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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기로에 선 한민족과 인류문명

浮萍草 2015. 4. 25. 10:39
    일본제국주의 강도들에게 대한국을 떠맡겼던 제국주의 미국의 행정부에'독립청원서'를 들고 다니며,일본대신 미국이 대한국을 통치해 줄 것을 호소하다가 상해임시정부에서 신 채호 등에 의해 규탄당했던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귀국함으로써 한국의 정치일정에는 불길한 제 2막이 시작되었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이승만 개인은 일찌기 청운의 뜻을 가지고 독립협회에서 일했던 지사였고 그 나름대로는 대한국을 위한다는 명분 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친일파들과 같은 더러운 물욕도 '별로' 없었다. 문제는 그의 집요한 명예심에 있었다. 그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밑에서 일할 수 없는 권위주의적 절대권력을 지향하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북한지방에 있어서의 권력장악을 기도한 김일성과도 큰 차이가 없었다. 두 명의 권력지상주의자들이 남·북에 각각 자리잡게 됨으로써 동족상잔의 포석은 시작되었다.
    문명서천설은 문명의 중심이 서쪽으로 이동한다는 설이다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13. 기로에 선 한민족과 인류문명 1. 암흑 속의 새나라 구들에 의하여 강제로 끊겼던 대한국 황실의 명맥을 8.15 이후에 다시 찾아 이어 나가는 작업이 유구한 역사를 바로 세워 나가는 정통성을 위하여 필요했지만, 아무도 대한국 황실을 생각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소위 새 나라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모두가 미국과 프랑스등을 본 딴 공화국 건설을 부르짖는 들뜬 분위기였다. 임시정부에도 '구황실을 우대한다'는 강령은 있었으나 결국은 스스로 황실을 포기하고 '민국'을 택하여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바꾸었었다. 그러나 황국이 민국으로 변한다고 하여 갑자기 민중의 삶에 질적인 풍요나 발전이 오는 게 아니라는 것은 그 후의 역사가 실증했다. 어떤 형태이든 간에 한 국가에 있어서 중심이 될 수 있는 '정통성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보편적인 세계사적 경험으로 볼 때, 그와 같은 정통성에 대한 무시는 '정통성이 의심스러운' 각 이익집단들에 의한 커다란 정치적 격변이 벌어질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승만의 귀국에 의하여 남한의 정세는 급변해 갔다. 곧 이어 김 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도 정부 자격이 아닌'개인'자격으로 미국의 군용기를 타고 귀환했다. 그러나 만리 이역에서 외로이 국권회복을 위해 싸웠던 이들의 가는 길은 귀국 후에 방향을 달리 하기 시작했다. 김 구의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후신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많은 한국인들에게 지지를 얻게 되었으나 국내에 별다른 지지자들이 없던 이승만은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권력지상주의 병을 고칠 생각은 없었다. 또한 한독당에 의하여 매국노친일파로 지목된 자들도 자기들에게 닥쳐 올 민족의 심판을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미군정청을 최대의 방어무기로 사용하고 있던 친일매국노들은 이번에는 열렬한 친미파가 되어 스스로를 보존해 가고 있었으나 언젠가 미군정이 끝나게 된 후에는 자신들도 끝장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눈치빠른 매국노들은 이승만의 가치를 곧 깨닫게 되었고 이승만도 저들의 이용가치를 충분히 고려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최대의 경쟁자인 김 구와 여 운형에 대항해서 이겨야만 자신의 야심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초조해진 이승만은 '매국노 친일파'가 무엇하던 작자들인지 생각하기를 포기했고 매국노들은 열심히 이승만을 부추겨 올렸다. 권력장악에 집착한 이승만과는 달리 여 운형과 김 구에게 있어서 주요관심사는 한민족이 타민족에게 침략당할 위험없이 안심하고 잘 사는 문명한 사회를 건설하는 문제였으 권력장악은 그 다음의 문제였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악질적인 친일파 청산이 새나라 건설을 위한 민족정기 수립에 매우 중요한 기초작업이었으므로 친일매국노들은 그들을 매우 두려워했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수천년의 문명된 역사를 모두 '봉건주의 시대'라는 마르크스식 타령으로 매도해 버리고 열심히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노동자·농민의 나라'를 부르짖었다. 노동자·농민의 나라라는 이상 자체는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국가적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사회의 기본 방향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허와 실을 따지려 하지 않고 오로지 순수 공산주의적 이상사회만을 하루 아침에 이루려는 과욕에 빠져 있었다. 바로 그 시기에 쏘비에트의 지배자 스탈린이 베리아를 두목으로 하는 비밀경찰 조직을 쏘련지방 전역에 침투시켜, 인민들이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폭압과 공포정치가 쏘련지방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새로운 붉은 귀족의 독재가 실시되고 있었던 사실은 외면한 채 이상에만 들떠 있었던 것 이다. 물론 순수한 동기 자체는 탓할 수 없으나 그 순수한 동기만큼 그들 사이에도 순수한 혁명적 열정만이 있었던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암투는 매국노들의 작태에 결코 못지 않았음으로 해서, 그야말로 순수한 민중혁명의 열정에 일생을 바친 순진한 혁명가들의 숱한 희생과 좌절을 예고하고 있었다. 건준의 활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친일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한국 민주당(약칭'한민당')을 만들었다. 한민당이 결성되자 '민족'을 앞세우기에는 너무나 뒤가 구린 온갖 친일경력자들이 몰려들었으므로 그들의 세력은 곧 막강하게 불어났다. 힘을 얻은 매국도당 친목회 '한민당'은 북한에서 피난해 온 월남자들 중에서 역시 비슷한 무리들을 가려내어 세력을 확충했으며,대부분 지주나 부농출신이었던 그들은 어렵지 않게 한민당처럼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특히 월남한 일부의 청년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은 자신들이 공산당 정권의 토지개혁에 의하여 전 재산을 빼앗긴 한을 풀기라도 하듯이 폭력조직을 만들어 반공 투쟁에 앞장섰다. 그들은 이승만의 폭력 전위대로써 흡사 나치스의 돌격대처럼 설치고 다녔다. 어떤 반공집회와 반공폭력 현장에도 그들이 나서게 되지만 특히 4281년(서1948)의 제주도 민중항쟁때 제주도에서 '진압작전'을 도왔던 그들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가히 야수적인 것이었다. 좌·우 대립이 모든 폭력적 방법을 총동원하여 격렬해지자 이제는 이데올로기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그 사람이 어떤 인격을 가진 인물인가는 전혀 문제가 안되었다. 그 사람이 어떤 경력의 소유자인가도 거의 판단기준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사람이 무슨 '주의자'인가 하는 것만이 단 하나의 가치판단 기준이었다. 때아닌 43세기말(서20세기)에 이르러 유럽지방의 중세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종교재판 아닌 이데올로기 재판이 남한사회를 휩쓸어 갔다. 남한에 이데올로기 재판의 선풍이 불고 있었다고 해서 북한은 아무 일 없는 지상천국이었는가 하면 그렇지만은 않았다. 쏘비에트 해방군의 북조선 '해방'초기에 숱한 약탈과 부녀자 윤간 등이 '해방군'에 의하여 저질러진 후 다소 질서가 잡혀가면서 쏘련군의 만행이 줄어들자 북한민중은 약간의 안도의 한숨을 내 쉬게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쏘련은 자신들의 사회주의조국 건설 과정에서 스스로를 천사들로 생각할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수백만 명 이상의 희생 위에 세워진 스탈린왕국은 북한이 스탈린왕국의 연장선상에 존재해 주기를 원했다. 반제국주의라는 표리부동한 간판을 내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쏘비에트 정권은 재빨리 미국식의 신식민지주의적 발상을 받아 들여, 북한을 쏘련의 위성국화하기로 했다. 김일성은 그러한 쏘련의 요구에 부합되는 조건을 갖춘 몇 안되는 한인중의 하나였다. 쏘련 당국자들은 10년 가량 백두산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을 수행했던 경력으로 북반부 대한국민중에게 이름이 낯설지 않은 젊은 쏘련군장교 김일성이 적격자로 보였다. 김일성 장군'에 대한 신화는 널리 퍼져 있었으나 어느 한가지도 정확한 김일성의 모습을 그린 것은 없었다. 숱한 항일 빨치산투쟁가들 중에서 누가 김일성인지 알아 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북한 인민들 앞에 쏘련군과 함께 나타난 김일성은 소문과 달리 삼십대 중반의 한 미남청년이었다. 그러한 그의 출현은 한민족의 현대사가 그를 중심으로 하여 몇가지 중요한 격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서기1940년도의 만주 항일운동 대탄압에 의하여 수년간이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던 항일 빨치산 김일성을 지도자로 부상시키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일단 칼자루를 쥔 '해방군'이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데에는 큰 결단이 필요하지 않았다. 건준을 토대로 성립된 인민공화국의 활동이 남한에서 군정청의 방해로 지리멸렬해져 가다가 공산주의자들의 주도에 의해 무장투쟁노선으로 탈바꿈해 간 데 비하여, 북한에서는 처음부터 일찌감치 인민위원회 조직을 활용하여 공산당 지배구조로 바꿔 갔으므로, 여 운형의 중도적 노선에는 얼마 안 가서 차질이 빚어졌다. 과격한 극좌적 변혁을 시도하여 한시 바삐 '평등사회'를 만들겠다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과잉포부에 의하여, 친일행각의 유무에도 거의 상관없이 해방 다음해부터 북한에서는 대·중·소 지주들의 모든 토지가 무상 몰수되고 소작인들에게는 무상 배분되었다. 그러한 성급한 조치는 김일성과 스탈린의 구미에는 잘 맞았을지 모르나 그에 대한 반발도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과정상의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친일매국노'와 왜구들에 대해서는 더욱 철저한 숙청을 단행하고 재산도 몰수해 버렸기 때문에, 수십년간 억압 속에서만 시달리던 노동자·농민들에게는 어쨌든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신의주에서는 박쥐같은 친일파들이 재빨리 공산당으로 변신하여 여전히 민중 위에 군림하며, 자신의 옛 행각을 폭로한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반동'으로 조작 하고 탄압했기 때문에, 신의주 학생들과 시민들은"공산당이 왜놈의 주구였던 자를 다시 시당위원으로 뽑았으니 똑같은 협잡꾼들이다." 하고 반발하여 대대적 시위를 벌였다. 이 때 시당간부를 믿었던 당중앙에서 문제된 당위원을 숙청하는 등 웃지 못할 시행착오들이 발생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대체로'친일파''왜놈'들에 대한 처리만은 적절히 시행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그 점에서는 다소 민중의 인기를 얻을 수도 있었다. 한민족의 운명을 좌우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미·쏘간의 냉전돌입이었고,국내적으로는 남·북한 공히 내세울만한 역사적 정통성도 없이 외세와 결탁한 정치적 집단 들이 오로지 자기 세력을 중심으로 지배욕을 달성하려는 치졸한 권력쟁탈이었다. 그 결과는 유구한 문명국의 이름에 부끄러운 동족상잔과 국토분단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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