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朝線時代 夫婦사랑法

6 서유본과 이빙허각

浮萍草 2015. 7. 3. 09:58
    남편 사별 2년 뒤 따라 죽으며 아내가 지은 절명시
    
    절명사
    
    1824년 2월, 66세의 이빙허각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붓을 들었다. 
    2년 전 남편을 잃은 뒤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만 누워있어서인지 온몸에 기운이 없고 머리에선 현기증마저 일었다. 
    그녀는 붓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서 마지막으로 절명시(絶命詩) 한 수를 남긴 뒤 끝내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사는 것은 취한 것이요 죽는 것 또한 꿈이리니
    살고 죽는 것은 본디 참이 아니라네.
    부모에게 받은 목숨을 어찌하여 티끌처럼 여기겠는가?
    태산과 홍해처럼 베풀고
    서로 의를 따라 살았네.
    우리 혼인할 때의 사랑을 생각하니
    세상 그 어떤 것도 비할 바가 없었네.
    평생을 짝을 이루어 아름다운 부부의 연을 맺은 지
    50년이라네.
    내가 받은 사랑의 기쁨을 잊을 수가 없으니
    지기(知己)의 은혜에 보답해야만 하리.
    이제 죽을 자리를 얻었으니
    일편단심 신에게서 질정 받으리.
    나 죽어 지우(知友)에게 사례하리니
    어찌 내 몸을 온전케 하리오.
    ㆍ소론 명문가의 자녀들
    독서하는 여인 /서울대 박물관 소장
    도대체 남편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었으면 죽음으로써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걸까? 이빙허각은 영조 35년(1759) 이창수와 문화 유씨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명망 높은 소론 가문이었으며 외가 역시 실학과 고증학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집안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아버지가 무릎에 앉혀놓고 『소학』이나 『시경』등을 가르쳐주었다. 자라면서도 꾸준히 학문을 연마하여 여러 서적들을 두루 섭렵했으며, 시와 문도 잘 지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여사(女士), 즉 여성 선비라 불리기도 했다. 특히 그녀는 성격이 불과 같아서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다. 5~6살 무렵, 또래 아이들은 모두 젖니를 가느라고 이가 빠졌는데 그녀 혼자만 그대로였다. 이에 그녀도 얼른 이를 갈고 싶어 장도리로 두드려 아랫니와 윗니를 뽑아 버렸다. 당연히 입안에서 피가 줄줄 흘러넘쳤다. 빙허각은 15살에 3살 연하의 서유본과 결혼했다. 시댁 역시 유명한 실학자 집안으로 명물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농학 연구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시아버지 서호수는 농학 연구서인 『해동농서』를 저술했고 시동생 서유구는 박물학서인 『임원경제지』를 저술했다. 또 서유구는 8천여 권의 서적을 소장한 조선의 장서가로도 유명했는데, 이것들은 훗날 빙허각의 저술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남편 서유본은 여느 남자들과 달리 빙허각의 학문적 재능을 존중해주었고,평생 동안 학문적 동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빙허각은『빙허각시집』 1권,『규합총서』 8권,『청구박물지』 5권 등의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부부간 금슬도 좋아서 슬하에 4남 7녀를 두었으나, 불행히도 아들1, 딸2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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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탄대로 인생 살던 부인, 47세에 집안이 몰락하자...
    ㆍ우린 학문적 동료였다
    규합총서 표지
    편 서유본은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과묵했으며 다방면에 걸쳐 재주가 있었다. 글을 잘 지어 22살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아쉽게도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이후 43살에야 음보로 종9품의 동몽교관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중부 서형수가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를 당하면서 위풍당당하던 집안은 한순간에 몰락하고 말았다. 서유본은 후환을 피하기 위해 동호 행정으로 내려가 아내와 함께 차밭을 일구며 오로지 독서와 저술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지금까지 빙허각은 남편과의 금슬도 좋고 시댁에서도 든든한 지원을 받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의 삶을 살아왔다. 그런 부인이 47살 비교적 늦은 나이에 집안이 몰락하며 부딪치게 된 시련들은 그 누구보다 힘들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안이 곤궁해지자 주저 없이 생계에 뛰어들어 농사일을 책임지고 차밭을 일구고, 양잠을 하는 등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 그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도, 남편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동호 행정 시절에 이들 부부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을지 모르나 정신적으로는 인생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절을 보냈다. 그때 빙허각은 살림하는 틈틈이 사랑방에 나가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 유명한 최초의 가정백과서 『규합총서』를 저술한 것이다. 기사년(1809) 가을에 내가 동호 행정에 집을 삼아 집안에서 밥 짓고 반찬 만드는 틈틈이 사랑방에 나가 옛글 중에서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과 산야에 묻힌 모든 글들을 구해 보며 견문을 넓히고 심심풀이를 할 뿐이었다. 어느 날 문득 ‘총명이 무딘 글만 못하다’는 옛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글로 적어두지 않으면 어찌 잊어버리지 않으리오. 그래서 모든 글들을 보며 가장 요긴한 말을 가려내고 혹 따로 내 소견을 덧붙여『규합총서』5편을 만들었다. 그런 아내를 서유본은 더욱 존중했고 그녀의 저술활동을 아낌없이 지원해주었다. 몰락한 집안을 말없이 꾸려나가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때문이었을까. 서유본은 정말 최선을 다해 외조를 했다. 평소 그는 아내와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걸 매우 좋아했다.
    아내가 저술할 때에도 곁에서 자료를 찾아주었고, 궁금한 것을 실험할 때에도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또 자신이 모르는 것은 남들에게 물어서라도 알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내가 지치고 힘들어할 때에는 애정으로 독려해주기도 했다. 심지어 『규합총서』의 집필이 끝난 뒤에는 그 책의 제목까지 지어주었다. 나의 아내가 여러 책에서 뽑아 모아서 각각 항목별로 나누었다. 시골의 살림살이에 요긴하지 않은 것이 없고 더욱이 초목, 새, 짐승의 성미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하다. 내가 그 책 이름을 명명하여 『규합총서』라고 했다. 조선 후기엔 여성들이 책을 읽는 것은 그나마 용인했으나 글을 짓는 일은 매우 탐탁치 않게 여겼다. 하지만 서유본은 그에 개의치 않고 물심양면으로 아내의 저술 작업을 힘껏 도왔다. 그런 남편에 대한 고마움일까. 빙허각은 해마다 중양절이면 백화주를 담아 그에게 대접했다. 백화주(百花酒)는 사시사철 피어나는 100가지 꽃잎을 따서 빚은 것으로, 온갖 정성을 기울여야만 얻을 수 있는 아주 까다로운 술이었다. 그만큼 귀한 술이었던 것이다. 진정한 부부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단지 말이 통하고 마음이 잘 맞는 친구 같은 부부일까? 그보다는 서로를 키워주는 관계인 인생 동료 더 나아가 서로를 완성시켜주는 학문적 동료가 아닐까 한다. 서유본과 이빙허각은 바로 그런 금슬 좋은 학자 부부였던 것이다. 아, 나도 그들처럼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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