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朝線時代 夫婦사랑法

7 조선시대 부부싸움의 가장 큰 원인은?

浮萍草 2015. 7. 17. 09:30
    
    ㆍ조선시대 사람들도 부부싸움을 했을까?
    ▲  김희겸의 <석천한유도> /예산 전씨 종가 소장
    상에 싸우지 않고 사는 부부가 어디 있을까? 한날한시에 태어나 거의 한 몸처럼 자란 쌍둥이들도 틈만 나면 서로 싸우는데 전혀 다른 부모와 가정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부부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산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젊어서 결혼하나 늙어서 결혼하나 최소한 10년은 정말 지겹도록 싸우는 듯하다. 그러면서 조금씩 서로 적응하며 인생의 단짝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禮)를 중시했던 조선시대 부부들도 서로 싸웠을까? 당연히 그들도 오늘날 사람들 못지않게 치열하게 싸우며 살았다. 특히 가부장제가 정착하기 이전인 조선 전·중기엔 부부들이 ‘애절’하게 사랑했던 만큼이나 ‘치열’하게 싸우기도 했다. 다만 부부싸움의 주요 원인은 과거와 현재가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현대는 개인중심 사회라 부부간의 성격(생활방식,가치관)이나 경제,성(性),집안 등의 문제로 많이 싸운다. 반면에 조선시대는 가족공동체 사회였기 때문에 개인적인 문제보다 공동체적인 문제로 많이 싸웠다. 남편의 집안일에 대한 무관심,다시 말해 살림살이나 자식교육 같은 가사(家事)를 돌보지 않아서 많이 싸웠다. 예컨대 조선 중기 오희문(1539~1613)의 일기인『쇄미록』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1596년 10월 4일. 아침에 아내가 나보고 가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해서 한참 동안 둘이 입씨름을 벌였다. 가히 한심스럽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부부싸움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남편의 외도였다. 남편이 몰래 첩을 두거나 기녀를 상대하는 등 외도를 하자,그에 대한 배신감이나 실망감을 느낀 아내가 강력히 저항하면서 부부싸움이 크게 벌어졌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이문건(1494~1567)의 일기인『묵재일기』를 들 수 있다. “1552년 10월 5일.아내가 지난밤에 해인사 숙소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물었다. 기녀가 곁에 있었다고 대답하니,크게 화를 내며 욕하고 꾸짖었다. 아침에도 방자리와 베개 등을 칼로 찢고 불에 태워버렸다. 두 끼니나 밥을 먹지 않고 종일 투기하며 욕하니 지겹다.”
    ㆍ아내를 두려워하는 남자들
    조선 전·중기엔 처가살이 시대로 여권이 제도적, 관습적으로 보상되어서인지, 아내가 남편에게 학대를 당하는 이른바 ‘매 맞는 여자’에 대한 기록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남편이 아내를 두려워하는 외처가(畏妻家) 혹은 공처가(恐妻家)에 대한 기록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서거정(1420~1488)의 『태평한화골계전』에 수록된 이야기 한 편을 들어보자. 어떤 대장이 있었는데, 아내를 몹시 두려워하였다. 하루는 교외에서 홍기와 청기를 세워놓고 휘하의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아내를 두려워하는 자는 홍기 아래로 모이고, 아내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청기 아래로 모여라!” 군사들은 모두 홍기 아래로 갔다. 그런데 유독 한 군사만이 청기 아래로 가는 것이었다. 대장은 그 군사를 장하게 여기며 칭찬하였다. “너야말로 진정한 대장부로다.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아내를 두려워한다. 나도 대장으로서 백만 대군을 이끌고 전장에 나서면 사력을 다해 싸우지.화살과 돌이 빗발쳐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다. 허나 집안에만 들어가면 대장으로서의 위엄을 지키기는커녕 도리어 아내에게 제압당하고 만다. 근데 너는 대체 어떻게 처신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그러자 군사가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내가 항상 제게 주의를 주었습지요. ‘남자들은 셋만 모이면 반드시 여색을 얘기하기 마련이오. 그러니 세 사람 이상 모이는 곳에는 절대로 가지 마시오!’. 저 홍기 아래를 보니 모인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지요. 그래서 그리로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말에 대장이 길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아! 정녕 이 세상엔 아내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한 명도 없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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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가정폭력의 원조는 흥부?
    ▲  신윤복의 <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ㆍ조선의 매 맞는 남자들 지어 조선 중기엔 아내에게 학대를 당하거나 집안에서 쫓겨나는 이른바 ‘매 맞는 남자들’도 적잖이 있었다. 특히 중종 12년(1517)에는 그러한 사건들이 한 해 동안에 무려 6건이나 발생하여 조정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대상도 일반 평민층이 아닌 조정에서 근무하는 양반 사대부들이라 충격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1) 이형간 사건: 덕산현감 이형간이 밤새도록 고을 앞 정자에서 기녀들을 끼고 술을 마시며 놀다가 새벽녘에야 돌아오자 그의 아내 송씨가 꼴도 보기 싫다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형간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와 동헌에서 혼자 자다가 뜨거운 열기에 지쳐 죽고 말았다. 소식을 들은 임금은 근본적으로 이형간이 처신을 잘못해서 생긴 일이라면서 송씨를 단지 의금부 감옥에 가두어 심문만 하라고 했다. 2)홍언필 사건: 홍언필이 사헌부 지평이었을 때 밖에다 몰래 첩을 두고 있었는데 그 아내 송씨가 이를 알고 그 여자를 끌어다가 머리털을 자르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구타하였다. 홍언필은 조정에서 퇴근하고 돌아오다 그 첩의 친척들에게 호된 나무람을 들었다. 그 뒤로 홍언필은 다시는 첩을 두지 않았고 그 자신 뿐만 아니라 아들 홍섬까지도 세 번씩이나 영의정에 오르는 등 명재상이 되었다. 3,4)허지, 정종보 사건: 전 사헌부 집의 허지와 상주목사 정종보의 아내도 기가 아주 센 여인들이었다. 남편들이 몰래 첩을 두거나 기녀를 상대하자 허지의 아내는 시댁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말하기를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내가 그를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거나 때로는 집안 노비들에게 상복을 입혀 곡(哭)을 하도록 시키기도 했다. 또 정종보의 아내는 남편과 따로 산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늘 사람들에게 맹세하기를 “일평생 그와 함께 살지 않겠다”고 했다. 5)신수린 사건: 군자감 판관 신수린이 집안 여종과 사통하 그 아내 성아기가 화가 나서 여종의 입을 돌로 쳐서 죽여버렸다. 게다가 그 시신을 싸서 남편에게 보내 직접 보게 했다. 이를 안 임금이 성아기에게 곤장 60대와 유배형에 처하도록 , 신수린은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죄로 파직시키도록 했다. 6)홍태손 사건: 얼굴이 추하게 생기고 아들이 없던 홍태손이 나이 50세에 집안의 대가 끊길 것을 염려하여 다시 신씨에게 장가들었다. 마지못해 결혼한 신씨는 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5~6년 동안이나 홍태손과 별거했다. 또 홍태손을 볼 때마다 욕하기를 “너는 추한 얼굴에 나이도 많고 기력도 없으면 무얼 믿고 혼인하여 나를 초췌하게 만드느냐? 일찍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다. 홍태손이 사헌부에 이혼 소송을 하자, 임금이 서로 이혼하라고 했다.
    이처럼 가부장제가 정착하기 이전인 조선전·중기 여성들은 남편에게 부당한 일을 당하면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웠다. 또 당시 사회도 그러한 여자들의 반발을 조선 후기처럼 무조건 ‘투기’로 매도한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처사라고 여겼다. 그렇다면 아내들이 남편에게 학대를 당하는 소위 ‘매 맞는 여자들’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조선 후기,특히 18세기 중·후반 이래 본격적으로 생겨난 듯하다. 원래 가정폭력이란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때리는 법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한 18세기 중후반부터 매 맞는 여자들이 많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로 아이러니컬하게도 판소리 <흥부가>의 주인공 흥부를 들 수 있다. 형 놀부에 의해 쫓겨난 흥부는 그 많은 식구들을 데리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빌어먹고 산다. 그런데 아내가 어린 것을 등에 업고 바가지를 들고 힘들게 밥을 구걸해 오면, 흥부는 그 상황에서도 가장 노릇을 한답시고 “뭣하다가 이제 왔느냐!”며 짚고 있던 지팡이로 사정없이 때릴 뿐 아니라, 입에 맞는 반찬이 없다고 투정하며 집에 불을 지르려고까지 한다. 한마디로 흥부는 우리나라 가정폭력의 원조격이었던 것이다.
    ▲  "김득신의 <긍재전신첩>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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