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23 백범 김구와 공주 마곡사

浮萍草 2015. 8. 28. 12:28
    우리나라 국민이 우남(雩南)보다 백범을 좋아하는 이유는 불우한 성장에 대한 존중 때문
    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효창동 백범기념관을 찾았습니다. 
    기인이사(奇人異士) 21편에 보도한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의 행적을 추적하던중 자료가 하도 없어 김구(金九ㆍ1876~1949)선생 기념관에서 그의 자취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였습니다.
    ▲  백범 김구선생의 자필 휘호다. 독립만세는 선생이
    평생 추구해온 목표였다.

    ▲  김구선생이 타고다니던 미제 뷰익 승용차다. 백범기념관에 전시돼있다

    과연 예상대로 백범(白凡)과 김원봉이 함께 한 사진 몇점을 발견하고는 기쁜 마음에 기념관 바로 옆 백범 선생의 묘소로 올라갔습니다. 백범의 묘소 옆에 누군가 발 빠르게 갖다놓은 화환이 있었는데 문재인(文在寅) 민주당 대표의 명의였습니다.
    ▲  백범의 묘소다. 조국광복을 위해 평생 싸워온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같은 동포에 의해 살해됐다.

    부인과 함께 모셔진 백범의 묘소 인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녕(李東寧) 주석-조성환 군사부장-차이석 비서부장 등 독립운동가들의 무덤도 많지요. 백범기념관 바로 앞에는 폭탄을 투척하는 자세의 이봉창(李奉昌)의사 동상도 늠름히 서 있습니다.
    ▲  이봉창의사의 동상이다.윤봉길-백정기의사와 함께
    삼의사로 불린다

    역사를 살펴보니 터에는 유래가 있는 모양입니다. 효창공원(孝昌公園)은 원래 5살 어린 나이에 죽은 정조(正祖)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와 몇달 후 죽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이었지요. 무덤을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한 것은 일제입니다. 더욱이 일제는 이곳을 구(舊) 용산고지라고 부르며 숙영지(宿營地)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일제는 더 나아가 여기서 독립군 토벌 작전을 폈다니 같은 장소에 묻힌 백범과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삼의사의 넋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합니다.
    ▲  백정기의사의 사진이다.일제시대, 우리 민족이
    견딘 것은 이런 열사들의 의거 때문이었다.

    미묘한 것은 백범 암살의 배후라고(아무 증거가 없는데도 많은 이들이 지금도 그렇게 믿는)알려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1956년 묘소를 이장하고 효창운동장을 건립하려다 좌절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이를 막은 것은 김두한(金斗漢) 의원이었지요. 백범과 우남 이승만 대통령은 함께 독립운동을 하고 함께 외국(하와이와 중국)에서 고생하고 함께 광복을 맞았지만 이후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백범은 모든 정치인이 첫손에 꼽는 롤모델이며 청소년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민족 지도자입니다.
    ▲  임시정부 요인들의 모습이다. 해방된 조국이 맞은 이들 앞에는 극심한 혼란상이 펼쳐졌다

    ▲  백범이 환국후 돌아와 절을 방문한 뒤 남긴 휘호다. '양심건국'이다.

    반면 이승만은 6ㆍ25때의 도주, 부정선거,장기집권이라는 과(過) 때문에 독립운동,건국,6ㆍ25라는 국난(國難)극복의 공(功)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어느 번듯한 거리에서 건국대통령 동상을 찾아볼 수 없는 게 그런 이유 아닌가 싶습니다. 대체 김구 선생이 어떤 면 때문에 국민의 열렬한 사표(師表)가 됐는지를 찾아보다 대학생 시절 읽었던 백범일지를 다시 펴보게 됐습니다. 당시에는 재미없게 읽은 기억뿐이었는데 50을 넘긴 이 시점에서 다시 보니 그렇게 흥미진진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국민이 우남(雩南)보다 백범을 좋아하는 이유가 몇 가지 차이 때문이 아닐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우남은 양녕대군의 후손(양반 출신)인데 비해 백범은 상놈의 집안에서 태어났지요. 그 부분은 잠시 후에 자세히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우남이 엘리트교육(배재학당-미국 프린스턴대-조지워싱턴대-하버드대)을 받은 데 비해 백범은 공부를 하긴 했지만 별 학력이 없습니다. 셋째 우남이 안전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데 비해 백범은 일제 추적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중국에서 활동했지요. 넷째 우남이 대통령이 된 데 비해 백범은 암살당하면서 그야말로 민족의 제단에 생명을 바친 격이 됐습니다.
    ▲  임시정부의 조직표다.

    이렇게 불우하게 성장해온 이를 우리는 항상 존중하고 선택해왔지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몇 년 전 대선(大選) 때도 이런 구도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백범의 이러한 성장과정의 비밀은 어린 시절에 있었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수립한 이후의 행적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이기에 저는 이번 기사에서 백범의 소년기부터 스님이 되기까지를 조명해보겠습니다. 백범은 안동 김씨 경순왕(敬順王)의 자손으로 경순왕의 8세손 충렬공(忠烈公)과 그 현손인 익원공(翼元公)이 시조입니다. 백범은 익원공의 21대손이라고 백범일지에서 스스로 밝혔습니다. 그런 이 집안에 멸문에 가까운 흉액이 닥칩니다. 바로 방계 조상인 김자점(金自點)이 역적으로 몰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백범의 11대조는 처자를 이끌고 서울에서 도망쳐 고양으로 왔다가 황해도 해주 서쪽 팔봉산 양가봉으로 갑니다. 놀랍게도 이승만 대통령의 고향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으니 해방 후 두 민족지도자가 모두 황해도 출신인 셈이지요. 김자점은 어떤 인물일까요? 참으로 재미있는 것이 희대의 간신 김자점이 희대의 배반자 김질(金礩)의 후손(종증조부)이라는 사실입니다. 김질은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자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을 복위시키려 꾀했을 때 이 사실을 수양대군에 고해 바쳐 출세한 인물입니다. 이런 인물 밑에서 태어난 김자점은 광해군 대들어 인조반정의 주역이 되면서 벼슬길에 나섭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공적보다 당시 실세였던 김상궁에게 상당한 뇌물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기 동생을 세력가 이귀(李貴)의 딸과 결혼시켰습니다. 그런데 병약한 동생이 일찍 죽자 이귀의 딸 이예순은 궁중의 무수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무수리 이예순이 김상궁의 총애를 받자 권력의 화신인 김자점이 거기 연줄을 댄 것이지요. 이렇게 출세길에 나선 김자점은 다혈질에 능력도 없었지만 운이 따랐는지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왕실을 호종한 공로로 도원수가 됩니다. 하지만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도원수로서 임진강 이북에서 청군(淸軍)을 저지하긴커녕 도망치기에 바빠 전쟁 후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을 받게 됩니다. 인조가 강화도 아닌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의 졸전이지요. 김자점은 재기해 영의정까지 되지만 효종 즉위 후 사림(士林)의 중심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에 의해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청의 앞잡이인 역관 정명수 (鄭命壽)에게 북벌계획을 밀고하지요. 결국 김자점은 아들 김익(金釴)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처형당하면서 기나긴 간신생활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못된 선조 때문에 상놈이 된 백범은 1876년 7월11일 김순영,어머니 현풍 곽씨 사이에서 유일한 아들로 난산(難産) 끝에 태어납니다. 얼마나 산통(産痛)이 심했는지 아버지는 소 길마를 뒤집어쓰고 지붕에 올라가 ‘음매’하는 소 울음소리를 냈다고 합니다. 가난한 집안 사정 탓에 백범이 처음 한문을 배운 것은 열두살 때였습니다. 처음 배운 말이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말 위에서 한식을 맞다)이란 다섯 글자였는데 무슨 뜻인지로 모르고 밤새도록 이 말을 외우며 배움의 기쁨을 처음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  백범의 어머니 청동조각상이다.어머니는 김구선생의
    옥바라지부터 독립운동을 평생 도왔다.

    하지만 반년도 안돼 서당에서의 배움을 끝납니다. 백범과 함께 배우는 부잣집 자식이 둔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훈장선생의 숙식을 제공하는 부잣집에서 볼 때 제 자식은 엉망이고 상놈 자식이 매번 일등을 하니 눈꼴이 사나워 볼 수 없었겠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친이 반신불수가 돼 백범은 배움을 중단하고 소고삐를 든 채 들판을 헤매며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다 정문재라는 선비를 만나 무료 수강생으로 한당시(漢唐詩)와 ‘대학’ ‘통감’과 ‘대고풍십팔구(大古風十八句)’를 익힙니다. 예나 지금이나 없는 집안에서 출세하는 길은 고시(考試) 같은 것에 덜커덕 붙는 것입니다. 백범 역시 1892년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치러지는 과거에 응시하러갑니다면 현장에서 볼 꼴 사나운 모습들을 목격하고는 과거에 대한 뜻을 접게 됩니다. 수십번 떨어진 늙은 선비가 큰소리로 울며 합격시켜달라고 비루하게 굴거나 대리시험을 보는가 하면 돈만 많으면 실력이 없어도 붙을 수 있다고 수군대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의 현장을 본 것이지요.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草浮
    印萍

    김구가 서당과 공부에 흥미 잃고 동학에 입도하게된 이유
    ▲  백범 김구선생의 모습이다.
    범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고합니다. “ 이번 과거시험장에서 이런저런 꼴을 보니 제가 어떻게든 공부를 성취하고 입신양명해서 양반의 압제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유일한 진로라는 과장(科場)의 악폐가 그러했습니다. 이제 서당 공부는 그만두겠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아버지는 옳더구나 싶었는지 아들에게“너 그러면 풍수(風水)나 관상(觀相)공부를 해보아라”라고 권하지요. 풍수에 능해 명당을 얻어 조상을 잘 모시면 자손이 복을 받을 것이고 관상을 잘 보면 선인군자를 만나게 된다고 유혹한 겁니다. 백범은 그 말도 옳다 싶어 ‘마의상서(麻衣相書)’라는 책을 석달간 두문불출하고 공부했는데 스스로 상을 보고는 실망해 관상가가 되려는 꿈도 포기하고 맙니다. 그의 고백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흥미가 동하는 것은 남의 상보다는 나 자신의 상이었다. 그랬더니 귀격(貴格)이나 부격(富格)이라 할만한 좋은 상은 한군데도 없고 얼굴과 온몸이 천격(賤格) 빈격 (貧格) 흉격(凶格)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않아도 과거시험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려고 상서를 공부한 것인데 그 이상으로 심한 비관에 빠지게 되었다. 짐승과 같이 살기나 위하여 살까,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유일하게 상서에서 백범을 위로하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여기 위안을 얻은 백범은 병서(兵書)를 읽거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세월을 보내지요. 그러던 중 동학이 세력을 얻자 백범은 이웃동네에 살던 오응선,최유현이라는 사람들을 통해 동학에 입도 (入道)합니다. 그가 동학에 마음들어한 대화가 있습니다. “동학은 어떤 것이냐”고 묻는 백범의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도는 용담(龍潭) 최수운(崔水雲) 선생이 천명하였으나 이미 순교하셨고 지금은 그 조카 최해월 (崔海月) 선생이 대도주가 되어 포교 중입니다. 근본취지는 말세의 간사한 인류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 새 백성이 되게 하여서 장차 진정한 주인님을 모시고 계룡산에 새 국가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이 말에 감명받아 ‘동경대전’ ‘팔편가사’ ‘궁을가’같은 책을 얻어 집으로 온 백범은 동학교도가 되기 위해 필요하다는 쌀 한 말과 백지 세권과 황초 한 쌍을 마련해 입도식을 마쳤는데 얼마 되지 않아 그의 휘하에 수백명의 신자가 들어왔습니다. 리더로서의 자질을 보인 겁니다.
    백범의 원래 이름은 어렸을 적 김창암(金昌巖)에서 김창수(金昌洙)로,김구(金龜),김구(金九)로 바뀌었는데 무슨 영문인지‘김창수가 한길이나 떠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노라’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의 도력(道力)이 신통하다는 쪽으로 번지게 됩니다. 결국 그는 황해도-평안도의 동학당 가운데 가장 나이 어린 접주(接主)가 되지요. 이 ‘애기 접주’는 최해월을 접견하는 황해도 15인에도 선발이 되는데 그 자리에서 훗날 천도교 지도자가 되는 손병희(孫秉熙ㆍ당시 이름 손응구) 등을 만납니다. 그는 또한 동학 봉기를 앞두고 안진훈 진사의 밀서를 받게 되는데 이 안진사의 아들이 훗날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암살한 안중근(安重根) 의사이니 독립 운동의 맥이 이렇게 연결됩니다.
     
    ▲ (左)임시정부 요인들의 모습이다 ▲ (右)독립운동을 도운 외국인사들이다. 사진 맨 윗쪽 좌측이 장개석 총통, 그 옆이 부인 송미령 여사다.

    백범은 동학봉기군의 지도자로 관군-왜병 연합군과 맞서지만 결국 패합니다. 동학 최고지도부는 패전하기 직전, 그의 접주 지위를 해제하는데 백범은 이런 결정을 “나의 병권(兵權)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려내려는 계책이었다”고 회고하지요. 관군과 왜병의 추적에 시달리던 백범을 받아준 것도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진훈 진사였습니다. 당시 백범의 눈에 비친 안중근 의사의 기록이 남은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맏아들 중근은 열여섯의 나이로 상투를 틀고 있었다. 머리를 자줏빛 수건으로 질끈 동이고 돔방총이라는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즐겼다. 보기에도 영특한 기운이 묻어나고 청계동 군사 중에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짐승이건 새건 그가 겨눈 것은 놓치는 일이 없기로 유명하였다. 늘 넷째 삼촌 태건과 함께 사냥하러 다녔는데 그들이 잡아오는 노루와 고라니로 군사들을 먹였다.” 백범은 이후 고능선(高能善)이라는 노학자와 교유하고 관북(關北)지방과 청국(淸國)시찰에 나섭니다. 참빗장수로 행색을 꾸미고 떠난 관북지방 구경은 평양, 강동, 양덕, 맹산, 고원, 정평, 함흥, 북청, 갑산, 혜산진으로 이어지는 코스였습니다. 이어 백두산으로 접근해 통화현성을 보고 관전(寬甸)이라는 곳에서 ‘삼국충신 임경업지비(林慶業之碑)’라는 비문까지 구경하는데 백범의 관북지방과 중국 시찰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훗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게 되는 자양분이 됩니다. 즉 이미 만주지방에서 동포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정작 가장 증오스러운 인간들이 중국인이 아니라 호통사(胡通使), 즉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조선사람 이라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백범은 호통사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회고를 남겨놓고 있습니다. “중국어 몇 마디 배워가지고 불쌍한 동포의 피를 빨아먹는 것이었다. 갑오년 난리(동학혁명)를 피하여 생소한 이 땅에 건너온 우리 동포들은 중국사람들이 살 수 없어서 내버린 험한 산골을 택하여 화전을 일구고 조나 강냉이를 지어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호통사라는 놈들은 중국사람에게 붙어서 무리한 핑계를 만들어 혹은 동포의 전곡을 빼앗고 혹은 부녀의 정조를 유린하는 것이었다. 한곳을 가노라니 어떤 중국인의 집에 한복을 한 처녀가 있기로 이웃사람에게 물어본즉슨 그 역시 호통사의 농간 아래 부모의 빚 값으로 중국인의 집에 끌려온 것 이라고 하였다. 관전, 임강(臨江), 환인(桓仁) 어디를 가도 호통사의 폐해는 마찬가지였다….” 어떻습니까? 이 구절을 보면 일제시대 때 일본에 붙어 동포를 괴롭히던 친일파 못지않게 별의별 곳에서 동포를 괴롭히는 한민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하간 백범은 이런 민정(民情)시찰과 함께 만주독립군의 활동도 접하게 됩니다. 이렇게 귀중한 정보를 접하고 국내로 돌아온 백범은 중국으로 완전히 가려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중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일본인을 죽여버리고 집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리곤 석 달 후 처음으로 투옥됩니다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草浮
    印萍

    김구는 탈옥해 승려가 됐지만 결국 나라를 위한 활동을 하게 돼
    생은 1897년 7월 사형을 언도 받고 동년 8월 26일 사형집행이 확정되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광무황제(고종)의 특사(特赦)로 사형 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짐에 따라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훗날 이 아슬아슬했던 과정이 공개됐습니다. 
    백범이 사형을 면하게 된 것은 법무대신이 사형자 명단에 선생의 이름과 함께 죄명을‘국모보수(國母報讐)’라고 쓴 것입니다. 
    즉 국모를 죽인 일본인들에게 원수를 갚았다는 뜻이지요. 
    이것을 본 황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열어 백범의 사형을 면하게 합니다. 
    또 한가지, 백범은 당시 인천교도소에 수감돼있었는데 전화가 개설된 것은 처형 사흘 전이었다고 합니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늦게 됐었다면 아무리 황제의 명령이 있더라도 그 내용이 전달되기 전에 사형이 집행되었겠지요.
    2년 만에 백범은 감옥을 나섭니다. 
    형기가 만료된 것이 아니라 탈옥(脫獄)을 한 것이지요. 
    백범은 이후 전국을 방랑하던 어느 날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에 도착합니다.
    ▲  마곡사 대웅보전은 2층 형태로 돼있다

    때는 안개가 마곡사를 감싼 저녁, 범종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지친 그에게 동행하던 이 서방이 출가(出家)를 권유합니다
    ▲  마곡사 대웅보전 옆에 있는 '그대의 발길을 돌리는 곳'이란 글자가 정겹다

    알지 못할 힘에 이끌려 백범은 마곡사 매화당(梅花堂)에 도착합니다.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산문(山門)을 내달리는 시냇물 위 다리를 지나 심검당(尋劒堂)에 도착하니포봉당(抱鳳堂)이라는 노승이 일행을 맞지요.
    ▲  스님이 된 백범이 머문 마곡사의 심검당이다

    ▲  심검당이란 글자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다

    ▲  심검당의 예전 모습이다

    이 50년 됐다는 노승은 백범에게 상좌(上佐)되기를 청합니다. 다음날 결국 백범은 머리를 깎지요. 상투가 떨어지는 순간 모래 위에 눈물을 흘렸다는 그 장소가 아직도 마곡사에는 남아있습니다. 모래는 없고 바위만 잡초 사이로 언뜻 보이지요.
    ▲  백범이 머리를 자른 삭발터다. 머리를 자른 후 그는 굵은 눈물을 흘렸다고한다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얻은 백범은 이후 갖은 불교 서적을 섭렵하면서 여섯달의 세월을 보냅니다만 주변에서는 그를 부러워하는 스님들이 많았다지요. 주지 스님이나 그가 모시는 하은당(荷隱堂)이 모두 칠팔십 노인이니 그들만 작고하면 그 많은 재산이 모두 원종의 것이 된다는 수군거린 겁니다
    ▲  마곡사 스님들이 거처하는 공간이다

    ▲  예불을 드리기위해 대광보전으로 들어가는 스님들. 백범도 아마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원종,즉 백범은 마곡사를 떠나 환속(還俗)하고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계몽운동을 하고 신민회 활동에 참여하다 두 차례나 투옥되며 일제로부터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그가 받은 형기는 2차 때 2년, 3차 때는 거기 15년이 추가됐습니다. 감형(減刑)을 받은 끝에 풀려난 백범은 얼마 뒤 중국으로 떠나게 되고 여러분도 잘 아시는 임시정부에서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어떻습니까,이렇게 기구하고 불운한 삶을 살았던 백범 선생이 없었던들 과연 우리가 이렇게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까요? 충남 공주 마곡사는 유서깊은 절입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맨 먼저 만나는 곳이 해탈문(解脫門)이고 마곡천을 건너는 돌다리가 보입니다.
    ▲  마곡사 경내로 진입할 때 제일 처음 만나는 해탈문이다

    ▲  마곡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마곡천을 건너며 백범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었을 것이다

    거길 건너면 오른쪽으로 심검당, 왼쪽으로는 백범당이 있고 정면으로 대광보전과 그 뒤 대웅보전이 보이지요.
    ▲  심검당 맞은편에 있는 백범당에는 그의 유물이 있다

    ▲  대광보전의 문짝이다. 어느 미술작품보다 화려하다

    ▲   마곡사 대웅보전의 지붕이 하늘로 날아갈듯 날렵하다

    대광보전 옆길로 가면 넓은 마곡천 건너는 징검다리가 보이고 백범 명상길이 시작됩니다.
    ▲  백범 명상길을 걸으며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도 의미있을 것이다

    ▲  백범이 절에 은거했던 것을 기념해 심은 나무다

    북한의 위협이 날로 심해지는 요즘, 일희일비하지 말고 백범길을 걸으며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차분히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입니다.

    ▲  대웅보전 위에서 내려다본 대광보전의 뒷모습이다.

    ▲  대웅보전 위에서 내려다본 대광보전의 뒷모습이다

    ▲  마곡사 대광보전 앞에 있는 탑은 티벳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