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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중 대륙지방과 식민지들의 투쟁

浮萍草 2015. 4. 14. 11:21
    팔로군. 만주에서의 종전인 해방은 1945년 8월 8.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소련군150만명이 만주로 진격하면서 시작된다.이와 동시에 중공의 팔로군과
    6. 지나지방의 격변 2차 국공합작으로 공동항일전선을 결성했던 모택동과 장개석은 각각 연안과 중경에서 왜왕의 항복 소식을 접하고 곧 마지막 결전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돌진해 갔다. 침략세력이 물러간 지나지방에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행산을 경계로 관동군과 대치하고 있던 팔로군과 조선독립동맹 (즉, 조선의용군)은 쏘련의 만주침공과 때를 맞추어 산해관을 넘어서 만주로 진격해 들어갔다. 스탈린과 모택동 사이에는 묘한 갈등이 있어 왔으나 스탈린으로서도 만주를 점령할 명분은 없었으므로 만주에 대한 지배권은 모택동에게 넘겨진 셈이 되었다. 만주지방의 중요성을 뒤늦게 알아 챈 국민당 군대도 만주를 석권하려 했으나 이미 대부분의 지역이 인민해방군, 즉 중공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있었으므로 공산군과 국민당군 사이에 본격적인 내분이 시작되었다. 일찌기 북간도와 백두산 일대에서 활약하던 조선의용군의 항일투사들은 고향이기도 한 북간도 일대로 몰려갔다. 중공당국은 이 지역에 대한 대한국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했기 때문에,조선의용군의 간부들은 곧 북간도 일대의 치안유지와 공산당 조직사업에 착수했으므로, 중공 내에서도 연안 다음으로 빨리 공산정부조직을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2차대전이 끝나자마자 이미 다음 단계의 세계정책으로 반공을 채택한 미국의 막대한 원조에 의하여 군비가 대폭 강화된 국민당군의 공세는 막강했으므로, 내전 초기에는 중공군이 밀리게 되었다. 그러나 북간도 등 만주의 변방지역까지 밀려갔던 중공군은 국민당군의 노략질과 부패에 혐오감을 가진 민중의 대폭적인 참가와 도움으로 숨을 돌리게 되어 국민당 군에 대한 총공세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국민당군이 가는 곳에서는 지주계급이 부활하여 많은 소작인들이 생겨났고,중공군이 가는 곳에는 지주들이 쫓겨나고 많은 소작인들이 자신의 토지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수억의 지나지방 민중은 중공군의 승리를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게 된 중공군은 국민당군을 격파하기 시작했는데, 백만 대군을 자랑하던 국민당군은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자 어이없게 연전연패 하여 이윽고 장강 남쪽으로 되돌아갔고 다시 머지 않아 대륙에서 밀려나 해남도를 거쳐서 대만섬으로 도주하게 되었다. 그 중공군의 선두에는 항상 강용한 조선의용군이 나섰으며 이들 조선의용군은 장강을 건너 남지나해의 해남도까지 국민당군을 몰아가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중공도 북한당국자들과 마찬가지로 처음 만주지역에 들어섰을 때 쏘련 '해방군'이 만주의 모든 산업시설과 왜족의 재산 등을 가로채 가고 있는 현장을 보고도 모른 체하는 과오를 범했던 것이며,그러한 쏘련인들의 행위를 당연한 권리행사로 봐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탈린으로 하여금 중공을 도와주도록 하려는 작정이었는지는 모르나,만주지방 민중의 피·땀을 짜서 만들어진 그 시설물들은 곧 만주지방 민중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할 중요한 밑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뜻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사회주의조국 쏘련'에게 종노릇하는 별 볼 일없는 국제주의자들의 집단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지나지방 인민들은 일단 자신들에게 땅이라도 나누어주는 공산당에게라도 우선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7. 이전 식민지에서의 해방투쟁
    이차대전은 지구상의 인간세계에 새로운 질서 개편을 가져왔다. 그런 현상은 서양지방뿐 아니라 억울한 식민지 생활을 강요당해 왔던 수십억의 민중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각 지역에서 분출한 민중봉기는 잘난 척하던'자칭 문명인'들인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의 한심한 전쟁광란을 목격하면서 더욱 거세어져 갔다. 서양문명이 최고라는 엉터리 사기극에 더 이상 홀려서 달갑게 노예 노릇을 할 사람은 극히 소수의 얼빠진 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 극소수의 얼빠진 자들이 점차 큰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아시아 남부지방에서는 인도와 베트남에서 먼저 민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세계 최다의 식민지 보유국이던 자칭 신사의 나라 영국섬에서 수백년에 걸쳐 인도지방에 대해 자행한 야만적 착취는, 마하트마 간디의 무저항불복종 운동의 확대와 간디를 지지하고 영국섬을 비판하는 여러 나라의 여론에 부딪쳐서 마침내 물러가게 되었다. 사실은 영국섬이 더 이상 인도지방을 무력으로 지배하기에는 두 번의 전쟁에 의한 국력의 쇠약이 너무 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국섬은 마지막 순간에 현명하게도'쫓겨가는 대신에 차라리 인도 독립을 인정해 주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영국섬 해적들이 무갈왕국을 통치하는 수법으로 악용했던 민족분리 정책은 독소로 남아서,끝내 힌두교도들의 인디아와 이슬람교도들의 파키스탄으로 분열하 고 말았다. 간디는 그러한 종교적 갈등의 와중에서 엉뚱한 동족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직도 간디와 같은 참된 문명인이 살아갈 수 있기에는 인류의 '진화'가 덜 되었던 것이다. 간디 암살사건은 서양지방의 퇴행적이고 야만적인 문명에 이끌려서 같이 퇴보해 간 유구한 문명국 인도가 처해 있던 정신적 파탄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한 정신적 파탄은 이미 40여년 전에 왜구들이 인류 최고의 문명국이자 스승의 나라인 대한국을 강제 병탄했을 때 먼저 시작되었던 것이기도 했다. 간디를 잃은 인도는 항영 독립투사인 자와할랄·네루를 지도자로 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일종의 '인도식 사회주의'를 지향해 간 것이다. 네루의 이상과 신념 등은 신뢰할 만한 점이 많았으나 인도의 독특하고 복잡한 전통적 사회양상에서는 적용하기 힘든 점도 있었으므로 많은 문제점들을 그대로 안고 점진적 개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베트남은 인도와 사정이 달랐다. 베트남에는 간디의 명성과 맞먹을 수 있는 국제적 지도자가 없었고 기회주의적이고 매국적인 바오다이 왕가만이 온존되어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서기 1870년대에 청나라로부터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강탈한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청나라와는 달리 베트남에게 자치와 정치적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청나라는 의례적인 조공을 받는 것만으로 만족했으나, 돈을 벌러 온 제국주의강도 프랑스는 베트남의 매국노들과 함께 베트남 민중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다. 여기서도 서양제국자들의 수법은 별로 달라진 점이 없었다. 그들은 베트남 민중을 노예처럼 수탈하고 그에 반대하는 민중을 학살하고 투옥시켰다. 그들은 베트남 민중의 피땀으로 메콩강 하류에 자기네 족속들의 생활에 편리한 프랑스식 도시를 만들어 놓고는'동양의 빠리'라고 부르며 큰 문명이라도 전해준 것 처럼 흡족해 했다.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저질렀다는 프랑스 혁명의 구호이기도 했던'자유·평등·박애'는 베트남의 어느 구석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오직 억압과 경제적 불평등과 학대만이 베트남 민중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러한 프랑스제국주의자들의 폭정은 매판적인 바오다이 왕가에 대한 민중의 반감과 함께 민중혁명의 좋은 온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호지명(호치민)이 러시아왕국에서 쏘비에트 혁명이 성공하는 사건에 주목하여 베트남을 '인민의 나라'로 만들기로 마음먹은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차대전이 터지고 왜구들이 동남아시아로 쳐들어가자,프랑스 식민지군은 맥없이 항복했고 베트남은 왜구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인도차이나반도의 중앙에 있는 태국만은 서쪽의 영국섬 식민지 미얀마와 동쪽의 프랑스 식민지 베트남과의 사이에 있는 완충지대로써 간신히 독립만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왜구들은 태국을 위협하여 반식민지화 하고는 곧장 서쪽의 미얀마까지 침략해 들어갔다. 남의 나라 땅에서 제국주의자들끼리의 혈투가 벌어지는 동안 인도차이나 민중은 더욱 도탄에 빠졌고 민중은 자기들의 적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영국섬만도 일본섬만도 아닌 바로 전 세계 제국주의 강도들 모두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민중해방투쟁은 서서히 불붙기 시작했고 그 투쟁은 인도차이나 지방의 독특한 민족주의와 결부되어 민족주의적 민중해방 투쟁으로 그 성격을 알기 쉽게 강화해 갔다. 프랑스 제국주의자들과의 무력투쟁에 들어간 베트남의 호지명 세력은 일본섬의 세력 확장이 프랑스를 몰아 내자 이번에는 일본제국주의 군대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보다 야만적인 왜구들의 탄압에 의하여 투쟁은 한 때 난관에 부딪쳤고 그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태평양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차대전이 종결되어 일본제국주의 군대가 물러가자 다시 프랑스의 군대가'옛 식민지'를 되찾기 위해 들이 닥쳤다. 그러나 쏘비에트 러시아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은 호지명의 인민해방군도 베트남 민중의 지지 속에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호지명의 해방군은 디엔비엔푸에서 수만 명의 프랑스군을 포로로 잡는 대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북부지역을 장악했다. 베트남 남부지방에서는 여전히 매판적인 고딘디엠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남부지방에서도 혁명의 분위기가 급격히 고조되어 가자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국내·외의 곤경에 처하게 되어 베트남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베트남은 순조롭게 민족해방을 이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를 대신하여 신식민지주의적인 미합중국의 막강한 군대가 의문투성이의 통킹만 사건을 이유로 프랑스대신 베트남 문제에 개입으로써 비극의 제 2장은 막이 올랐다. 이른바 베트남전쟁이 시작된 것이다.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 및 중앙아시아 등에 걸쳐 있던 여러 회교국가들도 더이상 이교도 제국주의자들의 지배를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먼저 알제리아에서 벤 벨라와 정신과 의사 프란쯔 파농의 합작인 알제리 혁명투쟁이 일어났다. '문명국이자 예술의 나라'인 프랑스는 알제리아마저 놓치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서 마지막 식민지의 해방투쟁에 대하여 야수적인 탄압을 가했다. 디엔비엔푸에서 그 무능함이 폭로된 프랑스의 제국주의 군대는 10여 년의 알제리 해방운동 기간 중 무려 백여만 명에 달하는 원주민 학살을 기록하는 야만성을 발휘했으나 싸르트르를 비롯한 국내 문명인들의 거센 비판과 대외적인 체면에 몰려서 '프랑스 해방의 영웅' 드골은 드디어 알제리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의 낫세르는 아랍 민족주의를 주장하며 군사혁명을 일으켜서 영국의 지배로부터 이집트 주권을 돌려 받았고 그로 인하여 아랍세계는 자신들이 아랍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지정학적인 특성에 의하여 그 후 이웃한 이스라엘과 잦은 충돌을 일으키면서 이집트의 입장은 매우 미묘한 변화를 보여주게 된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영국은 인도지방에서와 마찬가지로'쫓겨나기 전에 물러나는 지혜'를 발휘했으므로, 중동의 여러 군소 왕국들도 표면상으로는'독립'을 선사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보다 세련된 민중착취 형태인 간접 경제지배 방법을 채택하여 이른바 '신식민주의'라는 형태로 아랍의 여러 나라들을 지배하려 하는 제국주의자들의 농간에 의하여 아랍민족주의는 그후로부터 현재까지도 큰 문제를 안게 되었다. 낫세르의 아랍민족주의는 그 후 리비아를 해방시킨 무아마르 카다피에 의하여 이슬람적 민족주의로서 발전을 보게 되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많은 격변이 일어났다. 의혹에 쌓인 '메인호 침몰사건'을 구실로 발발한 미서전쟁(美西戰爭)으로 쿠바를 확보했던 제국주의 미국은 신식민지주의의 모범을 쿠바에서 보여주기로 했다. 쿠바는 미국시민들의 입맛을 돋구기 위한 달콤한 설탕을 생산해 내는 사탕무우 단일 경작지역으로 지정되어 매판적 정권과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미합중국 장삿꾼들의'신발명품'인 다국적기업은 라틴아메리카를 저개발국 민중경제 착취의 실험대상으로 한 후 곧 전 세계를 향해 돌진해 갔다. 니카라과와 과테말라에서도 교묘한 미합중국의 제국주의적 경제수탈을 물리치기 위한 민중해방 운동이 일어났는데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민족 해방운동이라는 용어 보다 민중 해방운동이라는 용어가 더욱 보편적으로 쓰였다. 이들 지역은 미국이나 마찬가지로 뚜렷한 민족적 색채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숱한 종족과 인종들의 혼합지역이었으므로 '민족해방'이라는 표어는 애초부터 큰 관심을 끌 수 없었던 것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강도적 침략으로 시작된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수탈 역사는 그와 동시에 '기독교 복음화'의 역사이기도 했다. 날강도와 십자가 - 이렇게 기형적인 모습으로 미주대륙에 들어 온 기독교는, 제국주의자들의 강제적인 보급으로 인하여 한번 인디오의 세계에 들어가기 시작하자 곧 널리 퍼져가기 시작하여 라틴아메리카 종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러나 중세 유럽지방의 봉건사회와 마찬가지로 지배자들과 밀착되어 있던 라틴아메리카의 카톨릭교회는 무지와 빈곤에 시달리는 민중에게는 착취자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카톨릭교회는 민중에게 끊임없이 '순종의 미덕'과 '내세의 천국'을 설교하면서 지배자들의 착취를 옹호하기만 했던 것이다. 수백년 동안이나 카톨릭교회에 의하여 마취당해 오던 민중은 서서히나마 카톨릭교회의 박쥐같은 작태를 깨닫기 시작하자 교회에 나가서 헌금하기를 거부하기 시작 했다. 그리고 민중의 자식들은 교회의 사제로 출세하기보다는 민중을 위한 사회운동을 벌이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카톨릭교회는 교단의 운영을 바티칸으로부터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헌금도, 사제후보도 나타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처럼 교회의 존립이 어렵게 되자 뒤늦게 그 원인을 조사한 카톨릭교회는 여태까지의 교회정책으로는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민중의 환심을 끌기 위하여'사회정의'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순진하고 열성적인 카톨릭교단 출신 순교자들은 이 교회의 새로운 구호에 생명을 걸고 뛰어 들었다. 그러자 오랜 동지였던 교회의 배신을 알게 된 독재자들은 '배신자에 대한 본때'를 보여 주려고 선두에 섰던 혁명가적 순교자들을 학살하였으므로 교회는 비로소 민중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리하여 라틴아메리카에서의 민중운동은 교회를 은신처로 삼아 발전해서 마침내 '해방신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카톨릭으로써 부활하게 되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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