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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이스라엘과 아프리카 식민지

浮萍草 2015. 4. 18. 22:33
    (왼쪽부터)인도의 네루 총리,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과 회담 중인 이스라엘 나세르. 집권 당시 나세르는 제3세계 지도자들과 돈독한 유대 관계를 과시
    했다. © 편집부

    8. 서기 20세기의 문제작 이스라엘 태인 역사의 후반부는 대체로 유럽지방의 시민사회 및 제국주의의 성쇄와 보조를 맞추어 왔다. 암흑시대이던 유럽지방의 중세시기부터 시작된 유럽지방의 전반적인 문맹상태와는 달리,거의 유일하게 동아시아 유교사회와 비슷한'교육이 보편화 된 집단'이기도 했던 유태인들은 칼빈의 종교개혁(개악)과 프랑스혁명의 발생으로 좋은 발전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왕권신수설'대신'금권신수설(金權神授說)'이나 다름없는 칼빈주의는,'수전노 유태인'이라는 달갑잖은 관념으로부터'자본가 유태인'이라는 보다 긍정적인 유태인 상을 만들어 내었다.물론 자본가중에 유태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태인들의 국제적인 높은 교육 수준과 본능적 경제감각은 자본가들의 많은 부분을 유태인이 차지하게 되는 큰 힘이 되었다. 또한 왕정과 봉건제도에 조종이 울리기 시작한 프랑스혁명은 유태인들의 시민권도 합법적으로 보장해 주기 시작했다. 이로써 유럽사회의 떳떳한 일원으로 본격적으로 표면에 나서서 활동하기 시작한 유태인들은 서양근세사와 현대에 이르는 서양지방의 크고 작은 사건들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바가 되었다. 그들은 백년이 채 안되어 서양을 움직이는 중심 세력이자 배후 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그러나 유태인들의 숨은 실력이야 어쨌든 간에 유럽인들은 여전히 유태인들에게 전통적인 경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자기보호본능에 의한 반작용 이기도 했다. 유럽인들은 유태인의 지적·실무적 우수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기 19세기 말엽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은 유태인들로 하여금 유태인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오니즘 운동으로 나아가게 하여,옛 가나안 땅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거주지역에 실제로 토지를 확보해 가기 시작했다. 영국의 식민지적 지배하에 있던 중동지방의 아랍민족들은 이를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유태인들의 토지매입을 막을 만한 공권력도 동원할 수 없었다. 좋건 싫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땅을 사서 이주해 오는 세계 각지의 유태인들과 같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차세계대전이 터지고 나치스 독일에 의하여 유태인 숙청과 학살이 대량으로 자행되자 유태인들은 더욱 자신들의 조국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록펠러를 위시한 서양의 유수한 자본가들이기도 했던 그들 유태인은 당연히 연합국들을 경제적으로 강력히 뒷받침해 주어서 승리로 이끌게 했다. 이차대전 말기에 이르러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지자 유태인 대표들은 영국의 식민지역이었던 팔레스타인 지역이나 다른 어느 곳에라도 자기들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도록 막후 교섭을 진행시켰다. 땅부자인 쏘련이나 미국이 시베리아나 알라스카의 어느 해안 지역에 연합국으로서의 호의를 베풀어서 한 귀퉁이 땅을 나누어 주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섬 통치배들이 제시한 우간다 지방마저 불확실한 이유로 거부한 유태인 지도자들은 굳이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수천년간 살아오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태인국가 수립의 잠정적인 후보지로 결정해 버림으로써 중동의 불운한 현대사는 막을 열게 되었다. 멀쩡한 문명사회임을 자랑하는 서기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새로운 '메이플라워'호인'엑소더스'호가'약속의 땅'을 향하여 최신 무기를 가득 싣고 떠난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대두하기 시작한 아랍민족주의에 의해 불완전하나마 독립하기 시작한 아랍인들은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모여드는 현상을 좋게 봐 줄 수 없었다. 더우기 '유태인 국가'를 세우겠다고 몰려들고 있는 팔레스타인 땅은 빈 땅이 아니었으므로 팔레스타인 민족에게는 그러한 유태인의 토지합병은 새로운 침략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바보가 아니었던 팔레스타인 민족은 '유태인국가'의 주권에 복종하고 살아야 할 자신들의 미래를 달갑게 받아 들이려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민족적 본능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도 있었다. 민족적 독립이 침해받는 한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따라서 남은 것은 유태인국가를 어거지로라도 세우려는 시오니스트들과의 대결만이 있을 뿐이었다. 유태인들이 처음 팔레스타인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는 그런대로 아랍인들과 같이 어울려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유태인의 집단거주지가 형성되면서, 드디어 자기들의 거주구역 내에서 복종하지 않는 아랍인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에 반발한 아랍인들(주로 팔레스타인 민족)과의 사이에는 사소한 충돌이 빈번해지고 주위의 아랍국가들이 유태인에게 항의하게 되었다. 옛 로마의 지배자들과 갓 독립한 아랍인들을 같은 종류의 적으로 혼동한 듯한 유태인지도자 벤 구리온은 서기 1948년 4월 9일에 유태인 주거지역 외곽 지대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부락을 습격하여 수백명을 학살했다. 유태인을 박해한 나치스독일을 탄생시킨 게르만족에게 해야 할 복수를 엉뚱한 아랍양민들에게 터뜨린 것이다. 그 사건으로 아랍인들은 자기들이 이상한 형태의 새로운 침략자를 맞이하였음을 충격적 사실로 받아들였고 그처럼 '평화를 파괴한 자'들에 대하여 복수를 선언했다. 그러자 유태인들은 이번에는 전 세계에 분산되어 있는 모든 유태인들의 국제적 단결로 대항해 나가기로 했다. 갖은 우열곡절 끝에 마침내 지중해 동남쪽의 해안지대에는 이스라엘 국가가 만들어졌다. 전 세계의 금권과 권력을 쥐고 흔들고 있는 유태인 실력자들이 자금과 무기를 제공하고 국제 외교무대에서 이스라엘을 옹호하고 나섰으므로 이스라엘은 좁은 국토와 적은 인구수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아랍민족과의 전쟁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억울하게 된 것은 팔레스타인 민족이며 그들은 수천년간 살아 온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어 주변의 레바논 아라비아 등으로 흩어져 졸지에 난민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 유태인이 국가를 필요로 했듯이 팔레스타인 민족도 자신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독립국가가 필요했으므로 그들은 강탈당한 영토를 되찾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전개해 왔다. 팔레스타인 민족은 아랍세계 내부의 복잡한 분열양상과 이스라엘에 절대 유리한 국제 무대에서의 열세로 인하여 자칫하다가는 인디언처럼 역사의 뒷 무대로 밀려 없어져 버릴 위기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보다 극렬한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수차례의 여객기 납치사건 뮌헨 올림픽 선수촌에서의 이스라엘 선수단 공격 등의 단말마적인 극단적 방법까지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 방법을 통해서라도 잊혀져 가는 자신들의 존재를 국제 사회에 부각시켜 보려 했던 이들 팔레스타인 민족은 어려운 국제여건때문에 아직도 난항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택한 극단적 방법은 국제사회에서 국제테러리즘으로 인식되어 오히려 비난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서기 1983년에 발생한 베이루트의 샤틸라·사브라 난민촌에서의 수천 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민족 학살사건을 계기로 아라파트 의장을 중심으로 하는 팔레스타인 지도층은 국제사회'팔레스타인 국가'의 건립을 위해 호소하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러나 전 세계 유태인들의 힘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의 강경한 자세로 인하여 아직 그 성공 여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수천년간 그 땅에서 살아 온 팔레스타인 민족을 위한 국가는 반드시'문명세계'의 이름으로 건설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 지역의 오랜 분쟁과 학살의 악순환이 일단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가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가장 유력한 아랍지도자로 인식되어 왔고 최근(4323년 서1990)의 쿠웨이트 사태로 이라크의 독재자인 후세인 대통령도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정략적인 관심을 지녀왔음이 다시 드러나기도 했다. 이스라엘이 불법 점거한 시나이 반도 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가,이라크가 오스만 투르크 시절의 행정구역이었던 쿠웨이트를 합병하자 범세계적 제재조치를 강경하게 밀고 나간 유엔이라는 존재는 이미 여러차례 보여온 심각할 정도로 불공정한 자세로 인하여, 이제는 그 존재가치마저 의심스러워 보인다. 한민족의 재통일 문제와 함께, 서남아시아 지방의 문제는 이제 인류사회에서 가장 예민한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두 문제 모두 평화적이고 긍정적으로 해결되어야만 인류사회 전체가 보다 이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 중요성에 있어서의 우열을 가릴 수가 없는 것이다.
    9. 아프리카의 해방 투쟁
    아름다운 전원 생활에서 쫓겨난 후 황량한 불모지인 인디언보호구역 안에 갇혀 버린 북미대륙 원주민과 함께 가장 잊혀져 버리기 쉬운 종족이 바로 흑인종이다. '검다'는 용어가 주는 불유쾌한 어감과는 달리 밝고 순진무구하기만 했던 아프리카 흑인들은 아프리카에 인류사회가 시작된 이래 긴 세월을 자연과 일체가 되어 순수한 인간성을 간직한 채 무사태평하게 지내어 왔다. 북아프리카는 옛 문명이 명멸했던 지역으로서 이집트·이디오피아 등의 오랜 문명국들과 그 뒤를 이은 카르타고·로마·사라센제국 등의 잘 알려진 세력권이었다. 사하라 사막의 한 가운데 있는 티베스티 산맥 중에도 오래된 문명의 유적이 있고 아프리카 남부의 짐바웨 지방에도 옛 성의 거대한 유적 등이 있어서 아프리카 각 지역마다 때에 따라서는 왕성한 역사 활동과 찬란한 문명이 지구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성쇄를 거듭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서양해적들이 아프리카의 평화를 깨고 수천만 명의 흑인에게 갑자기'노예'낙인을 찍어 팔아먹고 유럽의 문명을 전해 주겠다고 아프리카를 멋대로 나누어 먹음으로써 아프리카는 수백년간 식민지 상태로 들어갔다. 전 유럽지방에서 수억만 명이 살다가 죽어 갔을 그 수백년간의 식민지 지배 기간 중에 알버트 슈바이쩌와 몇몇의 순교자적 백인 봉사자들이 중부 아프리카의 밀림 속 진료소에서 흑인들의 질병을 치료해 줬다고 해서 유럽지방 날강도들의 '원죄'가 사면되는 것은 아니다. 일차대전 중에는 유럽세계의 단 하나의 문명인이던 밀림속 진료소의 슈바이쩌박사마저 유럽지방의 포로수용소로 데려가 감금했던 유럽이 아닌가? 아프리카는 수천만 명의 슈바이쩌보다도 자신들의 건강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건강하고 독립된 자신들의 국가를 원했다! 알제리아의 정신과 의사 프란쯔 파농도 여느 아프리카인들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인들이 '제 정신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식민지 해방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 해방투쟁이야 말로 억눌린 아프리카인의 정신질환이나, 심각한 가학증(加虐症)에 사로잡힌 유럽식민주의자들의 변태성 신경성질환을 치료하는 가장 훌륭하고도 유일한 처방이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주민들, 특히 흑인들은,일·이차 세계대전을 지켜보는 동안 아예 문명의 탈마저 벗어 던진 유럽지방의 야만인들에게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짓밟히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하여 수백년간 억눌렸던 양순한 흑인들은 갑자기 활발하고 용감한 해방투쟁의 용사들로 급변해 갔다. 그러나 순순히 아프리카를 내 주려는 마음씨 고운 제국주의 나라가 있을 리는 없었다. 수백년간 유럽국가들은 아프리카의 풍부한 천연자원과 노동력을 공짜로 빼앗아서 살쪄가고 있었고 식민지의 상실로 자기들의 식탁에 반찬 수가 줄어드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차대전 후유증으로 유럽지방 내에서도 전쟁혐오증이 팽배해 가고 무력으로 식민지 민중을 진압하는 데도 힘의 한계를 느낀 제국주의자들은 미국이 이미 선보이기 시작한 바 있는 신식민주의, 즉 간접통치 방식으로 대폭 전환했다. 문명국 대한국에서도 시도되는 이 새로운 수탈 방식은 서양제국주의자들이 전면에 나서는 대신 현지의 주민 중에서 하수인 노릇할 자들을 골라서 서양제국주의자 들의 입맛에 맞게 조종하여 교묘하게 잉여가치를 빼앗아 가는 방법이지만 표면상으로는 어디까지나'국제적 무역'이나'외국인 투자''기술협력'등의 고상한 외교적 용어들로 포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독립을 얻게 된 기쁨에 들떠서 이러한 새로운 수법을 눈치채지 못하던 옛 식민지 민중도 얼마 안 가서 그 교활한 본질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옛 제국주의자들과 짜고서 자신들을 착취하는 자신들의 허수아비 정부들과 치열한 대립(즉동족상잔)을 벌이는 악순환 속으로 굴러 떨어져 갔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홍성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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