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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통한의 동족 상잔

浮萍草 2015. 5. 1. 11:05
    지나지방에서의 공산군 세력이 심상치 않은 위세로 국민당군대를 남쪽으로 밀어붙이자,미국 정책담당자들에게는 한국을 방어하는 게 매우 중요한 현안으로 떠 올랐다. 엘베강에서 서로 포옹했던 연합국 전우였던 미국과 쏘련이 각자 '미 제국주의자'와 '공산주의 쏘련'으로 호칭이 바뀐 만큼이나 비례해서, 남한에서의 좌·우 대립도 하루가 다르게 격렬해져 갔다. 박헌영 등 남로당의 공산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주로 왜족들과 친일파매국노들에 의하여 대부분 점유되다시피 했던 농토와 국부(國富)에 대한 분배 대책으로 '토지개혁'과 '적산불하'의 공정성을 기하도록 주장하였고 많은 노동자·농민들과 급진 혁신적 지식인 들이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인민공화국이 실제적 한국인 자치조직임을 아예 처음부터 무시한 미군정청은 인공의 해산을 요구하였고 실제로 곧 인공의 조직을 무시해 버리고 미군정을 전국에 실시했다. 이름만 남은 인민공화국은 그에 반발하여'미제(美帝)와 그 주구들'에 대한 투쟁을 선언했으므로 곧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노동자들의 파업과 농민들의 공출항의 데모 등이 직·간접적으로 인민공화국과 남로당의 조직을 통하여 선동되고 고무되어 갔다.

    2. 동족 상잔의 시발점 - 신탁통치논쟁 2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서기1945년 2월 8일 흑해연안 크리미아반도의 얄타에서 미국대통령 루즈벨트는 스탈린과의 비공식회의에서 엉뚱하게도"필리핀이 미합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데 50여년 간의'신탁통치기간'이 필요했으므로 대한국도 20∼30여년간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는 잠꼬대같은 제안을 던졌다. 그에 대한 스탈린의 대답은"그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는 희미한 것이었으나,어째서 대한국인들이 신탁통치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지한 고려도 없었다. 8.15 이후인 서기1945년 10월 25일에는 미국무성 극동국장 빈센트가,건국준비위원회의 전국조직인 인민위원회가 활발한 자치활동에 성공하여 실제적인 대한국의 정부구실을 훌륭하게 해 내고 있는 사실을 도외시한 채,"대한국은 다년간 일본에 예속되었던 관계로 당장 자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미국은 우선 신탁관리제를 실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다시 2개월이 지난 12월말에 이르러서 미·소 양국은 본격적으로 한민족에 대한 신탁통치를 실시하려 했다. 미국의 제안에 의하여 발표되기에 이른 신탁통치결의안에 대하여 한민족 모두는 어떤'주의자'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결사반대의 입장을 나타내었다. 평지풍파와도 같은 갑작스런 탁치논의는 연합국들의 진정한 의도여부와 관계없이 한민족에게는 큰 재앙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국중 하나인 대한국의 유구한 역사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신생국들(쏘련·미합중국·서유럽국가들)은 한민족에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자행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생을 광복투쟁에 바쳤던 진정한 애국자들은 더욱 그 모욕감을 감당할 수 없었다. 김 구를 위시한 임시정부의 주역들은 즉시 신탁통치반대(반탁) 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12월 30일에 서울운동장에서 탁치반대 전국민궐기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는 삼팔선 철폐?외국군 철수·임시정부 승인·탁치 결사반대를 결의하였고 전 국민이 그에 호응했다. 심지어는 점령군사령관 하지의 요리사까지도 결근하는 높은 민족적 단결력을 과시했다. 이에 당황한 하지는 다음날인 12월 31일에,"대한국 국민이 원한다면 신탁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변명했다가 곧 말을 바꿔서,"모스크바의 결정은 하나의 사실로 보아야 한다."는 등 횡설수설했다. 이어서 그 2일 후인 4279년(서1946) 1월 2일에는 군정장관 아놀"신탁통치는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결정한 문제이나, 대한국인이 단합하면 탁치를 피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므로 남·북을 합쳐 통일전선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남로당의 박헌영도 처음에는"신탁통치는 민족의 자존심으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언했으나 아놀드가 '통일전선을 보여주어야 한다'던 바로 그 날부터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찬탁으로 급선회했다. 거기에다가 미군정과 이승만으로부터 크게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리고 있던 인민공화국도 갑자기,"정치란 무지한 대중의 자연발생적 감정에 의해 처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라는 엉뚱한 주장을 하면서 반탁운동을 공격했다. 그들은 한민족의 강렬한 자립열망을'자연발생적 감정'으로 매도했을 뿐만 아니라 왜구들의 일관된 주장이기도 했던 '대한국인은 무지몽매한 군중'이라는 논리를 적절치 못한 시점에서 사용하는 과오를 저질렀고, 임시정부 세력까지도 공격하는 과오를 겹겹이 저질렀다. 그들은 스스로의 지지기반으로 삼아야만 할 민중을'무지한 대중'으로 몰아 부치는 있을 수 없는 실책을 저지름으로써 스스로의 목을 졸라매는 자충수(自充手)를 두어 버린 격이 되고 말았다. 정작 신탁통치안을 주장한 것은 미국측이었는데도 그것을 대폭 찬성하고 나선 것은 미국의 가상적국인 쏘련측과 공산당계열이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만 해도 기를 못 펴고 이 눈치 저 눈치보면서 전전긍긍하며 재기를 노리고 있던 매국노·친 일부역자들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천재일우의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고 찬탁시위자들에게 감사했다. 더러운 친일파매국노들은 그 시점부터 누구보다도 목청을 높여 반탁을 외침으로써 갑자기 둘도 없는 애국자로 자처하려 했다. 애국자의 기준이 바야흐로 '찬탁이냐,반탁이냐'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기묘한 판국이 벌어진 것이다. '친일파매국노출신 자칭 애국자'로 급속히 변신해간 저들은 그들의 은인이기도 한 찬탁시위자들을 가차없는 테러로써 환영했다. 신탁통치안을 내놓았던 미합중국 스스로는 찬탁도 반탁도 않는 기회주의 적인 태도를 취했다. 반탁운동가, 그 중에서도 특히 자칭애국자들은 찬탁지지자들을 외세(쏘련) 의존적인 민족반역자로 몰아 갔고 찬탁지지자들은 반탁운동가들을 반동분자로 몰아가 면서 동족상잔의 처절한 막을 올리고 있었다. 불길한 사태진전을 막기 위해서 여 운형·김 규식 등의 중도파인사들은 상호간의 대화와 타협을 주장했으나,자신의 살 길을 반공운동에서 찾아 낸'매국노출신 애국자' 들은 김 구 등 진정한 애국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중도파마저 공산당으로 몰아 가는 극성을 부렸다. 신탁통치 소동 과정을 통해서 한국의 참 지도자들을 '파씨스트'로 몰아 버리는데 성공한 권력지상주의자들은 자기 자신들이 독재적 파씨스트로 급변해 갔다. 그 이후로 발생한 모든 야만적 동족상잔은 그 각각의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신탁통치논의가 남긴 쓰라린 결과였던 것이다.
    3. 6·25 전야로의 타락상 4279년(서1946) 6월 이승만은 정읍에서 행한 연설 중에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이미 미군정청의 가장 유력한 지원을 받고 있던 그의 주장은 미군정청의 정책과 다르다고 볼 수 없었다. '파시스트'로 몰리게 된 김 구의 한독당 세력과 일방적으로'공산주의자'라고 몰려가던 여 운형 계열은 그에 대하여 격렬히 반대했는데,그러자 이번에는 남한단독 정부수립(단정)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용공분자로 몰면서 탄압했다. 이승만과 한민당의 친일파들이 전 국민을 상대로 한 도박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한 이승만과 한민당의 단정수립안은 공산주의자들의 신탁통치 찬성안과 마찬가지로 인기가 없었으나 지나지방에서 모택동이 득세해 가고 있는 현상에 놀란 미국수뇌부가'만일의 경우에'대비하여 남한만이라도 확고한 미국세력권에 못박아두려 했던 정책과는 공통성이 있었으므로 미국의 강력한 지원하에 이승만은 일로 단정을 향해 나아갔다. 민중의 동요는 더욱 심해지고 좌·우 대립이 극렬한 실력행사로'발전'하는 가운데, 마침내는 누적된 모순이 가열찬 동족상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4279년(서1946) 10월, 드디어 혼란해져 간 한민족 사회 최대의 민족적 비극을 예고하는 사건이 대구지방에서 터지고 말았다. 8·15이후 잠시 모습을 감췄던 왜경의 끄나풀들이 인민공화국을 해체한 미군정당국의 빗나간 정책으로 다시 관공서에 나타났고 저들이 토지개혁과 공출반대를 주장 하는 농민들을 옛날처럼 탄압하자,대구지방의 농민과 노동자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해 버린 것이다. 거기에다가 남로당의 조직적 선동이 주효하여 마침내 '미제축출과 반민족적 매국노 타도'를 외치는 민중적 봉기가 발생했다. 투철한 참민족주의자로서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했던 국문학자 이 윤재선생의 아들이 친일파이자 왜경(倭警) 전력이 있는 자들을 규탄하다가 오히려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 사건의 윤곽은 명확해졌다. 그러나 미군정은 시위군중들을 반란폭도들로 규정하고'모든 방법'을 동원한 대탄압에 착수했다. 수차례의 악순환이 계속되어 가면서 민중은 '미제와 그 주구들'의 무기를 탈취하여 본격적인 무장항쟁에 들어갔다. 그들 중 대부분은 학살과 체포를 피하여 기약없는 도피행각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쉽사리 남로당의 조직과 인연을 맺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서 투쟁근거지를 확보했다. 남한에서의 '공산빨치산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4280년(서1947) 3월에 미국의 트루만이 쏘련에 대한 견제를 목적으로 한 '트루만 독트린'을 발표한 후 같은 해 7월 19일에는 여 운형이 백주에 암살당했고 이로부터 요인에 대한 테러가 일상다반사화 되었다. 남한은 무정부주의적 혼란에 빠져들어 갔으나 어쨌든 그 이듬해인 4281년 5월 10일에는 단정에 대한 찬·반을 골자로 하는 총선거를 실시되었다. 유엔선거감시위원단들도 깜짝 놀랄만한 공포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남한만의 총선거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국을 휩쓸었다. 총선 반대운동이 극렬하게 전개된 제주도에서는 엄청난 양민학살이 자행되어, 제주도 전 지역은 양민들의 피로 물들어 잤다. 20여만 명의 도민 중에 8만여 명이나 학살당한 엄청난 이 동족상잔은 4281년(서1948) 4월 3일에 발단되었으므로 4·3사건으로 불리웠는데 미군정청의 장교들이 개입 하고 서북청년단등 극우 반공단체에서 앞장서서 지옥을 연출한 그 사건은 다시 여수·순천사건으로 이어졌다.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승선을 기다리고 있던 여순지구의 약 3,000여명 병력이 17월 21일에 '미제와 이승만 타도'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켜서 순식간에 여순 지구에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던 것이다. 무수한 양민들이 또다시 참화를 입게 된 이 사건에 대한 진압이 이루어진 후 많은 가담자들은 체포를 피해서 부근의 지리산과 소백산 깊숙이 무장한 채 입산하여 공산 빨치산(공비)이 되었다. 그런 난장판 가운데서도 이승만의 단정노선은 변하지 않은 채 8·15 3년 후인 4281년(서1948) 8월 15일에 마침내 이승만에 의하여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정부가 수립되자 남로당과 빨치산의 활동은 더욱 본격적인 탄압에 직면하게 되어 남로당은 태평양전쟁 말기처럼 전면적으로 지하로 잠입해 들어가서 북한과 연계를 강화해 갔다. 박헌영도 수차례 북한에 드나들면서 대한민국을 전복하고자 대책을 강구했다. 김일성도 이승만을 흉내라도 내듯이 같은 해 9월 10일에 대한국 북반부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장황한 명칭의 단독정부를 세웠다. 한 몸에 머리가 두 개 달린 괴물이 되어 버린 대한국은 그나마 그 두 개의 머리가 다른 하나를 먹어치우기 위하여 끝없는 상쟁을 계속하는 못난이 괴물로 되어 버린 것이다. 어거지로 정부라고 세워 놓았으나 친일파 집단이라는 지탄을 받아 그 명맥을 얼마나 계속 유지할지 지극히 의심스럽던 대한민국 정부는 민중의 빗발치는 여론과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울며겨자먹기로 국회에 상정되었던 '반민족행위자 특별처리법'을 받아들이고 민중의 들끓는 요구에 의해 '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위원회' (반민특위)마저 마지못해 인정하는 척했다. 그러나 엄청난 양민과 반대자들을 학살해 가면서도 오로지 더러운 일신의 보호를 위하여 권력과 밀착되어 있던 반민특위의 처벌대상자들이 갑자기 민족적 양심에 눈을 떠서 반민특위의 활동에 순순히 응할 리가 없었다. 한민족의 기대를 모으고 활동에 들어갔던 반민특위는 수만 명에 이르는 악질 친일도배들을 처벌하지 못한 채 바로 그 매국노들의 방해책동으로 어이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사회정의를 구현해야 할 경찰조직에조차 지난날 광복투사들을 붙잡아 가혹한 고문과 학살을 자행하던 자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앉거나 '출세'하여 이번에는 반정부적 인사들을 공산당으로 몰아서 고문과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저들은 반민특위 임원들마저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테러를 자행했던 것이다. 민중의 분노는 다시 폭발직전으로 치달았다. 4282년(서1949) 6월 26일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끝까지 반대하고 남·북 통일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삼팔선을 넘나들던 한민족독립투쟁 지도자의 대표격인 김 구가, 자택에서 대한민국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백주에 피습을 받아 암살당했다. 그 어이없는 백주의 테러의 배후에는 이승만이 있었음을 부인하기 힘들었으나 암살자인 안두희는 6.25의 와중에 복직한 후에 대령까지 진급하는 출세를 했다. 누구든지 공산주의자와 대화를 한다거나 공산주의자로 보이기만해도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는 최후의 경고나 마찬가지였던 김 구 테러암살 사건으로 인하여, 그 누구의 눈에도 평화통일은 물론 남·북 대화조차도 가능성이 없어진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만일 그 누군가가 그 무슨 방법으로든 통일을 이루고 말겠다면 방법은 이제 한가지 밖에 없었다. 이미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있던 한민족으로서도 그 방법만은 피할 수 있기를 바랐으나 극소수의 정신병자들을 빼놓고는 바라지 않던 그 날은 그후 일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닥쳐와 버렸다.

    4. 한민족 파멸을 향한 광란의 도가니 - 6.25
    김 구 암살사건 이후 한반도의 남·북에는 각각 무력통일을 공언하는 극단적인 전쟁불가피론자들만 들끓게 되었다. 평화통일이라는 단어를 입밖에 내기만 해도 큰 화를 자초하는 야만사회가 한민족에게 남겨져 있었다. 평화통일이란 가망없는 환상처럼 보였고, 그 누구의 눈에도 대규모 내란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전쟁분위기를 돋구어 간 요소들 중의 하나는 미국의 애매한 정책이었다. 4282년(서1949) 3월 2일에 맥아더는 대만과 한국을 미국의 최전선 방위목표에서 제외한다는 기자회견을 가졌으며 다음해 2월에는 미국무장관 애치슨이 맥아더의 의견을 보충하기라도 하듯이, 다시 한 번 미국의 방위선에서 남한이 제외된다는 점을 천명했다. 가뜩이나 일촉즉발의 위기적 대치상태에 처해 있던 한반도라는 화약고 옆에서 불장난이라도 즐기는 듯한 그러한 수수께끼같은 주장들이 난데없이 튀어나온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그 불장난은 4283년(서1950) 6월 15일에 반공주의자 덜레스가 극동 방문길에 나서면서, "한국이 침략당해도 미군 참전을 약속할 수 없다." 는 그 진의를 알 길 없는 발언을 내뱉음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4283년(서1950)경의 아시아 정세는 미국의 국가적 이익에는 크게 불리한 것으로 보였다. 장개석이 이끌었던 부패한 국민당군대는 미국의 대폭적인 지원과 쏘련의 중립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의 공산당 세력에 밀려서 대만으로 쫒겨 갔으며,대만 조차도 방어능력이 의심스러운 상태에서 중공군의 대만공략설마저 심심치않게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맥아더·애치슨·덜레스 등의 무책임한 발언들에 의하여 극히 고무되었을 김일성등이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하여 포문을 먼저 열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한국 내전이 발발하자 2차대전 이후 쓸모없게 되었던 미국내의 군수산업은 총가동하였고 침체되었던 주식시장은 활력을 되찾았다. 그리고 한민족은 그 반대로 전면적인 파멸에 직면하고 말았다. 5. 원폭사용논의와 세균전의혹
    전쟁이 벌어진 후 북한인민군의 공세가 치열해지고 7일만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등 전세가 급박해지자,트루만은 난데없이 미군의 참전을 결행했다. 미국의 독무대인 유엔의 결의조차 거치지 않고 전격적으로 '작전'을 개시한 미국은 수일 후 쏘련이 불명확한 이유로 유엔안보리에 불참한 가운데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군이 주축이 된 유엔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김일성 등은 뒤늦게 미끼에 걸려든 것으로 판단했겠지만 이미 도박판은 크게 벌어져 버렸고 노도처럼 덮쳐 오는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미군과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미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곧 끝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북한인민군의 완강한 저항은 미국의 군산복합체를 총가동시키면서 복잡한 국제전의 양상으로 돌입했다. 북한인민군은 맥아더가 예상한 이상으로 막강했으므로 맥아더 자신도,"북한군은 내가 만나 본 군대중 가장 민첩하고 유능하고 훌륭한 군대이다."라고 감탄했다. 미군은 미군역사상 처음으로 적수다운 적수를 만난 셈이었지만,그 적수에 대한 미군의 대답은 네이팜탄에 의한 무차별 융단폭격이었다. 방사능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원자탄의 살상위력에 결코 뒤지지 않는 가공할 지옥의 불 - 네이팜탄은,한민족의 전통가옥인 초가집과 목조건물들에 특히 결정적인 초토화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차대전 후 뉘른베르크의 나치전범재판에서 나치스의 범죄행위로 처단받은 죄목과 똑같은 행위(도시·거리·촌락을 고의적으로 파괴한 행위)를 문명국 한국의 산하에 가차없이 저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왜구들의 발악적 남벌로 황량해졌던 한반도의 울창했던 숲은 네이팜탄의 불바다에 의하여 거의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어 버렸고 사찰 등 수많은 한민족의 고유한 문화재들도 같은 원인에 의하여 전면적 파괴에 직면했다. 한국을 무기시험장 정도로 착각한 듯한'유엔군'은 네이팜탄 뿐만 아니라 원자탄의 사용도 여러차례 고려한 바가 있었는데,북한인민군의 저돌적인 공세에 놀란 미국의 하원에서는"1주일내에 북한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북한 여러 도시에 원폭을 투하하라."(4283.7.12)고 주장한 의원이 박수갈채를 받았고, 린든·존슨 상원의원도, "침략의 물결을 막는데 원폭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사용해야 할 것‥"(4283.7.20)이라고 주장했으며 다음날인 7월 21일에는 아이젠하워가 "군사목표에 대한 원폭 사용에 찬성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거기에 덩달아서 7월 29일에는 한국의 공군참모총장도,"왜 미국은 북한에 원폭을 투하하여 이 전쟁을 빨리 종결시키지 않는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도대체 그 원폭은 누구에게 사용되는 원폭이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원폭만은 사용되지 않은 채 밀고 밀리는 전쟁이 3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전쟁당시에 세균전까지 시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와 함께 세균전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생체실험의 경력을 가졌던 731생체실험부대 사령관이었던 이시이도 복권되었다. 종전 후 쏘련은 이시이를 세균전 혐의로 하바로프스크의 재판에 회부하려 하였으나 맥아더가 확실하지 않은 이유로 이시이의 신병인도를 거부하는 기묘한 작태를 연출했고, 이시이는 그 저주받을 목숨을 건지는 행운을 즐겼던 것이다. 4284년(서1951) 1월 1일에 프라우다지는 "미국은 이시이시로(石井四郎)의 지도를 받아서 일본에 세균전 본부를 설립하고 있다." 고 비방했다. 또한 일본국수주의자들은 패전이후 억눌려 있던 본색을 서서히 드러내어 1년 후인 4285년(서1952) 1월 27일에는 마이니찌(每日) 신문에,"하르빈의 일본공장(즉, 731악마부대)의 공적을 자랑스럽게 기사로 쓴 자는 방역부대의 전 사령관 사카끼 료우히라(木神良平)였다."라는 기사를 싣는 등 뻔뻔스런 작태를 부끄러움도 없이 연출하기 시작했다. 미군이 왜구들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투입하기로 했다고 알려지자 이승만이,"만일 일본군이 참전하면 총뿌리를 일본군에게 돌리겠다."고 큰소리쳤던 것과는 달리,왜구(일본군)들은 전쟁초기부터 맥아더의 허가 하에 거의 모든 업무에 동원되었으며,심지어는 인천상륙작전때도 19척의 배를 타고 참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도 하다. 4285년(서1952) 2월 29일 중공의 주은래는 만주 및 화북지방에서 미군이 세균전을 실시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에 따라서 세균전의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하여 파견된 국제조사단은,"부적당한 시기에 부적당한 장소에서 발견된 많은 곤충들이 확인되었고‥ 심지어는 눈덮인 산이나 건물옥상 등에서 발견되기도 했다."는 보고를 했다. 그리고 이전에는 동북아시아 지역에 발병이 보고된 바 없는 폐탄저·출혈성수막염 등의 치명적인 질환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여튼 미군 등 소위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 등으로 밀릴만하면 원폭사용을 '고려'했고 맥아더는 한반도를 확보하기 위하여 '방사능폐기물을 압록강 남쪽연안에서 한반도를 가로 질러 뿌리고 대량공습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맥아더는 미행정부 당국자들과의 심각한 의견차이로 인해 해임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터무니없이 지루하고 긴 휴전회담에 빠져 들어갔다. 6. 한국전쟁의 결산
    "중공군이 오기 전에 한국에는 모든 목표물이 파괴되었으므로 비행임무가 없어졌다. 한국은 전체가 무섭게 파괴되었다."라고 할 정도로, 한반도는 태평양전쟁때 사용된 전체 폭약량의 10여배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대폭격을 당했다. 거의 모든 것이 폭격으로 사라져 버린 폐허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이번에는 이유없이 길기만 한 지루한 휴전회담에 시달리게 되었다. 한시바삐 어리석은 동족상잔을 마무리짓고 싶어하는 한민족의 간절한 의도와는 달리,휴전회담에 참가한 한국대표 한 명은 단지 참관인에 불과했으며, 4명의 미국 대표들이 모든 일을 추진했다. 성립될 듯하던 휴전회담이 결렬될 때마다 묘하게도 뉴욕의 주식시장은 호황을 구가했다. 기나긴 소모전 속에서 한민족의 수백만 형제들은 아무런 의미도 찾을 길이 없는 억울한 피를 흘리면서 죽거나 불구가 되어 갔고 왜구들은 전쟁경기에 의하여 드디어 전반적인 경제적 부흥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왜구들이 경제적 번영을 달성하게 된 것은 일찌기 김 구 선생이 예언한 바와 같이 오로지 한국전쟁을 통한 한민족의 무수한 주검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정작 동족상잔이 가열해진 것은 바로 허울좋은 휴전회담 기간 중이었는데,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어리석은 집안싸움에 의하여 이익을 본 것은 과연 누구 였던가? 남·북의 반민족적 독재정권은 오히려 전쟁을 통하여 저들의 위치를 확고히 굳혔고,중공은 북한에 대해 확고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쏘련은 한번 더 '사회주의 형제국들의 단결'을 말로나마 떠들어댈 수 있었고,장개석은 모택동의 침공을 우려하지 않아도 되었고 미국은 불황의 어두운 그림자를 잠시 거둘 수 있었으며, 왜열도의 제국주의자들은 복권되고 부활했다! 더구나 이승만은 전쟁 중에 유엔군 사령관(즉,미군사령관)에게 한국군의 작전권마저 건네주는 치욕적인 망동을 자행함으로써 한국의 자주독립국가로서의 국제적 위치에 크게 손상을 가져 왔고, 한국은 그 후 명실공히 미국의 반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로 빠져들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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