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반정(反正) 세계사

97 반문명을 향한 행진곡

浮萍草 2015. 3. 26. 10:49
    내셔널지오그래픽 캡쳐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12. 반문명을 향한 행진곡
    1 . 이차세계대전 치스 독일은 서기 1935년의 재무장을 신호로 본격적으로 게르만 민족에 의한 세계지배를 준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철저히 위장할 필요가 있었으므로,다른 나라들의 경계심을 누그러 뜨리려고 서기 1936년에 베를린에서 국제올림픽을 개최했다. 국제 대회를 통하여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도 알릴 겸 위장된 평화공세를 펴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올림픽의 꽃이요 상징이기도 한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게르만 민족도 아니요, 잘 먹고 영양좋은 어느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선수도 아닌 헐벗고 굶주렸던 조선민족의 장한 아들 손 기정 선수였다. 그 상징하는 바 의미는 매우 큰 것이었으므로, 게르만족과 동맹을 맺었던 왜구들은 조선의 신문에 게재된 손 기정 선수의 입상 사진에서 일장기가 없어진 소위 '일장기 말살사건'에 대해 신경을 곤두 세우고, 더욱 가혹하게 언론탄압과 민중탄압을 자행하게 되었다.
    하여튼 일단 서양제국들의 따가운 경계의 눈총을 피할 수 있게 된 나치스 독일은 더욱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쏘련과도 불가침협정을 맺어서 일차대전 당시의 실패를 미연에 방지하려 했다. 쏘비에트 러시아는 그들 나름대로 공산주의적 경제건설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를 얻으려고 그 협정에 응했다. 레닌이 죽은 후 벌어진 추악한 권력투쟁 끝에 두번째 권력자로 등장한 스탈린도 역시 유태인 출신으로, 과감하게 부르조아와 지주들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그 결과 수백만 명 이상의 양민들이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 굶주림 속에 방황하다가 죽어갔다. '민중의 적'이자 '혁명의 적'으로 낙인찍힌 그들은 드넓은 러시아 벌판 그 어느 곳에서도 용납되지 못했다. 기나긴 시베리아 횡단 철로에는 추위와 굻주림과 절망에 지친 유랑자 가족들이 달리는 기차에 뛰어 들어 동반자살하는 경우가 흔히 발생했다. 처음에는 급정거하던 열차들도 나중에는 서는 일도 없이 '혁명과업을 앞당기기 위하여'달려가기만 했다. 인간다운 삶을 추구한다는 추상적인 목적 하에 바로 그 인간들이 현실적으로는 깔려 죽어가고 만 것이다. 스탈린은 반혁명세력을 사전에 제거한다는 명분아래 나치스를 능가하는 비밀경찰제도를 만들었다. 스탈린의 심복인 유태인 출신 베리아가 총책임을 맡은 '쏘비에트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의 비밀경찰은 쏘비에트 사회의 모든 분야에 빠짐없이 끼어 들어 갔고 체제에 비판적인 '인민'들을 가차없이 적발해내어'공화국의 적'이라는 명분 하에 처단하거나 북극해와 시베리아의 얼어 붙은 강제수용소로 몰아보냈다. 스탈린과 그 일파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손이 있어도 글을 쓸 수 없고 발이 있어도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 심지어는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혁명에 참가하여'혁명의 원로'쯤으로 대접해줘야 마땅할 '혁명선배'들조차도 스탈린의 숙청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공포와 전율의 암울한 분위기가 다시 러시아 전국을 휩쓸었다. 바로 20세기의 또 하나의 지옥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쏘비에트의 실정을 잘 알고 있던 히틀러로서도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적을 만들면 안된다는 판단아래, 우선 쏘련을 안심시킨다는 속셈으로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불가침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1차대전때 브레스트협정에 의하여 레닌으로부터 얻어냈던 풍요한 우크라이나를 포기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전통적인 먼로주의를 내세우는 미합중국은 또 다른 의미에서 나치스 독일의 평화공세를 일단 순순히 받아 들였다. 스페인에서 사회주의적 민주국가를 수립하고자 시도된 혁명을 폭압으로 잠재운 프랑코 총통은 히틀러의 좋은 지지자가 되어 주었으며 일차대전으로 약간의 이익을 보았던 이태리반도의 뭇쏘리니는 영국과 프랑스의 독무대인 북아프리카를 장악하고픈 욕심으로 은근히 히틀러가 일을 터뜨려주기를 바랬다. 제국주의 이태리는 이미 리비아와 이디오피아에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서 두 나라를 위성국가로 만들어 버렸고, 이를 경계한 영국과 프랑스에 의하여 외교적인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디오피아와 리비아의 주민들은 아프리카의 마지막 독립지역을 지키기 위하여 영웅적으로 저항하였으나,초현대식 무기로 중무장한 '로마의 후예'인 이태리반도의 야만인들에 의하여 무수한 희생을 치른 끝에 일단 굴종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치스 독일의 주요 적대국은 프랑스와 영국으로 압축되었다. 동양에서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영국과 프랑스가 장악하고 있던 동남아시아와 인도지역의 풍부한 천연자원 지대를 확보하려는 야심에 들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나치스와 동맹을 맺었다. 나치스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개시로 시작된 이차대전은 인류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대규모 살륙전이었으며 악마와 야만괴수들의 머리로 짜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이 총동원되었다. 서양은 완전히 미쳐버린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일찌기 '탈아론'으로 동양천지를 지옥으로 만들기 시작했던 왜구들도 동남아시아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했다. 이 자들도 이미 일찌감치 미쳐 있었던 것이었다.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마다 인간 살륙의 광기가 불을 뿜어 대었으며 이미 전쟁이 시작된 이상 누가 잘했고 못했고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승리만을 목적으로 적국에 대한 가차없는 살육과 파괴가 총출동했다. 왜구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초기에 영·불 식민지에 대한 승리를 거두어 기고만장해진 끝에 태평양을 제압하겠다고 날뛰었으나, 미합중국만은 건드리지 않으려는 입장 이었다. 미합중국의 막강한 국력과 전력은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필리핀과 대양주까지 장악하려던 욕심은 참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서기 1941년 12월 8일에 이른바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여 미합중국의 태평양 함대를 초전에 제압하려 했다. 그것은 왜구들의 크나큰 오산이었으며 미합중국 정부는 바로 그러한 도발이 하루빨리 있기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던 것이나 다름없었던 바였다. 진주만에서 실제로 침몰한 해군함정은 거의 모두 폐선에 가까운 노후선박들로 미합중국의 태평양함대 주력은 진주만 습격 후 곧바로 태평양 전역에서 활발한 작전을 개시했다. 미합중국은 다가오는 대공황의 어두운 그림자를 한 순간에 떨쳐버리고 다시 한번 밝은 미래를 예감할 수 있게 되었다. 미합중국의 모든 산업이 초과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본주의 선두주자인 미합중국의 번영을 향하여! 마지노와 덩게르크에서 수십만의 영·불 연합군을 격파하여 서부전선에서의 우위를 굳힌 후 파리에 입성하여 비시 괴뢰정부를 세운 나치스 독일은, 곧이어 스탈린의 쏘비에트공화국을 공격대상으로 삼고 동부전선에 총력을 기울였다. 밤낮없는 독일 폭격기의 런던공습으로 영국의 공격력을 일단 견제해 놓은 상태에서 독일의 주력부대는 곧장 우크라이나와 스칸디나비아와 발트해 연안을 장악해 들어갔다. 미합중국의 참전이 결정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미합중국은 진주만에서 '습격당한 사실'을 강조하며 일본과의 전쟁에 뛰어 들었고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과 이태리는 자연히 미합중국의 적국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나치스 독일이 유태인에 대한 가혹한 학살과 박해를 자행한 것은, 유태인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미합중국으로 하여금 나치스 독일에 대한 대량 보복적인 성격을 띈 참전을 보다 용이하게 한 큰 요인이 되었다. 나치스 독일은 점령지역내의 거의 모든 유태인들을 각 지역의 특수 수용소에 가둬 놓고 심한 모욕과 학대와 중노동을 강요했고, 심한 질환 등의 이유로 노동력이 없거나 반항하는 자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다소 이론(異論)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로 그 당시 전세계 유태인 1,200여만 명 중 약 절반에 해당하는 600여만 명이 그와 같은 만행의 제물이 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특히 심신이 허약하거나 쉴 새 없는 중노동에 체력이 쇠약해진 사람 심한 전염성 질병을 앓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스실에서 학살당하여, 아우슈비츠와 다카우 등 강제수용소의 화장터에서 연기로 사라져갔다. 전 세계의 정치·경제적 실력자들이던 유태인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었다. 그리고 미합중국의 전격적인 참전으로 전쟁은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연합국에 대한 무제한적인 원조가 미합중국으로부터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미합중국은 나치스 독일의 러시아 석권을 막기 위해 공산주의독재자 스탈린에게도 무한대의 원조를 제공했다. 사회주의 쏘비에트의 '신경제계획'은 자본주의자들의 대표격인 록펠러재단의 해외투자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으므로 쏘비에트에서의 미합중국 이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나치스 독일의 사활을 건 총공격으로 러시아의 명실상부한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의 마지막 거점인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에서는 유럽지방의 운명을 건 최대의 격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수개월간 계속된 끊임없는 공방전에서 미합중국의 대량 원조에 힘입은 쏘비에트 군대가 나치스 독일을 굴복시키고 수십만 명의 포로들을 잡아들이게 됨 으로써 전쟁의 승패는 가름나기 시작했다. 속전속결로 유럽지방을 석권하려 했던 히틀러의 전략이 벽에 부딪치고, 전쟁은 나치스 독일의 열세 속에 장기 지구전으로 접어들기 시작했으나, 그것은 이미 후방 보급능력이 뒤떨어지는 나치스 독일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북아프리카에서도 나치스 독일과 영국의 기갑사단들이 식민지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려고 평화롭기만 하던 사막과 산악지대에서 아비규환의 지옥을 연출했다. 여기에서도 처음에는 롬멜의 나치스 전차군단이 우세하였으나 미합중국에서 대규모 기갑부대를 보내어 영국의 몽골메리 기갑사단을 지원한 데다가, 나치스 내부에서 롬멜의 상승 세력을 견제하는 졸속한 권력 암투가 벌어졌다. 마치 이천여년 전 옛날의 한니발같은 곤경에 처하게 된 롬멜은 마침내 선전(善戰)한 보람도 헛되이 패배했다. 또한 프랑스북부의 노르망디와 이태리반도에 대한 전격적인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연합군은 승리의 길을 달렸다. 후방의 보급도 끊어진 채 가망없는 전투를 계속하게 된 나치스 독일의 말로는 비참하였으나 우수한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나치스는 폰 브라운이 발명한 로켓을 이용하여 장거리 미사일로 여전히 런던을 공습하는 한 편 깊은 산중의 비밀요새에서는 전세를 만회할 수 있는 획기적인 신무기 개발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동부전선에서 밀어닥친 쏘비에트 러시아군과 서부전선에서 진격 온 연합군이 엘베강에서 만나고 곧 베를린으로 총진격해 들어감으로써 이 야만적인 인류 최대의 살륙전도 일단 끝이 났다. 히틀러가 베를린 함락의 마지막 시기에 확실할 종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은 후일에 여러가지의 추측을 낳게 했다. 나치스 사령부의 한 지하실에서 자살한 것을 부하들이 불태워 버렸다고도 하고 비밀리에 소형비행기로 노르웨이로 탈출하여 그 곳에서 유보트(잠수함) 함대를 이끌고 어딘가로 사라져 갔다고 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최근 수십년간 많이 관찰되고 있는 미확인 비행물체(유 에프 오)들이 다름 아닌 나치스의 비밀기지에서 세계정탐을 위해 발진된 것이라는 설명도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유럽지방에서의 전투는 종식되었기 때문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연합국 세력을 상대로 혼자 버터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졌다. 이태리의 파시스트 뭇쏘리니는 이태리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밀라노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전쟁초기에 동남아시아에서 열세에 몰렸던 영국과 프랑스는 버마전선을 시작으로 총공격을 시작했으며,지나지방에서도 국·공 합작에 의한 항일전선이 형성되어 대부분의 농촌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태평양에서는 미드웨이 해전에 패배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수세에 몰렸고. 싸이판·가달카날·이오지마·오끼나와 등 각 섬의 왜구 수비군은 옥쇄를 강요당했다. 남방의 모든 전선과 지나지방 등의 모든 전선에서 공격을 계속하던 연합군의 눈에는 기묘한 광경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참호구덩이에서 흙탕과 땟국에 쩔어서 두 손 들고 나오는 굶주린 아귀같은 모습의 왜구들 사이에 어리숙해보이는 젊은 여자들이 수없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남태평양의 이름모를 작은 섬 구석구석의 왜구 주둔지마다 젊고 아름다운 이러한 여성들이 왜구들과 같이 옥쇄를 강요당하고 있었는데 이들 젊은 여성들이야말로 왜구들에 의하여 대한국에서 끌려간 20여만 명에 달하는 꽃다운 처녀들이었다. 이 가련한 대한국 처녀들은 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이역만리에 끌려가서 왜구들의 온갖 뒷치닥거리를 맡아하고도 하루에 수십번씩이나 날강도 왜구들의 성노예 노릇 까지 강요당하며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있었다. 만주에 주둔한 관동군의 세균전부대인 731부대와 함께 강도 왜구들의 '악마적 본성'을 잘 보여준 이러한 소위 '정신대'사건은 인류문명을 망쳐 온 제국주의강도 왜구 들의 정신적 파탄을 선언하는 결정적 증거였던 것이다. 군병원이나 군피복공장, 또는 군수공장 등에 취업할 수 있다는 사탕발림같은 낭설과 함께 강제 연행된 순진무구한 조선의 귀하고 아름다운 딸들이 임시열차에 실려 봉천역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당시 왜구의 하나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제 1진 위안부가 도착한 날 위안소 앞에는 1개월 가까이 금욕했다는 병사(즉,왜구졸개)들이 몇 줄씩이나 장사진을 쳤다. 그 제 1진의 처녀들은 연일 색지옥에 시달렸다. 라바울에서는 하루에 (왜구)90여명을 겪어야 했다고 한다. (색욕을 채우려는 왜구들은) 처녀들이 밥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염주를 꿰듯이 계속 밀려들었다. 관리부에서는 주먹밥을 만들어서 일어나 앉을 시간도 없이 누워서(먹을 것을) 기다리던 처녀들의 입에 그것을 넣어 주었다."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낯선 남성에게 손목만 잡혀도 큰 수치로 여기던 문명한 대한국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처녀들은 그런 더러운 치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자살하는 일이 빈번했으며, 살아 있어도 죽지 못해서 연명해 갈 뿐이었다. 설령 극도로 열악한 그와 같은 환경에서 살아 남았어도 왜구들이 퇴각하면서 증거인멸을 한답시고 수류탄투척과 기총소사 등으로 악랄한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천신만고로 목숨만은 건졌던 처녀들도 차마 그들의 망가진 몸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어서 이름과 사연들을 숨긴 채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열도와 왜열도 등 각지에 흩어져서 오늘날까지도 풀 길 없는 한을 품고 살아 오거나 쓰러져 갔다. 정절을 생명보다 중하게 여기던 대한국의 순진무구한 처녀들‥왜구들의 집단 성폭력 앞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내던져 졌던 그녀들이야말로 빗나간 광신적 제국 주의의 최대의 집단피해자였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草浮
    印萍