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영하 65도 야쿠티야 이야기

14 야쿠티야(시베리아) 상권 장악하는 중국인 알고보니 한국계?

浮萍草 2015. 7. 17. 09:51
    하공화국의 주요 원주민은 야쿠트, 에벤키, 에벤이다. 
    이 중에서도 야쿠트인이 다수다. 
    ‘사하’라는 말도 야쿠트인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렇다고 이 땅을 야쿠트인만의 나라라고 할 수 없다. 
    단일 민족으로선 야쿠트인과 러시아인이 엇비슷하다. 
    주요 기관의 장은 대부분 야쿠트인이다.
    사하공화국에서 매우 젊고 영리한 러시아인을 사귀게 되었다. 
    젊은 나이에 비해 상당히 고위직이었다. 
    판단이 빠르고 논리가 명쾌하였다. 
    속 얘기를 터놓을 수 있는 사이까지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직을 하고 호주로 떠났다. 
    더 이상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전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방이라는 큰 차원에서는 모스크바 영향력이 크지만 지방이라는 작은 차원에서는 민족이라는 변수가 중요하다.
    러시아에는 150개 이상의 민족이 살고 있다. 
    사하공화국에는 120개 이상의 민족이 있다. 
    야쿠트, 에벤키, 에벤, 그리고 존재감을 잃어가는 유카기르, 축치를 제외하면 모두 외국인으로 간주한다. 
    이 땅에 외국인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였다. 
    최초 외국인은 모피를 얻기 위해 들어온 카자크 부대였다. 
    그들은 총 한 방으로 야쿠트인을 제압하였다. 
    그리곤 무슨 권리가 있듯 밍크를 비롯한 모피를 세금처럼 요구하였다. 
    이것이 러시아인과 야쿠트인이 조우하는 첫 단계였다.
    ▲  “중국시장”이라 불리는 야쿠츠크의 제일 큰 시장 ‘스톨리치니’.

    하지만 야쿠트 사회를 개화시키는데 러시아인의 역할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제정(帝政) 러시아 시절 정치범들의 최종 유형지가 바로 야쿠티야였다. 이곳에서 정치범들은 러시아어를 비롯한 교양을 가르쳤다. 러시아 어디를 가나 모스크바와 같은 표준 발음을 들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야쿠츠크에서 200km 정도 떨어진 빌류이스크라는 도시에는“체르니셉스키 사범학교”가 있다. 철학자이며 문학자인 체르니셉스키가 이곳에서 유형 생활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친 걸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학교에 붙인 것이다. 1920~1930년대에는 금광 발견으로, 1950~1960년대에는 다이아몬드 발견으로 많은 러시아인이 유입되었다. 1989년에는 총 인구의 50.3%로 정점을 찍었다. 현재는 러시아인이 40% 정도를 차지한다.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광산이나 건설 기술자로서 또는 교사나 의사로 학자로 활동하였다. 러시아 정교회는 야쿠트인들의 이교도적 신앙과 관습을 수용하면서 야쿠트인의 러시아화를 지원하였다. 음식을 먼저 불에 갖다 놓는다든지, 멀리 길을 떠날 때 마유주 크무스를 마신다든지 하는 것을 러시아 정교회가 수용하였다. 러시아인 외에 외국인으로 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폴란드인,독일인,타타르인,바시키르인,유대인,그루지야인,아르메니아인,아제르바이잔,핀란드인,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한국인,부랴트인,카자흐인, 키르기스인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우크라이나인과 폴란드인의 유입 역사가 비교적 길다. 이들은 17세기부터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은 정치적 사건들과 연루되어 유형 당한 정치범들이었다. 1930~1950년대 1만2000명 이상의 우크라이나 부농 출신들이 이곳에 보내졌다. 이들은 대부분 서부 우크라이나의 반체제인사들이었다.
    Premium Chosun        강덕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교수 kangds@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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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쿠티야(시베리아) 중국 땅 되나?
    란드는 100여 년 동안 제정러시아 지배를 받았다. 
    폴란드에서는 러시아 지배에 저항하는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폴란드에서 정치범들이 이곳으로 보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야쿠티야의 근대화에 기여한 공적은 엄청나다. 
    야쿠트인의 풍습, 언어 등이 바로 이들에 의해 연구되고 정리되었다. 
    이들이 편찬한 야쿠트어 사전이나 민족학 연구서들은 지금도 고전이다.
    특이한 것 중 하나가 유대인 사회이다. 
    1727년 유대인 안톤 마누일로비치 데비에르 백작이 처음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다. 
    그 뒤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유대인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들은 소규모 무역, 가내공업, 농업에 종사하거나 의사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하여 유대교회당, 학교, 유대인 묘지 등을 건설하고, 야쿠츠크 시의 박물관, 도서관, 양로원 건설 등에도 많은 기부금을 내었다. 
    이들은 공산당원으로서도 활발하였다. 
    2월 혁명 후에는 제정 러시아 시대에 내려졌던 유대인에 대한 모든 제한을 철폐하게 하였다. 
    지금은 대부분 이스라엘에 이민을 가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
    최근 20년간 유입된 외국인은 두 부류이다. 
    하나는 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같은 카프카스지역 출신들이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인이다. 카프카스인들은 야채, 과일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전국적인 카르텔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식당업에 많이 종사하고 있다.
    ▲  한드가 시의 이슬람 사원
    하지만 이들의 유입 속도나 규모는 중국인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중국인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야쿠츠크 시에서 가장 큰 생필품 시장을 이들이 지배하고 있다. 이 시장은 ‘수도 시장’이라는 뜻으로 공식 명칭이 ‘스톨리치니’이지만 사람들은 ‘중국시장’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장사하는 중국인의 75%가 한국계 중국인, 즉 ‘조선인’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활용하는 마케팅을 하고 있다. ‘ 코리아 사우나’, ‘서울 식당’, ‘코리아 하우스’ 같은 곳의 주인이 모두 중국계 한국인이다. 이들이 한국 브랜드를 이용하는 것은 이곳에서 한국 브랜드 가치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한국 제품에 대한 신뢰도를 1이라 한다면 이곳에서의 신뢰도는 2라 할 수 있다. 정부 관계자나 일반인들은 한국 사람이 와서 어떤 비즈니스든 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얘기를 하면 한국에서는 아직도 20~30년 전 묵은 기억을 들추어내며 손사래부터 친다.
    러시아가 얼마나 바뀌고 있는지, 야쿠티야가 얼마나 친한적(親韓的)인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제 중국인의 유입은 최근 5년 사이 새로운 유형으로 바뀌고 있다. 주로 헤이룽장성을 기반으로 하는 중국과 홍콩 자본의 투자가 파도처럼 밀려들어 오고 있다. 2022년까지 레나강에 교량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하였다. 8600억 원에 달하는 공사이다. 철도, 도로, 관광, 유전 개발, 아파트 건설을 비롯한 도시 개발 분야에 중국은 전략적으로 들어오고 있다. 어느 학교 교장 선생님이 우려 섞인 한 마디를 던진다. “여기가 중국 땅이 될 것 같아요!”
    Premium Chosun        강덕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교수 kangds@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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