있었습니다만, 다가오는 전운(戰雲)을 일부러 외면한 감이 있습니다. 율곡만이 홀로 선조가 듣기 싫어하는 고언(苦言)을 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10만 양병론의 실체를 알아보기로 합니다. ‘국세지부진극의(國勢之不振極矣) 우리나라의 세력이 사그라진 게 극에 달했습니다. 불출십년당유토붕지화(不出十年當有土崩之禍) 채 10년이 못 가 나라가 마치 흙담벼락이 무너지는 것 같은 화를 당할 것입니다. 원예양병십만(願豫養兵十萬) 원컨데 미리 10만의 병사를 기르도록 하십시오. 도성이만각도일만(都城二萬各道一萬) 수도인 한양에 2만을 두고 팔도에 각 1만명씩을 두십시오. 복호연재(復戶鍊才) 병사들의 세금을 면제시켜주고 대신 무예를 단련하시고 사지분육삭체수도성(使之分六朔遞守都城) 그들을 6개월씩 나누어 교대로 한양을 지키게 하소서 이문변즉합십만파수(而聞變則合十萬把守)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즉시 십만을 합침으로써 이위완급지비(以爲緩急之備) 위급한 때에 방비를 삼으십시오. 부즉일조변기(不則一朝變起) 만일 이렇게 하지 않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전쟁이 터지면 불면구시민이전(不免驅市民而戰) 부득이 백성을 전쟁터로 내몰 수밖에 없으니 대사거의(大事去矣) 모든 것이 끝장나 전쟁에 지고 말 것입니다.’
    ▲  율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9년전 정확히 사태를 내다보고 양병십만론을 선조께 주청했으나 백성을 불안하게 한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않았다

    . 어떻습니까, 원문일 제 짧은 한문실력으로 의역한 것인데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정확하게 당시 상황을 간파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데도 당시 조정은 일본에 2명의 사신을 파견해놓고도 서로‘전쟁이 일어난다’‘안 일어난다’고 내분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가 7년간의 전란으로 이어졌고 당시 세계 최상위급 국가였던 조선은 하루아침에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됐지요. 앞선 기사에서도 제가 주장했지만 조선은 임진왜란-정유재란에 이어 정묘호란-병자호란을 맞으며 거의 멸망 직전의 단계로 접어듭니다. 이어 영조-정조라는 걸출한 왕이 잠시 국세를 회복시키는가 싶었지만 개혁군주 정조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열한살의 순조가 등장하면서 외척들이 발호해 불과 정조 사후(死後) 110년 만에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는 처지가 됐습니다. 여기서 잠깐 율곡 이이선생의 삶을 짚어보고 갑니다. 선생은 1536년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등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부친은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이며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로 율곡은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강릉은 외가였지요. 이 부부는 4남7녀를 낳았는데 하나같이 재주가 출중하고 시서화(詩書畵)에 능했습니다. 거기다 율곡은 관리로서 감히 따라올 인물이 없었지요.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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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대통령이 생각한 공직자의 롤모델
     
    ▲ (左)신사임당은 율곡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시와 그림과 문장에 능한 당대의 여류 명사였다.▲ (右) 학자이면서 현실 정치에 놀라운 혜안을 발휘한 율곡 이이
    선생 초상화다.

    곡은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13세의 나이로 합격했고 조광조의 문인인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에게서 학문을 배웠습니다. 1554년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 들어가 잠시 불교를 공부하다 이듬해 하산해 외가인 강릉으로 갑니다. 거기서 ‘자신을 경계한다’는 뜻의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성리학에 전념하는데 불교로의 짧은 외도(外道)는 평생 정적들이 그를 비난하는데 동원됐습니다. 자경문은 입지(立志)-과언(寡言) 등 11개의 조항이며 자신을 경계하는 방법론이 주 내용입니다. 앞서 말했듯 율곡의 집안은 가히 천재가문이라고 해도 과연이 아닙니다.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은 당대의 여류명사였는데 당호인 사임당은 당시 최고의 여성상이었던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온 것 이라고 합니다. 신사임당은 그림-글씨뿐 아니라 한시(漢詩)에도 능했습니다. 그의 자녀로는 율곡의 누이 이매창(李梅窓·1529~1592)은 ‘작은 사임당’이라고 불릴 정돝로 어머니를 꼭 빼닮았지요. 이매창 역시 그림솜씨뿐 아니라 높은 학식으로 당대의 여류인사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막냇동생인 옥산(玉山) 이우(李·1542~1609)는 글씨-그림-거문고-한시에 두루 뛰어나 ‘선산의 사절(四絶)’로 불렸습니다. 선산(善山)은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으로 지금은 구미시로 통합되면서 지명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  신사임당과 율곡의 형제자매들은 하나같이 시와 그림과 문장에 능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율곡은 22세 되던 해, 즉 1557년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결혼했고 1558년 예안(禮安)에 낙향한 퇴계 이황(李滉)을 찾아가 성리학에 관한 논변을 나누지요. 그 이후 1558년 별시(別試)에 장원급제합니다. 당시 그가 쓴 글은 천문-기상의 순행과 이변 등 논한 ‘천도책(天道策)’으로 율곡이 단순한 유학자가 아니라 다양한 방면에 지식을 지니고 현실적인 정치인임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습니다. 율곡은 이후 대과(大科)에서 문과(文科)의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에 모조리 장원급제합니다. 이른바 ‘삼장장원(三場壯元)’인데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를 포함해 아홉 차례의 과거에서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사람들은 그를 ‘구도장원공 (九度壯元公)’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천재 행정가가 된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친구였던 송강 정철(鄭澈)과 함께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회개혁안이라 할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선조에게 바쳤으며 1574년에는 사회문제 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논한 ‘만언봉사(萬言封事)’를 다시 선조에게 바칩니다. 이렇게 현실정치에 1575년에는 제왕학(帝王學)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1577년에는 어린이 교육을 위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편찬했으니 그 관심의 폭이 놀랍습니다.
    ▲  율곡은 선조에게 제왕의 덕목을 간추린 성학집요를 지어 올렸다.

    그런가 하면 그는 1580년 무렵 황해도 해주 석담(石潭)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워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면서도 향약(鄕約)과 사창(社倉)을 몸소 실천하기도 했습니다. 1582년 이조판서, 1583년 병조판서가 됐을 때가 그의 전성기였습니다. 그 이듬해 사망하면서 율곡은 영의정이 되진 못했지만 그가 이조판서였을 때의 영향력은 영의정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파주 자운서원,강릉 송담서원(松潭書院),풍덕 구암서원(龜巖書院),황주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으며,1682년에는 친구 성혼(成渾)과 함께 공자(孔子)를 섬기는 문묘(文廟)에 동방 18대 명현(名賢)으로 배향됐습니다.
    ▲  황포돛배 선착장에 있는 무명화가의 풍경화다.
    그렇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율곡의 화석정과 자운서원을 복원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는 그 단서를 박 대통령의 저서 가운데 하나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1962년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이라는 지금은 찾기 어려운 책입니다. 이 책에는 박 대통령이 한민족의 역사를 돌아보며 어떻게 해야 융성한 국가를 만들 수 있는가가 담겨 있지요. 목차를 한번 살펴볼까요? 첫 번째는 ‘민족적 각성의 필요성’이란 대목입니다. 여기엔 민족적 위기의 인식-민족애의 결핍-특권 특수의식의 지양-파당(派黨)의식의 지양-민족적 자아확립의 필요성이란 내용이 나옵니다. 박 대통령은 우리 민족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고생을 한 것은 서로를 돕는 민족애가 부족하고 과거의 양반이나 현재의 재벌 같은 특권층들이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파당의식에 대해서는 더 첨언할 필요가 없겠지요. 두 번째 항목을 보면 놀랍게도 요즘 정치인들이 하는 말과 흡사합니다. 민족사회를 제거하려면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이루며 개인 경제생활을 보장 하고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고양해야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치능력과 봉사의식을 향상시켜야한다는 박 대통령은 말하지요. 이 책이 나온 지 53년이 지난 지금과 비교해봐도 목표가 달라진 게 별로 없어 보입니다. 박 대통령은 조선시대를 통렬히 비판하는데 주로 이런 내용입니다. 첫째 사대주의와 자주정신의 결여-게으름과 불로소득 관념-개척정신의 결여-기업심(企業心)의 부족 -악성적 이기주의-명예관념의 결여-건전한 비판정신의 결여 등입니다. 반면 향약과 계, 국난극복을 위한 애국전통, 서민문학, 퇴계와 실학사상은 전승해야 할 우리의 자랑 스러운 문화유산으로 꼽습니다. 눈여겨볼 만한 것이 애국전통의 사례로 이 충무공과 의병운동과 동학농민운동을 꼽은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이 없겠지만 제가 본 바로는 박 대통령은 이런 과거를 개선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목표라고 생각했으며 이 충무공과 함께 비록 실현되진 못했지만 유비무환 (有備無患)의 국방정신을 가지고 향약을 몸소 실천했으며‘동호문답’,‘만언봉사’같은 현실적 처방을 내놓은 율곡선생을 우리 공직자의 모델로 여긴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두 분이 문무(文武)의 상징이었다는 거지요. 화석정과 자운서원을 보고 내친김에 적성쪽을 향해 달렸습니다. 도로 표지판에 ‘황포돛배’라는 안내가 있기에 가봤더니 임진강 따라 비무장지대를 관람하는 유람선이 모두 뭍으로 올라온 을씨년스런 풍경이었습니다. 엔진이 고장 났는데 고치려면 몇억원이 들기에 사업을 접었다고 동네 주민은 전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려는데 비무장지대에서 불과 4~5㎞밖에 안 떨어진 장산리라는 곳에서 해바라기 축제를 하더군요. 1사단과 25사단이 함께 지키는 곳이라는데 들판에 탐스러운 해바라기가 만발해있었습니다.
    여느 축제처럼 요란하지도 않고 관람객도 많지 않았지만 주민과 구경온 분들의 떠드는 소리가 북녘땅에도 들리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대북 확성기 방송은 중단됐지만 이렇게 자유로운 남한의 분위기가 경직된 북한군인들에게 전해지지 않을까요?
    ▲  화석정에서 동쪽으로 가면 나오는 황포돛배 선착장이다. 지금은 운행이 중단돼 을씨년스런 풍경이다.

    전쟁 위기가 있었지만 금세 평온을 되찾은 광활한 해바라기 밭에서 저는 율곡과 박 대통령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4강국 노림에 넘어가지않고 5000년 역사를 면면히 이어온 것 아닌가 싶어 내심 뿌듯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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