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영하 65도 야쿠티야 이야기

18 야쿠트인 축제 으스아흐와 민족 영웅서사시 올롱호

浮萍草 2015. 9. 8. 10:43
    쿠트 말을 하고 말고기를 좋아하고 마유주 쿠므스를 마시며 영웅서사시 올롱호에 감동할 수 있으면 다 같은 야쿠트 민족이다. 
    에벤키와 에벤인이든 자기가 어느 민족인지 말하지 않는 이상 구분되지도 않는다. 
    그들도 모두 야쿠트 말로 소통하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축제를 즐긴다. 
    에벤키와 에벤인들에게는 그들만의 축제가 있지만 그것도 야쿠트 문화의 일부로 간주한다.
    6월 22일부터 일주일간 지역마다 하지 축제가 열린다. 
    하지 축제를 “으스아흐”라 한다. 
    야쿠트어 발음으로는“으흐아흐”이다. 
    “으흐-”는‘무언가를 한다’는 의미의 동사이다. 
    비로소 추위가 가고 여름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부터 한 해를 준비하는 움직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소비에트 시절 이전에는 지역마다 너른 들판에 모여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고 멀리 떨어져 사는 이웃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 만남을 통해 젊은 총각 처녀들도 얼굴을 익히고 사랑을 맺을 수 있었다.
    ▲  아쿠트 전통무용 '으흐아흐'. /강덕수

    이런 모임이 소비에트 시절에는 금지되었다. 자치공화국이 된 1992년 이후 축제가 공식화되었다. 지금은 국가적 행사로 민족의 단결과 동질성 확보라는 차원에서 대규모 행사가 되었다. 가장 큰 으스아흐는 야쿠츠크 시에서 30여 km 떨어진‘위스 하틍’이라는 벌판에서 열린다. 인근 100km 정도의 지역에서는 모두 모인다. 매년 20만이 되었다거나 30만이 넘었다거나 하면서 많이 모이는 걸 자랑한다. 몇 년 전에는 최대 규모의 합창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자랑한 일도 있다. 이 축제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옷장에 넣어두었던 전통의상들을 입고 나온다. 이곳에 사는 고려인들도 한복을 입고 나와 한국을 알린다. 또 외국 사절들이나 민속 음악 그룹들을 초대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는 한국의 판소리 성악가와 민속무용단이 초대되기도 했다.
    ▲  축제장 고려인 캠프에 날리는 태극기. /강덕수

    이 축제의 기본 주제는 민족정신의 고취와 전통의 계승이다. 이를 통해 야쿠트 문화의 확인이다. 야쿠트 문화에 대한 연구는 18세기 정치적 이유로 이곳에서 유형 생활을 한 러시아,우크라이나,폴란드 지식인들이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이들은 많은 고아를 거두어 자기 성을 주면서 가족을 만들었다. 크세노폰토프, 가비세프, 말리세프 같은 성들은 러시아 성에서 차용된 것들이다. 이러한 지식인들의 영향을 받으며 야쿠트인 지식인들이 19세기 야쿠트 민족주의를 이끌었다. 이들은 암모소프, 오윤스키, 시프체프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민족 설화를 바탕으로 영웅서사시를 만들었다. 이 영웅 서사시를“올롱호”라고 한다. 이 올롱호를 영어, 프러랑스어,한국어 등 여러 외국어로 번역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2012년 유네스크에 인류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 올롱호는 약 6000행에 이르는 장대한 서사시로 우리의 판소리와 유사하다. 이것을 완창하려면 적어도 사흘 밤낮을 계속해야 한다. 축제는 올롱호를 각색하여 무용,창,연극으로 표현되는 집단 창작극으로 진행된다. 이 창작극에는 보통 천 명 이상의 인원이 동원된다. 기사와 함께 말도 등장한다. 민족 지도자로서 제사장은 민족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말하며 미래를 예시한다. 이 과정이 지나면 마지막은 모든 참여자의 무대가 된다. 광장에서는 둥근 원을 만들며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원무가 시작된다. “오수오하이”라는 춤이다. 우리의 강강술래와 닮은 꼴이다. “오스”는 야쿠트말로 노래한다라는 뜻이다.
    ▲  한국의 강강술래와 비슷한 '오수오하이'. /강덕수

    축제 장소에서 낯익은 노래를 들었다. 상당히 러시아적이었다. 그런데 여기선 모두 그것을 자기네 전통음악이며 전통무용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에 해박한 발레리라는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그가 재미있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1900년에 태어난 사람이 있었다. 세르게이라고 했다. 발레리의 할머니의 오빠였다. 그가 1947년 청년 축제에 초대받아 모스크바에 갔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발레를 보았다. 충격이었다. 야쿠트에도 그런 음악과 무용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 그는 모스크바에서 민속음악을 공부했다. 모스크바의 유명한 알렉산드로바 무용단에도 들어갔다. 세상을 알기 위해 아무르 지역,몽골,중국,예니세이 강을 따라 크라스노야르스크 같은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음악을 공부했다. 마침내 야쿠츠크로 돌아와 작곡과 안무에 몰두하였다. 민속무용단을 만들어 자기가 만든 음악과 무용을 선보였다. 야쿠트 사람들에게 아주 색다른 것이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차츰 자기네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아무도 이 무용과 음악이 자기네 전통음악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인구는 40만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은 으스아흐와 오수오하이,올롱호를 통해 나머지 60만을 야쿠트인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생활도 일찌감치 유목민의 습관을 버리고 정착민으로 바꾸었다. 누구의 것이든 가져다 자기 것으로 만드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시베리아에 새로운 문화를 일구고 있다. 여기에 외국인들을 끊임없이 초대하면서 국제 사회와의 소통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Premium Chosun        강덕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교수 kangds@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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