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반정(反正) 세계사

98 2차대전의 종막

浮萍草 2015. 3. 31. 11:14
    2. 지나지방의 반제국주의 투쟁
    기 1920년대 중반부터 가열해지기 시작한 공산당의 항일투쟁은 만주지방에서 특히 왕성하게 전개되었다. 만주지방 중에서도 특히 백두산 일대가 항일 공산빨치산의 무대였고 그 중심 세력은 다름 아닌 대한국인이었다. 조국 해방과 공산주의 인민공화국 건설이라는 두가지 목표를 한꺼번에 달성하기 위하여,노동자·농민들과 공산주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이 '혁명군'은,울창한 밀림을 근거지로 신속한 기동력을 구사하며 왜구들과 친일파들의 근거지를 공략하고 재빨리 사라지곤 했다. 수차례에 걸친 공비토벌 작전이 벌어졌으나 넓디넓은 백두산 줄기에서 빨치산을 추적하기는 어려웠고 왜구들은 그 때마다 주변 마을의 양민들에게 '통비분자(通匪分子)'라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서 대량학살로 보복하곤 했다. 따라서 양민들의 원한과 분노는 점점 더 거세어져서 백두산 일대와 함경도·평안도의 삼림지대는 바야흐로 대한국인 공산항일빨치산의 독무대가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서기 1939년에 2차대전이 시작되고 나치스 독일과 파시스트강도 일본이 동맹을 맺자 이들은 큰 시련에 부딪치게 되었다. 미합중국과의 전쟁을 비밀리에 준비하면서 지나지방과 남방열도 등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 확대를 꾀한 왜구들은, 우선 후방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일본열도 내외의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한편,백두산 일대의 항일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서기 1940년경에 벌어진 관동군의 대토벌 작전으로 인하여 항일 빨치산들은 백두산에서도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게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항일빨치산 제 3군 휘하의 제 6중대장이었다는 김일성과 제 5중대장이었다는 최헌도 대토벌 작전에 걸려 들어 백두산 근거지를 잃고 일단 쏘련으로 피신하는 길을 택했다. 쏘련에 들어가 쏘련군 장교로서 대독전선(對獨戰線)에 참가했다는 김일성은 수년 후에 쏘련군과 함께 평양으로 되돌아 온다. 한편 지나지방에 대한 강도일본의 침략은 이미 서기 1937년 여름에 터진 중일전쟁에 의해 지나지방 동부 도시지역들을 왜구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에 의하여 연안지방에 쫓겨 가서 항일투쟁을 하던 모택동과 대부분의 중원지방을 차지했던 장개석은 극적인 서안사변(西安事變 : 장개석이 장작림에게 체포당한 것을 연안공산당의 주은래가 중재에 나서서 해결한 사건)으로 인하여 제 2차 국공합작을 결성하고 왜구들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을 펼쳤으므로, 왜구들의 침략은 일단 주춤하게 되었다.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장개석 국민당 정부와 함께 중경으로 옮겨 가서 마지막 결전을 위한 광복군 창설을 서둘렀다. 그러나 장개석은 극히 고압적인 자세로 임시정부 요인들을 자기 부하 다루듯 하였고 나중에 결성된 광복군도 독립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국민당 군대내의 조선인 용병' 정도로 밖에는 취급하지 않았으므로 광복군이 조국광복 투쟁의 최전선에 영광스럽게 나설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또한 국민당 내부가 급속도로 부패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지나지방 민중의 마음은 이미 국민당으로부터는 멀어져 가고 있었고 그에 비하여 연안의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농민들에 대한 처우개선으로 그 인기가 급상승해 갔다. 연안의 조선인 항일무장부대도 수천 명에 이르고 있었다. 왜구들의 대규모 포위공격과 철저한 봉쇄작전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지지를 얻은 연안공산당 정부는 끝까지 버텨 나갈 수 있었다. 이윽고 왜구들의 세력이 다소 주춤해지자 이번에는 산서성 태행산(太行山)이 왜구격멸 투쟁의 최전선이 되었다. 대한국인으로 구성된 반제국주의 혁명조직인 조선독립동맹의 항일빨치산들은 우수한 왜어(일본어)실력과 강인한 체력으로 전선의 적병들을 상대로 선무공작과 기습작전 등을 도맡아하다시피 하곤 했다. 이들은 왜구들은 물론 미·영·불 등의 제국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노동자·농민출신인 제국주의 침략군의 '사병'들에 대해서는 동지애 적인 친밀감을 나누고 싶어하였고 그 사병들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게 하려는 방법도 사용했다. 왜구들의 발악적인 침략전쟁은 서기 1937년 12월부터 2개월간 계속된 남경대학살 사건(40여만 명의 남경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사건)으로 이미 그 악마적 특징에 한가지를 더 보태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도발후 그 저주받을 '업무'가 시작된 관동군소속 세균전 부대의 잔혹상은 왜구들이 '악마같은 무리'가 아닌 바로 '악마 그 자체'임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북만주 하르빈의 교외에 비밀리에 설치된 악마들의 친목대회장인 731부대는 철저한 비밀부대로서 만주 전역의 항일투쟁 영웅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잡아 가두고 각종 '실험'을 행하였다. 그 중에는 젊은 여성의 생체해부 실험 및 매독전염 실험,독약성능 실험,동상걸리게 한 수족을 자르는 실험,중화상실험이랍시고 생사람을 삶아 버리는 실험,온갖 치명적인 세균을 감염시키는 실험,각종 살상용 무기와 폭탄성능 실험 등,아비지옥에서도 미처 마련하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지옥을 지상에 선보였다. 그것도'과학적 연구 성과'를 얻어 보겠다고 생물학자이기도 한 왜왕 히로히또의 재가를 얻은'유능한 과학자''사계의 권위자'들이 총동원되다시피 하여 기울어져가는 전세를 만회하기 위한 최후의 발악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3. 이차대전의 종결
    남태평양에서 밀리기 시작한 왜구들은 유구(오끼나와)까지 미군에 의하여 점령당하고 일본열도내로 쫓겨 들어갔다. 세균부대를 보유한 관동군만이 간신히 최후까지 버티고 있는 판이었다. 관동군에는 조선출신 장교나 징용병들도 다수 있었다. 강제로 징집되어 온 징용병들은 한시바삐 왜구들이 항복해 버리고 그로써 그리운 고향에 돌아갈 수 있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왜구들에게 아부해서라도 출세하여 '대일본제국 장교'가 되려고 스스로 만주사관학교나 일본사관학교를 선택했던 얼빠진 일부 대한국인 장교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미 대일본 육군의 소장장교로서 출세의 길에 들어선 그들 선택된 대한국인 장교들은'일본천황폐하'에게 분골쇄신하겠다고 충성을 다짐하고,동족인 대한국인들이 앞장 선 왜구격멸 투쟁에 총·포를 들이대기도 했다. 가지각색의 야망을 가지고 왜구들의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그들 대한국 출신 소장 장교 중에, 만주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특별우대를 받아서 일본육사까지 나온 다가끼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자가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켜서 한국의 대통령까지 했고 그리하여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희비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대한국인들에게 가한 왜구들의 박해는 가히 악마적인 것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민족정신의 말살을 기도하여 창씨개명을 강요하고,조선어 말살을 기도하며, 온갖 공출과 수탈 끝에 산야에는 굶어 죽은 춘궁민들이 널리게 되고, 일을 할만한 장정 들은 '조선인 사냥'이라는 신판 노예사냥에 걸려 수백만 명이나 북해도·사할린·큐슈 등의 살인적인 강제노동과 광산노동에 끌려가고, 20만 명에 달하는 아름답고 건강한 꽃같은 대한국의 딸들은 정신대라는 미명하에 왜구들의 동물적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군대창녀로 끌려갔다. 얼빠진 거짓 민족지도자(즉, 친일매국노)들은 그러한 왜구들에게 항거는 못할 망정,오히려 왜구들의 장단에 놀아나면서'천황폐하 만세', '총후보국(銃後報國)', '천황폐하의 적자(赤子)가 되자'는 등의 선동적인 연설을 침을 튀겨가며 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런 민족반역자들의 이름만 열거하는 데도 한권의 두꺼운 책이 따로 필요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한 때는 삼일독립선언에 대표자로 참가했던 자들까지 한데 어우러져서'민족'이라는 이름에 똥칠을 하고, 청춘남녀들에게는 징용과 정신대를,그렇지 않아도 거덜이 난 동포들에게는 천황폐하(히로히또)를 위하여 숟가락·젓가락·밥그룻·결혼반지까지 모두 내어 놓으라고 앞장서서 떠들고 다녔다. 그와 같은 친일매국노들이, 나중까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서 한국현대사의 암울한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거듭된 탄압 끝에 그나마 최후까지 남아서 '해방투쟁'을 하던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조직마저 마침내 지하로 잠적하여 침묵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부 유능한 지도자들은 왜구들의 패망을 예견하고 앞으로 맞이하게 될 광복에 대비하여 여 운형을 중심으로 건국동맹을 결성해 가고 있었다. 왜왕 히로히또는 미군의 왜열도 상륙이 임박해지자 왜열도 주민들에게 옥쇄할 것을 명령하고 죽창이라도 들고 미군에 저항하도록 강요했다. 전투기에 쓸 연료마저 다 동이 나버린 왜구들은 대한국의 소나무에서 송진까지 긁어 모아 연료에 대신했다. 그로 말미암아 그렇지 않아도 왜구들의 남벌로 인하여 황폐화되다시피 한 대한국의 울창하고 아름답던 삼림은 완전히 거덜이 나 버렸다. 홍수는 연례행사가 되어 버렸고,껍질이 벗겨진 소나무들은 말라 죽어갔다. 대한국은 산천마저 다 말라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국인들에게 있어서 대일본제국이란 악마의 다른 이름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파씨스트강도 일본이 본토옥쇄를 결정하자 미합중국의 수뇌들은 다소 당황했다. 아무리 전쟁으로 인하여 미합중국의 경제가 되살아나긴 했지만 그동안 태평양에서는 수십만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만일 옥쇄할 각오를 하고 있는 일본 열도를 재래식 군사력으로 공격할 때 얼마나 희생이 클 것인지는 예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미국은 무엇인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인쉬타인을 비롯한 유태인 과학자들의 비정상적이면서도 우수한 두뇌의 결정체인 원자폭탄이 만들어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네바다 사막에서 행해진 성능실험에 의하여 그 우수성이 입증된 원자폭탄은 마리 뀌리가 방사능을 발견해 낸 이래 마리 뀌리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인류에게 확실한 죽음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인류 최후적인 무기였다. 결코 죄없는 민간인들을 향하여 사용될 수 있는 성질의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마침내 결정은 내려졌으나 실제 실험대상 지역은 파씨스트 일본제국의 괴수들이 모여있는 도쿄가 아닌 엉뚱한 시범도시가 선정되었다. 서기 1945년 8월6일 인류는 문명과 첨단과학 기술의 이름아래 야만과 지옥을 향하여 큰 전진을 기록하게 되었다. 매일같이 셀 수 없을 만큼 날아오던 미국의 공습폭격기들이 그날은 이상하게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폭풍전야의 불길한 정적이었다. 히로시마의 하늘에는 단지 한 대의 폭격기가 유람을 하듯이 유유히 날아와서 선물보따리같이 생긴 거대한 검은 쇳덩어리를 낙하산에 매어 달아 떨구고는 재빨리 사라져 갔다. 폭파시간이 장치된 그 괴물덩어리가 서서히 지상에 착륙하고 있는 광경을 의아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던 히로시마의 민간인들은 갑자기 터진 섬광과 함께 소돔과 고모라 전설에 나오는 소금기둥처럼 변해 버렸다. 단 수초사이에 양민 십여만 명이 잿가루가 되어 사라진 것이었다. 731악마부대의 생체실험에 대한 앙갚음이라고나 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이로써 미합중국 수뇌부의 의식수준은 731부대 '연구원'들의 의식수준보다 더 나을 것도 없다는 명백한 세계사적 증거를 남기게 되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상황은 곧 왜왕 히로히또를 비롯한 왜구수뇌부들에게 전해졌고 대경실색한 일본 제국주의 파씨스트 강도들은 더 이상의 항전이 초래할 더욱 가공할 자기들의 참화만은 피하려고 항복의 명분을 찾기 위해 분주히 서둘렀다. 일본제국주의와 불가침협정을 맺었던 쏘비에트는 그 이유가 불분명한 미국의 대일참전 제안을 받고 8월 8일에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선전포고와 함께 만주와 조선 으로 진군을 개시했다. 이미 껍데기만 남은 데다가 본토의 원자폭탄 공격에 넋을 잃은 관동군은 전의를 상실했으므로 쏘련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도 만주를휩쓸어 갔다. 8월 9일에는 역시 불분명한 이유로 미합중국의 핵광신자들이 나가사끼에 다시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죽음의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당황한 왜왕 히로히또는 8월 10일에 왕정 유지를 조건으로 포츠담선언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8월 15일에 히로히또는 '전쟁의 총책임자'로서 무조건 항복을 발표했다. 그 동안에도 쏘련의 '해방군'은 만주 각지의 관동군을 강타하면서 대한국의 북반부까지 밀어 닥치고 있었다. 왜구들과 한 패거리였던 왜족 거류민들은 황급히 그동안 다른 민족들에게 수탈한 재물들을 챙겨서 본토로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쏘련군의 기동력이 더 빨랐으므로 많은 왜족들은 쏘련군에게 덜미를 잡혀 약탈당하였고 젊은 부녀자들은 야수적으로 강간당하기 일쑤였다. 저들이 다른 민족에게 수십년동안 해 왔던 강도짓에 대하여 똑같은 방법으로 당하게 된 것이었으니 어디에다 하소연할 데가 있을 리도 없었다. 관동군 포로들은 곧바로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 등지로 실려가서 수년간 중노동에 동원되었는데 그 중에서 생존한 자들 대부분은 나중에 왜열도 본토로 송환되었다. 만주국의 허수아비 황제였던 부의도 탈출 도중에 쏘련 공정대에 체포되어 한 많은 생애를 다시 수용소에서 보내게 되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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