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朝線時代 夫婦사랑法

11 추사 김정희

浮萍草 2015. 9. 11. 10:06
    성격이 오만했던 추사를 꼼짝 못하게 했던 여인
    사 김정희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예가요, 실학 중 금석학과 고증학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하지만 추사가 아내 사랑이 대단했던 애처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실제로 추사는 글씨나 그림,학문 뿐 아니라 아내에게 한글편지를 많이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한글편지만 해도 무려 40여 통이나 된다.
    
    ㆍ까다롭고 오만한 성격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난 추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탁월하여 여러 책을 두루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역사에 통달했고,초서와 해서,전서,예서 등 글씨체에서도 높은 경지에 올랐다. 그래서인지 때로 거리낌 없이 행동하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기도 했다. 특히 여러 사람들이 증언하듯 추사는 성격이 대단히 까다롭고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제주 유배길에 호남의 유명한 서예가 창암 이삼만의 글씨를 보고서“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라고 혹평하거나, 해남 대둔사에 걸려 있는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란 네 글자를 보고서 초의선사에게“원교의 현판을 떼어버리게!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것을 걸고 있는가!”라고 부탁 아닌 명령을 내린 것이 그 대표적인 일화라 하겠다.
    ▲  추사 김정희 초상화.
    /정창권
    ㆍ내 사랑! 예안 이씨
    그런 추사도 꼼짝 못할 정도로 각별히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둘째부인 예안 이씨였다. 추사는 비록 예술이나 학문 세계에선 깐깐하고 오만한 사람이었을지언정 아내 예안 이씨에게는 한없이 깍듯하고 애정이 넘치는 낭만 적인 지아비였다. 추사도 이전의 퇴계 이황처럼 일생동안 두 번의 결혼을 했다. 첫 번째는 15살에 한산 이씨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결혼한 지 5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두 번째는 삼년상을 치른 뒤인 23살 때 19살의 예안 이씨와 재혼해서, 이후 20여년 동안 함께 살았다. 추사는 둘째 부인 예안 이씨를 무척 사랑했고 부부간 금슬도 상당히 좋았던 듯하다. 추사의 예안 이씨에 대한 사랑은 무엇보다 40여 통의 한글편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추사는 30대,40대,50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예안 이씨에게 한글편지를 썼는데 그중 대표적인 편지들을 통해 추사의 부부관계와 부부 사랑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ㆍ나는 마음이 심히 섭섭하옵니다
    “지난번 길을 가던 도중에 보낸 편지는 보셨는지요? 그 사이에 인편(人便)이 있었는데도 편지를 보내지 않으니 부끄러워 아니한 것이옵니까? 나는 마음이 심히 섭섭하옵니다. 그동안 한결같이 생각하며 지냈사오니 계속 편안히 지내시고, 대체로 별 일 없고 숙식과 범절을 착실히 하옵소서.” 이 편지는 추사의 나이 33살인 1818년 2월에 경상감사로 있는 친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면서 한양에 있는 아내 예안 이씨에게 보낸 것의 일부이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이자 실학자가 나이 어린 아내에게 왜 답장을 하지 않았느냐며 섭섭하다고 투정을 부리고 그동안 밖에 나와 있었어도 한결같이 당신을 생각하고 지냈다면서 아내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이 매우 재미있다. 또 아내에게 쓴 편지에‘~하옵니다’,‘~하옵소서’라고 극존칭을 쓰고 있어 놀라울 따름이다.
    Premium Chosun ☜       정창권 고려대 초빙교수 myjin5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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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기생에게 빠진 추사, 아내가 이 사실을 알자...
    ㆍ다 거짓말이오니 곧이듣지 마옵소서 “그 사이에 다들 편안히 지내시고 대체로 별고 없으신지요? 어린 것도 탈 없이 있는지 염려되옵니다. 여기는 아버님께서 병환이 있어 나도 3일경에 가다가 돌아와 약시중을 들고 있사옵니다. 오늘은 억지로 세수까지 해보려고 하시니 천만 다행이옵니다. 나는 편안하오며 집안의 일을 잊고 있사옵니다. 당신께선 다른 의심하실 듯하오나 이실(李室)의 편지는 다 거짓말이오니 곧이듣지 마옵소서. 참말이라고 해도 이제 늙은 나이에 그런 일에 거리낄 것이 있겠습니까?” 편지는 추사의 나이 43살 때 평양감영에서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고 있으면서 아내에게 보낸 것의 일부이다. 평양의 명기 죽향과의 소문(스캔들)이 아내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급히 변명하는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다. 도도하기로 유명한 죽향은 시를 잘 지었고 난초와 대나무 그림도 잘 그렸다. 당시 양반들은 다투어 그녀의 시와 그림에 찬사를 보내었고 추사도 그런 죽향에게 반하여 마음이 담긴 시를 지어주는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문제가 생기고 말았는데, 이실(李室), 곧 이씨 집안으로 시집간 누이가 그 일을 아내 예안 이씨에게 일러바친 것이었다. 그래서 추사는 아내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워 부랴부랴 이런 변명어린 편지를 써서 보냈던 것이다. 혹시라도 의심을 하고 있을지 모르나, 누이의 말은 다 거짓이니 곧이듣지 말라는 것이다. 잠깐 동안 한눈을 팔았다가 아내에게 들켜 전전긍긍하는 여느 남성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  평양 감영에서 한양 장동 아내에게 쓴 편지. /멱남서당
    ㆍ당신만은 죽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아 나는 형구가 앞에 있고 유배지로 갈 때 큰 바다가 뒤를 따를 적에도 일찍이 내 마음이 이렇게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상을 당해서는 놀라고 울렁거리고 얼이 빠지고 혼이 달아나서 아무리 마음을 붙들어 매려해도 그럴 수가 없으니 이 어인 까닭인지요. 아아, 무릇 사람이 다 죽어갈 망정 유독 당신만은 죽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죽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죽었기에 이토록 지극한 슬픔을 머금고 더 없는 원한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뿜으면 무지개가 되고 맺히면 우박이 되어 족히 공자의 마음이라도 뒤흔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추사는 55세인 1840년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를 갔다. 그로부터 2년 후 아내의 병이 심상치 않다는 전갈을 받았다. 본래 예안 이씨는 젊었을 때부터 몸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석 달이 넘도록 병의 증세가 계속된다는 것이었다. 추사는 아내의 병이 빨리 낫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하지만 그 편지를 쓰기 하루 전 예안 이씨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추사는 한 달 뒤에야 그 사실을 알고 고향을 향해 엎드려 오열했다. 그리고는 위와 같은 애서문(죽은 이를 슬퍼하는 글)을 지어 아내의 제사 때 영전에 고하도록 했던 것이다. 50대의 부부사랑은 이처럼 죽은 아내의 영전에 바치는 애서문에 훨씬 잘 나타나 있다. 그와 함께 추사는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도망시(悼亡詩)를 짓기도 했다. “누가 월하노인(남녀의 인연을 맺게 해준다는 전설상의 노인)께 호소하여 내세에는 서로가 바꿔 태어나 천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 나의 이 서러운 마음을 그대도 알게 했으면.” 내세에는 서로 바꿔 태어나 아내에게도 이 서러운 마음을 알게 하고 싶다니 도대체 그 슬픔이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 표현했을까? 추사의 아내 예안 이씨에 대한 사랑이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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