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영하 65도 야쿠티야 이야기

16 한인이 시베리아에 정착하게 된 배경은 금 때문?

浮萍草 2015. 8. 3. 00:00
    ▲  야쿠츠크 고려인

    시아에 사는 한국인을‘고려인’이라고 부른다. 사하공화국에 사는 고려인은 2000명 정도다. 숫자는 얼마 되지 않지만 고려인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다. 대부분 학교,병원,정부 기관 등에서 주요 직책에 있거나 성공적인 기업가로 활동하고 있다. 사하 사람들은 고려인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보인다.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들’로 통하는 고려인은 야쿠티야의 주요 민족으로 대접을 받고 있다. 사하의 고려인은 3부류로 나누인다. 첫 번째가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되었다가 소련 해체 뒤 이곳으로 다시 이주해 온 사람들. 두 번째가 사할린에 살던 고려인 후손들이 이곳으로 이주한 경우.세 번째가 1920년대부터 금이 난다는 소문을 듣고 남부 야쿠티야에 정착한 사람들.사하에 가장 먼저 온 사람들이다.
    ▲  동토연구소 부소장 이료바씨

    이들은 20년대에 담배와 야채를 재배하며 시베리아의 극한 기후에 잘 적응했다. 고려인 협회를 만들고 일요 한글학교도 열었다. 그러나 30년대 후반 정치적 박해를 피할 순 없었다. 약 2000명이 체포되었다. 800 명 정도가 수용소로 보내지고, 나머지는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었다. 이러한 고난을 이겨낸 야쿠티야 고려인은 사하 공화국을 구성하는 민족의 하나로 당당히 인정받고 있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이 료바씨 가족은 해체되지 않고 사하 공화국의 주류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이 료바씨 아버지는 1922년 블라디보스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1928년 블라고베센스크에서 태어났다. 두 가족은 일본 강점기에 러시아로 이주하였다. 금을 캔다는 소문을 따라 알단이란 곳까지 왔다. 이곳은 연해주에서 1000km 이상 떨어진 곳이다. 이곳에서 료바씨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났다. 이 두 사람은 가난 속에서도 공부하였다. 아버지는 수학과 물리 교사가 되었다. 나중엔 시골 학교 교장이 되었다. 어머니도 교사가 되었다. 야쿠티야의 명예교사로도 선정되었다. 이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녀의 교육이 걱정되었다. 야쿠티야 중심인 야쿠츠크로 이주를 하였다. 야쿠츠크에 와서 아버지는 동토연구소 수리 분야 연구원이 되었다. 큰아들 슬라바씨(68)는 리가의 기술대학을 졸업하고 동토연구소에서 근무하였다. 러시아 학술원 시베리아 분원의 공훈 연구원이라는 영예를 받았다. 전산실 실장으로 퇴직한 뒤 인쇄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부 인은 국립의료센터의 혈액내과 과장이다. 큰딸은 이스라엘에서 살고 있고 작은딸은 치과의사로 미국에서 살고 있다. 아들은 야쿠츠크에서 아버지와 사업을 같이하고 있다. 며느리는 동토연구소 소장 비서로 일하고 있다.
    ▲  암가부군수 고려인.

    작은아들 료바씨(67)도 동토연구소 부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지리물리학자로서 극한 지방에서의 식물 성장에 관한 특허도 갖고 있다. 부인은 소아과 전문의로서 보건학 권위자이다. 료바씨도 3자녀가 있다. 큰아들은 물리학 전공자로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건강보건 사업을 하고 있다. 부인은 심리학 연구소 소장이다. 딸은 언론인으로서 야쿠티야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다. 막내아들은 노보시비르스크 대학교를 졸업하고 태국에서 살고 있다. 막내딸 나탈리야(56)는 생물학 박사로서 생물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남편은 북동연방대학교 생물학 교수이다. 아들은 영국 유학 후 돌아와 사하 공화국 외교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야쿠티야에 정착한 1세대로서 안 안나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부모는 함경북도 길주 출신이었다. 부모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와 살다가 1925년 안 안나 할머니를 낳았다. 1929년 아버지가 먼저 알단으로 와서 자리잡고 1932년 식구들을 데리고 왔다. 이곳엔 한국인이 100~200명 모여 살았다. 안나 할머니는 1951년 26세에 동갑내기 밀양 박씨와 결혼을 하였다. 할머니의 4남매 형제들은 모두 한국인과 결혼을 하여 한국 문화를 지켰다. 사금 채취하느라 공부를 못한 할머니는 결혼 후 경리 공부를 하여 농림부에 취직하였다. 농림부에서 22년,기상청에서 17년,그리고 작은 공장에서 은퇴할 때까지 60년을 일하였다. 덕분에 훈장도 12개를 받고, 연금도 많이 받아 생활에 여유가 있었다.
    ▲  박정남 이르쿠츠크 총영사(앞줄 가운데)와 고려인들(총영사 옆 여성 세 명과 뒷줄 가운데 남자 두 명).
    영화 기술자였던 남편은 2005년 사망하였다. 딸은 유대인과 결혼하여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 두 아들은 러시아 여자와 결혼하여 야쿠츠크에 살고 있다. 설날과 제삿날 가족이 모여 부모 사진을 놓고 제사를 지낸다. 안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아 텔레비전 방송에 초대되어 한국 음식 만들기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안 할머니는 1995년 처음 손자를 따라 서울 구경을 하였다. 2012년 안 할머니를 만난 기억이 새롭다. 다시 만나고자 수소문하니 바로 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사하공화국 국립미술관에 가면 야쿠티야의 1세대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 화가 “김 알렉산드르”가 있다. 야쿠티야에 회화를 발전시킨 공훈 화가 중 한 사람이다. 야쿠츠크 발레극장의 최고 발레리노는 홍 레나타이다. 최근엔 엄 씨라는 고려인,안 씨라는 고려인이 이 지역의 야채 공급을 책임지고 있다. 사하 공화국에서 고려인은 인구 수에 비해 아주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교육,연구,농업,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기여를 했다고들 한다.
    가족 관계에서 부모 공경의 예는 한국인의 장점으로 간주한다. 비록 언어는 잃었지만,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자긍심과 정체성도 기억하고 있다. 한국학교를 세워달라는 청원에 앞장서 1994년에는 사하-한국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제 4-5세대로 넘어가면서 러시아 그리고 야쿠티야를 조국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순리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한국이 잘 되기를 바라고 또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몸속에 흐르는 피 때문일 것이다.
    Premium Chosun        강덕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교수 kangds@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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