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영하 65도 야쿠티야 이야기

12 시베리아 사람들은 왜 한국에 열광하는가?

浮萍草 2015. 6. 22. 11:24
    야쿠츠크 시 중심가의 한국 병원 광고
    하 공화국 수도 야쿠츠크 시에는 사하-한국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해외에 세워진 여느 한국학교와는 의미가 아주 다르다. 이 학교는 러시아의 정규 학교이다. 학교 설립을 현지 정부가 주도한 만큼 운영을 위한 예산도 모두 현지 정부가 책임을 지고 있다. 학생들도 현지인들이다. 현지 외국인을 위한 한국 학교로서는 아마 세계에 유일한 학교가 아닐까? 1992년 사하공화국이 러시아 연방 내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이곳에 살던 고려인들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고려인 협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한국말을 배우게 하고 싶었다. 시 정부에 청원하였다. 다른 소수민족처럼 자기 말을 공부할 기회를 달라고. 학교 설립을 요청하였다. 시 정부는 고려인들의 청원에 근거가 있다고 받아들였다. 당시 사하공화국은 국가의 근대화가 시급하였다.
    사하-한국학교에 그런 역할을 기대하였다. 오랫동안 시베리아는 러시아의 변방이었다. 모든 것이 낙후되어 있었다. 영국 여행가 안나 레이드는 1992년 야쿠티야를 다녀갔다. 그리고 한숨밖에 안 나온다고 썼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을 취재했던 외신 기자는 한국을 가리켜“장미가 필 수 없는 쓰레기 더미”라고 말했다. 여기에 비하면 안나 레이드는 사하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19세기 야쿠티야를 관할하던 이르쿠츠크 총독의 말도 인용하였다. “야쿠트 인을 발가벗겨 돼지우리 안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겠소? 얼어 죽을까? 아니오. 1년 뒤엔 그 돼지우리가 큰 저택으로 변해 있을 거요!” 총독이 당시 그를 찾아간 영국의 탐험가에게 했다는 말이다. 총독의 에피소드는 야쿠트 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한 마디로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에는 150여 민족이 살고 있다. 야쿠트 인은 이들 민족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야쿠트인은 40만명밖에 안 된다. 그러나 한반도의 15배가 되는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 이 영토 안에는 모든 희귀금속이 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언어와 문화를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타타르, 바시키르, 하카스, 네네츠, 코미, 알타이 같은 민족들은 인구 수에서 야쿠트인보다 적지 않다. 그러나 언어나 문화 정체성에서는 취약하다. 얼마 전 바쉬키르 국립대학교 교수를 야쿠츠크에서 만났다. 그가 야쿠츠크에서 가장 부러워한 것이 바로 언어 문제였다. 사하공화국에서 야쿠트 어는 공용어로서 문화어로서 러시아어와 대등한 대접을 받고 있다. 지방으로 가면 러시아어를 몰라도 불편하지 않다. 이것은 지난 20년 사하 공화국이 이룩한 발전 중의 하나이다. 1995년 4월 사하 정부의 초청으로 처음 야쿠츠크를 방문하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몸은 얼어 있었다. 하바롭스크에서 갈아탄 비행기는 난방되어 있지 않았다. 4시간 뒤 착륙이 가까워지자 따뜻한 훈기가 돌았다. 몸을 녹이기에는 너무 늦었다. 모든 승객이 두꺼운 코트에 털모자, 부츠를 신고 있었다.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승무원에게 말을 붙일 분위기도 아니었다. 안전하게 도착한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Premium Chosun        강덕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교수 kangds@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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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 다녀간 아이들이 '한국병'에 걸린 이유는?
    사하-한국학교 전경
    리엔 높은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낡은 목조의 2층 집들이 금방 쓰러질 듯 서로 기대고 있었다. 호텔에 와서야 근사한 건물을 볼 수 있었다. 5층의 현대식 건물. 바로 한 해 전에 오스트리아 회사가 세웠다. 안나 레이드가 다녀간 지 3년 만에 처음 생긴 변화였다. 근처에 3-4층짜리 낡은 시멘트 건물이 몇 개 더 있었다. 정부 청사들이었다. 사하-한국학교는 2층 건물에 있었다. 비좁았다. 거기서 2부제 수업을 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1학년부터 11학년까지 250명이었다. 선생님은 25명. 한국 외대 노어과 학생 4명이 한국어와 문화를 가르쳤다. 아직 러시아에 언어 연수를 오기 어렵던 때였다.
    학생들은 러시아어를 연수하기 위해 자원해서 온 것이었다. 물론 항공료와 기숙사는 시정부에서 제공하였다. 월급도 주었다. 쥐꼬리만 하기는 했어도 현지 교사들보다 대우가 나았다. 시 교육청에서는 한국으로 학생 연수를 요구하였다. 학부모 약속 사항이라고. 사실 나보다 먼저 야쿠츠크를 방문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많은 것을 약속했다. 그 사람은 사하 정부로부터 정말 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 선물로 서울의 한 사립대학교에 야쿠티야 박물관을 만들었다. 그때는 러시아가 아직 어수선한 때라 문화재급 골동품들이 많이 반출되었다. 학생 연수? 누가 했건 그건 한국 사람이 한 약속이었다.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95년부터 매년 여름 사하-한국학교 학생 15명이 한국에 오게 되었다. 사하-한국학교 전경.한국에 다녀간 아이들은 한동안 병을 앓았다. “문화적 충격”.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이런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95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아이들은 김포공항에서 울며불며 가기 싫다고 했다. 한국을 ‘파라다이스’라고 했다. 이제 그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었다. 국내의 유수한 대학교의 교수가 된 아이도 있다. 사하 정부에서 한국통으로 활약하는 아이도 있다. 사하-한국학교는 사하 공화국의 명문이 되었다. 사하-한국학교와 똑같이 출범한 학교들이 있었다. 사하-독일학교, 사하-프랑스학교, 사하-벨기에학교, 사하-터키학교. 이들 학교는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문을 닫았다. 사하-한국학교는 작년 11월 20주년을 아주 성대하게 치렀다. 지난 20년 많은 사람이 조용하게 도움을 주었다. 이미 10주년이 되던 2004년엔 스타렉스를 스쿨버스로 보냈다. 야쿠츠크 시에서 최초의 현대 자동차였다. 2012년엔 2대의 스타렉스가 또 갔다. 지금은 시내에서 스타렉스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르쿠츠크 총영사관을 이곳으로 옮기면 어떠냐고 농담을 할 정도이다. 사하-한국학교가 20년을 존속하고 명문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세기 이르쿠츠크 총독이 말한 것처럼 야쿠트인의 특성 때문이랄 수 있다. 야쿠트 인은 부지런하다. 그리고 배우고자 하는 의지도 크다. 그들은 한국을 배우고 싶었다. 사하-한국학교는 그 열망을 채울 수 있는 통로였다. 그들은 한국 사람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 따라 하고 싶었다. 1995년부터 여름방학마다 대학생 봉사단이 갔다. 태권도를 보여주고, 노래와 무용을 가르쳤다. 아마 한국인 사범 없이 태권도가 보급된 유일한 지역일 것이다. 야쿠츠크엔 비보이 아카데미가 있다. 스스로 홍대 부근에 와서 배워갔다. 작년부터 “야쿠티야” 항공이 인천에서 야쿠츠크 사이 직항을 운항한다. 4시간 반 거리이다. 20년 전엔 하바롭스크에서 하룻밤 자고 비행기를 타도 하바롭스크에서 야쿠츠크까지 4시간 걸렸다. 20년 사이 야쿠츠크는 북동 아시아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최근엔 한국 의료재단이 북동연방대학교와 합작으로 이곳에 병원을 세우기로 했다고 대서특필되었다. 여기선 중병에 걸린 사람도 한국만 오면 나을 수 있다고 믿는다. 전직 차관 한 사람이 농담을 하였다. “10년 뒤엔 우리도 한국 같을 겁니다.” 그냥 웃었다. 남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Premium Chosun        강덕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교수 kangds@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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