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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대한국의 혼란과 동족상잔의 불씨

浮萍草 2015. 4. 8. 10:27
    신탁통치 지지와 반대. 역사에 가정(假定)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당시 한반도에서 신탁통치가 이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민족의 비극인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일어났을까? 만약 6·25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64년간 동족분단의 비극이 계속되고 있을까?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4. 대한국의 혼란 구들이 무조건 항복한 이후 인류 최고의 진정한 문명국가였던 대한국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등불이 아닌 좀 더 깊은 암흑일 뿐이었다. 동양침략의 총책임자인 왜왕 히로히또의 항복과 때를 같이 하여 만주 전역과 대한국 북부로 진주해 들어오는 쏘련의 신속한 행동에 의하여 자신의 이권범위가 대폭 축소될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긴 미국은,쏘련이 남하하는 범위를 한반도의 중간쯤에서 저지시키려 했다. 따라서 대한국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는 몇몇 참모부 장교들에 의하여 한반도의 남북을 양분하는 북위 38도선이 쏘련과의 세력 경계선으로 그어지는 데는 불과 30분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카이로회담과 얄타협정과 포츠담선언을 통해 대한국의 독립을 누누히 강조하고 암시한 바 있던'연합국'은 선언의 붓끝이 마르기도 전에 대한국을 임의로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세력권으로 분할해 버렸다. 그 자리에는 한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그 누구도 근처에조차 없었으며 대한국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철저히 무지했던 그들은 대한국을 한 독립국가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써 해방되었다는 한민족의 비극적 무대는 국권을 왜구들에게 강탈당한 지 35년만에 다시금 대한국인들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곳에서 마련되었다. 그리고 밝은 문명세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듯하던 한민족의 꿈은 38선 이남에서는 강도 왜구들이 남기고 간 토왜(土倭:즉 친일파)들에 의하여 불과 몇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또한 한반도 북쪽 지방으로 진주한 쏘련군은 미군과의 협정에 의하여 북위 38도선까지 '해방'시키고 곧 38선 이북의 모든 존재에 대하여 해방군으로서의 권리를 남용하기 시작했다. 나치스 독일에 의하여 우랄지방 서쪽의 대부분의 공업 시설이 파괴되었던 쏘련은 모든 점령지역의 공장시설과 재화들을 긁어 모아서라도'사회주의 조국'을 최우선 적으로 건설하려 했다. 그러한 수법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적이라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원시적 자본축적' 단계에서도 숱하게 보아 와서 이미익숙해진 '강도적 수탈'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대한국의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어 그동안 피폐했던 대한국 인민들을 위하여 가동되어야 할 모든 산업시설은,'만국의 노동자·농민을 위한 사회주의 조국 쏘 비에트 연방의 해방군'에 의하여 철저하게 전리품으로 뜯겨가 버렸다. 거기에다가 피폐해 진 대한국 인민보다도 더욱 물욕에 굶주린 듯한 저들'유물론자'들은 민간인들에 대해서도 약탈과 모욕을 일삼는 행위를 빈번히 자행했다. '다바이( ; 주시오)'라는 낯설었던 러시아어는 곧 대한국 인민들의 유행어가 되었다. 숱한 부녀자 윤간사건이 발생하여 여러 식구들의 눈앞에서 쏘련군들에게 윤간당한 새색시가 수모를 참을 수 없어 자살하는 경우도 왕왕 생겼다. 이것이'노동자·농민의 혁명군' 또한 해방자로 등장했던 쏘련군들이 많은 북한 주민들에게 남긴 첫 인상이었던 것이며,곧 이어 실시된 토지개혁으로 인하여 터전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지주가족들과 더불어, 많은 주민들이 쏘련군들의 만행을 두려워하여 38선을 넘어 낯선 남쪽 땅으로 건너오게 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38선 남쪽에서도 사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쏘련군보다 한달 가량이나 늦게 남한을 점령한 오끼나와 주둔 미군사령관 하지는'해방의 은인'을 환영하기 위하여 인천부두에 몰려와 있던 한국인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고 여전히 위압적이던 왜구경찰이 어리둥절해진 민중에게 발포하여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곧 바로 서울로 향한 점령군은 왜구들의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를 해체한 것이 아니라 당분간 점령작전 수행상의 편의를 위하여 오히려 그 저주스러운 수탈기구를 유지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왜구들은 왜왕의 항복선언이 나오기 수일 전부터 여 운형에게 왜족들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해 줄 임시 기구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었으므로, 여 운형은 이미 조직되어 있던 건국동맹에 더 많은 사람들을 참가시켜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구성하여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왜구들은 미국의 '점령군'이 자기들에게 과히 불유쾌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재빨리 눈치채자 오히려 점령군을 이용하는 간교한 술책으로 곧 돌아섰다. 대한국에 대하여는 도대체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던 미국 일리노이 출신의 하지 중장은 대한국수탈기관인 총독부를 대한국의 대표기관으로 인정하고 왜어를 유창 하게 구사하는 아베 총독을 대한국의 대표자로 착각했다. 그는 한민족의 고유 언어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던 것이다. 왜구들은 점령군에게 한민족을 엉터리로 모략하는 최후의 장난질도 잊지 않았다. 조선총독부 뒷 뜰과 굴뚝에서는 왜구들이 그동안 자행했던 36년간의 모든 수탈 기록들이 증거 인멸을 위해 태워지고 있었 왜구로부터 해방되었다는 한국인들은 여전히 왜구들의 군대와 경찰이 자신들을 향하여 경계의 총뿌리를 겨누고 있는 기묘한 세상에 살고 있었다. 왜구들은 또 흥청대는 승리의 기분에 들 떠 있는 점령군 지휘자들에게 한국의 기생들을 비롯한 여성들을 노리갯감으로 제공하는 중요한 '정책'도 빠뜨리지 않았다. 자기들의 추잡한 생명을 보장받기 위하여 엉뚱한 한국의 아름다운 여성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미국 점령군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실제로 점령군사령부로 대체된 것은 실로 4개월이나 지난 그 해 12월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를 전국적 조직으로 재빨리 확대한 여 운형은 여러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일하고자 했으나 그 중에는 사이비 민족주의자 혐의가 짙은 자들도 여러 명이 있었다. 거의 모든 지도급 인사들이 태평양전쟁 말기에 변절해 버린 상황에서'인물홍수 속의 인물난'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런 혐의를 받던 인사들과 이승만을 건준에 포함시킨 여 운형의 범민족적 포용력은 인물난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했으나 그것은 곧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 주의자들에 의한 반발에 부딪쳤다. 박헌영은 그러한 변절의 혐의가 짙은 자들을 해방된 나라의 지도자로 맞아들일 수는 없다는 입장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친일파나 변절자들은 더러운 목숨과 재산을 유지하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적극적인 공세로 돌변하게 되었다. 관용성이 풍부한 건준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뒤가 구린 저들은 "임시정부가 귀국할 때까지는 건준을 인정할 수 없다."는 엉뚱한 주장을 내세우고 점령군 지휘자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저들의 불참에 의해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 건준으로서는 부족한 일손을 메꾸기 위해 그동안 반제 항일투쟁의 경력을 인정받고 있던 공산당측 대표자들도 많이 참여 시켰는데 그것은 곧 친일부역자들에게 좋은 공격거리를 제공해주게 되었다. 왜구침략시기에 구미 유학 등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계층이기도 했던 저들 친일매국노들은, 대한국에서는 유일하게 점령군과 영어로 의사 소통이 가능 했던 집단이기도 했다. 총독부의 왜구들과도 친밀하게 지내던 그 자들은 왜구들의 소개를 받아 점령군 지휘관들에게 접근하였고 미군지휘관들은 저들을 처음에는 통역관으로 이용하다가 그들의 이용가치를 알게 되자 저들 중 많은 수를 군정청의 관리로 앉혔다.

    5. 동족상잔의 불씨
    전세계가 조용해진 이차대전의 종결은 대전 중에 더욱 팽창한 자유경제체제 주도국가 미국의 생산과잉 상태와 함께 불길한 암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일단 '스탈린식 사회주의 독재국가'의 확산을 저지한다는 정책을 결정한 미국수뇌부는 쏘련과의 세력 경계선인 독일(서독)과 한국(남한)을 대공(對共) 전초기지화 하기로 작정하게 되었다. 그처럼 급변해 가는 국제 정세를 '영어를 아는 덕분'에 재빨리 알아차리게 된 친일매국노들은, 전 세계에 아직 유례가 없었던'투철한 반공투사'로 재빠르게 자기 변신을 시도했다. 건준은 전국적인 자치정부 형태를 갖추었고 실제로 각 지역의 건준요원들은 치안과 질서를 유지했다. 여 운형 또한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을 기다렸으며, 임시정부가 도착하는 대로 건준의 조직을 임시정부에 위임하고 물러 날 생각이었다. 건준 내의 공산주의자들은 보다 더 민중적인 기반을 광범위하게 확보하기 위하여 친일파와 지주들의 재산을 몰수할 것과 그런 자들이 대부분 소유하고 있던 토지 들을 무산자·소작농들에게 속히 재분배할 것을 주장했으므로 민중의 호응도가 높아져 갔다. 여 운형 또한 그 무엇보다도 민중의 생활여건 향상을 그의 일생 목표로 삼고 있었으며'주의'는 그 다음 문제였다. 그러나 여 운형의 그러한 성향은 친일파 경력의 친미주의자들로부터 쉽사리 공산주의자로 몰리우게 되는 구실을 제공해 준 셈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토지개혁 요구를 들어줄 리 없던 친일매국노들은 곳곳에서 토지를 요구하는 민중과 부딪치게 되었다. 점령군은 동양척식회사 및 왜족들이 보유하고 있던 전 한국의 80%에 달하는 재산을 적산(敵産)이라는 이유로 군정청의 관리하에 귀속시켜 버렸는데 그러한 조치는 한국 인구의 80%에 달하던 농민들로 하여금 미국의 정체를 의심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공산주의자들의 선동과 선전이 가속화되면서 미국은 점차 제국주의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친일매국노들은 이제 자기들이 활동할 시기가 다가 오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나름대로의 조직을 정비하고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동족 상잔의 불씨는 당겨졌던 것이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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