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朝線時代 夫婦사랑法

10 윤광연-강정일당

浮萍草 2015. 9. 4. 06:00
    "남자는 배워야 한다"며 삯바느질 해가며 남편을 공부시킨 아내
    진짜 멋있는 남편은? 짜 멋있는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외모가 준수하고 잘생긴 사람일까? 마음이 푸근하고 자상한 사람일까? 아니면 경제적으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까? 내가 보기에 진짜 멋있는 남편은 자신보다 뛰어난 아내를 만났을 때 그것을 빨리 인정하고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조선후기 강정일당의 남편 윤광연이었다. 그는 아내를 배려하고 존경하는 차원을 넘어 한평생 자신의 부인이자 스승으로 여기며 살았다. 강정일당(1772~1838)은 충북 제천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강희맹의 후손으로 원래는 매우 유명한 가문이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단명하여 벼슬하지 못한 탓에 겨우 양반의 신분만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16살 때 아버지를 여윈 뒤로는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어머니를 따라 삯바느질을 하고 베를 짜야만 했다.
    ▲  강정일당 사당.

    정일당은 20살 때 충주에 사는 14살의 윤광연과 결혼했다. 예로부터 금슬 좋은 부부 중에는 연상연하 커플이 많았는데,그녀 역시 남편보다 6살이나 연상이었던 것이다. 윤광연의 아버지는 선비 윤동엽이었고,어머니는 호가 지일당이었는데 시문으로 명성이 있었다. 그의 가문 또한 명문가의 후손이었으나,당대에 이르러 벼슬하지 못해 가세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그래서 정일당은 결혼한 후에도 친정에서 계속 머물다가, 3년 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짐을 꾸려 시댁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가난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 고향을 떠나 경기도 과천에서 남의 집을 빌려 살아야 했다. 또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정일당의 나이 43살에는 한양 남대문 밖 약현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정일당은 삯바느질을 계속하고, 윤광연은 서당을 열어 학동들을 가르치며 조금씩 재산을 모아갔다. ㆍ좋은 부인이자 멘토였던 아내
    정일당은 남편 윤광연의 부인이자 멘토, 즉 정신적 지주였다. 그의 학문이나 교유관계,서당일,일상생활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것의 조언자였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윤광연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충청도와 경상도를 분주히 오가며 장사를 했다. 그러자 정일당은 ‘배우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없다’면서,자신이 삯바느질과 베짜기로 집안의 생계를 담당할 테니 남편에겐 뜻을 지켜 학문을 닦으라고 권유했다. 또 윤광연의 학문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자 정일당은 ‘좋은 스승과 벗을 찾아 함께 배울 필요가 있다’면서 당시 노론의 대학자인 송치규의 문하에 들어가 배우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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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당을 운영하는 남편에게 수시로 쪽지편지를 넣어 조언하던 아내
    ▲  '풍속도병' 중 서당, 작가미상,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광연은 항상 부지런히 공부했으나 안타깝게도 벼슬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정일당은 그런 남편에게 벼슬을 단념하고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길 권했고 윤광연도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여 일찌감치 관직을 포기하고 재야 학자로 남아 학동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윤광연은 학동들을 가르치기에도 능력이 부족했는지 정일당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며 서당일에 많은 도움을 주곤 했다. 대표적으로 정일당이 윤광연에게 쪽지편지를 보내 학동들을 선발하는 기준이나 공부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 일러주는 장면을 살펴보자. 평민의 자제들 중에서도 뛰어난 아이들은 중국 고대의 하·은·주 시대에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서당에서 ‘노귀’란 아이는 자상하고 명민하며,‘이암’은 돈독하고 후덕하며, ‘유철’은 효성스럽고 신중하니 모두 가르칠 만합니다. 미천하다고 하여 소홀히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군자는 예가 아닌 것을 말하지 않는 법입니다. 괴이한 현상이나 현란한 귀신에 대해서는 공자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보건대 서당 아이들이 이해득실이나 괴담을 이야기하면서 부질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왜 엄하게 꾸짖어 바르게 공부하도록 하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정일당은 윤광연의 의식주를 비롯한 낮잠이나 언어, 술, 흡연 등 생활습관까지도 세밀하게 뒷바라지하고 깨우쳐주었다. 옛날 문중자의 의복은 검소하면서도 깨끗했습니다. 지금 당신의 의복은 검소하기는 하나 깨끗하지는 못합니다. 검소한 것은 당신의 덕이지만 더러워졌는데도 빨지 못하고 뜯어진 것을 제 때에 깁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입니다. 삼가 잿물로 씻고 바느질하여 주겠습니다. 낮잠은 기를 혼탁하게 하고 뜻을 해이하게 하며,말을 많이 하면 원망과 비망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술을 과음하게 되면 성품과 덕을 손상시키게 되고 흡연을 많이 하게 되면 정신을 손상하고 거만함을 기르게 됩니다. 모두 다 경계해야 할 것들입니다. 이처럼 정일당은 윤광연의 학문과 교유관계,서당일,일상생활 등 거의 모든 것들을 일러주었다.
    특히 그녀는 척독(尺牘), 즉 쪽지편지를 통해 수시로 남편에게 조언해주었다. 당시는 내외분별이 엄격한 시대요 집안에서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쪽지편지는 내외간의 은밀한 의사소통에 아주 좋은 수단이었다. 또 그것 때문에 부부 사이도 더욱 돈독해질 수 있었다. ㆍ아내의 문집을 간행한 이유?
    ▲  부인 정일당이 생전 남긴 작품들을 모은 문집 '정일당유고'
    정일당은 1832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를 잃고 난 후 윤광연은 지나칠 정도로 슬퍼했는데, 이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의 슬퍼함이 너무 심하도다. 이제 홀아비가 되어 살자니 신세가 처량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가난해서 빈소를 차리고 제사를 지내는데 예법대로 하지 못해서인가? 어찌 그리도 지나치게 슬퍼하는가?” 그 말에 윤광연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내가 어찌 그것 때문에 슬퍼하겠는가? 다만 나의 스승이 죽었으니, 앞으로 의심나는 것이 있어도 누가 그것을 풀어주겠는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도와주겠는가? 내게 잘못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바로잡아주겠는가? 내게 허물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훈계해주겠는가? 지극히 타당하고 바른 논의와 오묘한 뜻을 어디서 듣겠는가? 심신을 수양하고 품성을 닦는 방도를 어디서 배우겠는가? 내가 큰 과오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부모의 가르침 때문이고 스승과 벗으로부터 훈도를 받는 것도 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공은 역시 부인이었다. 이제 부인이 나를 두고 떠나 마치 닻을 잃은 배와 같고 길잡이 없는 장님과 같다. 멋대로 흔들리며 의지할 곳이 없고 이리저리 넘어지며 갈 곳이 없다. 이것이 내가 심하게 슬퍼하는 이유로다.” 또한 윤광연은 정일당이 남긴 작품들이 사라질까 두려워서『정일당유고』라는 문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와 함께 주변의 이름난 문사들을 찾아다니며 그것을 보여주고 서문이나 행장,묘지명,발문 등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럼 정일당의 문집이 더욱 빛날뿐더러 세상 사람들로부터 공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후기엔 여성들이 글을 지어 밖으로 내보내는 건 대단히 옳지 못한 일로 여겼다. 게다가 문집을 간행하면 집안 살림이 거덜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윤광연이 자신도 아닌 아내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그처럼 애쓴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만큼 평소 아내를 마음 속 깊이 사랑했을 뿐 아니라 존경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찌 보면 정일당과 윤광연은 부부라기보다는 차라리 모자 관계라 할 정도였다. 쪽지편지들에 나타난 정일당의 모습은 아내라기보다는 엄격한 어머니의 모습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광연은 그런 아내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며 별다른 싫은 기색 없이 잘 따랐으니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천생연분’이 아니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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